[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07] 대희년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대희년을 선포하셨다(루카 4,16-30). 지난 2000년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선포하신 대희년을 지냈다. 천년을 마무리하고 새 천년대를 시작하는 역사적인 해였다. 2000년 전에 탄생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롭게 하고, 주님 안에서 실현된 희년을 다시 꽃피우겠다는 의지도 담겨있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한 신자들은 대희년의 뜻을 이해했겠지만, 그냥저냥 지나간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리고 교황님이 그 본(本)대로 재선포하신 희년은 구약성경에 기초한 것이다. 레위기(25,11)에 오십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율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오십년이 기준이었고 희년은 또 무엇일까?
오십 년마다
성경에서 ‘오십’은 매우 상징적인 숫자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은 ‘백 세 시대’라 하지만, 고대에는 오십이 인생의 완숙기였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서른부터 쉰 살까지 만남의 천막에서 작업할 수 있는 남자들의 수를 세어라.”(민수 4,3.23 참조)하고 명한다. 곧, 성막에서 복무하는 레위인들이 쉰 살에 퇴임을 하였다는 뜻이다(민수 8,25-26 참조).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요한 8,57) 하고 공격했다. 오십은 인생을 오래 살아 지혜가 쌓이고, 원로로 존경받을 수 있는 나이다. 그런데 그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너무 젊어, 인정할 수 없었다.
구약성경이 규정한 주간절도 파스카 축제 뒤 ‘오십’ 일째에 지낸다(레위 23,15-16; 신명 16,9). 신약성경에는 주간절이 ‘오순(五旬)’절로 나온다(사도 2,1).
성경에 자주 반복되는 ‘오십’이 희년으로 연결되는 까닭은 안식년의 중요성 때문이다. 매 일곱째 해는 안식년으로서, 토양에 휴식을 주어야 하는 ‘주님의 해’다(레위 25,1-7). 그런 안식년이 일곱 번 흐른 사십구 년 뒤 오십 년째에, 이스라엘은 숫양 뿔 트럼펫을 불어 희년을 선포한다(9-10절). 이 때문에 희년을 뜻하는 그리스어 ‘요벨’도 어원이 ‘숫양’으로 추정된다.
일곱은 신성한 숫자다. 일곱의 일곱은 더 신성하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을 통해, 희년이 얼마나 거룩한 해인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씨를 뿌리거나 저절로 열린 열매를 따지 말라는 율법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11절), 안식년과 똑같은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다(4-5절).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희년이 실제로는 사십구 년째였다고도 본다(22절 참조).
왜냐하면, 사십구 년과 오십 년째가 모두 안식년이면, 두 해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한다. 그럼 그 이듬해 가을까지 소출이 없으므로, 민생에 끼치는 영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의 해
사십구 년째건 오십 년째건 희년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은 누릴 수 있었음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새해는 가을에 시작한다. 그래서 희년은 유다력으로 일곱째 달에(우리 달력으로 9월말에서 10월초) 선포되었다. 희년이 주님께 속한 해인 만큼,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빚진 이, 노예로 팔려간 이, 억울하게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자유를 되찾아준다. 기업(基業)으로 이어받은 땅을 잃은 경우는 희년에 환원받을 수 있게 한다. 곧, 속박과 빚에서 벗어나 ‘해방’을 누리므로 기쁜 한 해, ‘희년’이다. 하지만, 레위기(25,18-22)에서는 솔선수범해 지키기 어려울 인간적 한계를 헤아렸기에, 주님께서 준수자들을 풍성하게 축복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덧붙인다.
속량의 해
희년 제도의 중심은 ‘가족’과 ‘땅’이다. 곧, 종으로 팔려 가족이 해체되거나, 몸 붙일 땅 없이 유랑하게 되는 상황을 방지한다. 그러므로 희년은 ‘속량’이 완성되는 해다. 속량 제도는, 가산을 팔고 노예가 된 자들이 언제든 대가를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음을 골자로 한다.
형제나 친족이 대신 대가를 치러 구해줄 수도 있다. 성경은 대속해 주는 형제 · 친족을 ‘구원자(고엘)’라 칭한다(레위 25,25; 룻 4,4; 예레 32,7-8 참조). 속량의 대가를 정산할 때는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기준으로 셈한다(레위 25,47-52). 그러니 땅을 팔아도, 엄밀히 말하면 땅이 아니라 땅을 사용할 권리를 판 셈이 된다.
다만, 도성 안의 집들은 예외다(29-30절). 땅 중심 농경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도성은 경제 기반 안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성은 거주지로 밀집되어 협소하므로, 농사지을 땅이 없다.
같은 지파라도 부유한 가정이 다른 가정들의 가산을 대속한 경우,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희년에는 원주인에게 가산을 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본인에게도, 친족에게도 재산을 되찾을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희년에 하느님께서 친족처럼 ‘구원자(고엘)’로 나서신다. 피붙이 없는 고아의 ‘후견인(고엘)’도 하느님이시다(잠언 23,11).
레위기는 속량 제도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나안은 주님의 자비로 주어진 선물 같은 땅이다(25,38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주님의 본을 받아 서로에게 자비로워야 하며, 불우한 이웃을 핍박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해주셨다. 그러니 이스라엘도 종의 신세로 전락한 형제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25,23). 곧, 모든 땅은 하느님 소유이므로, 오십 년마다 원위치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주인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너무 부유해지지 않고 또 가난함의 굴레로 떨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이상적인 세상인가?
희년의 기원
고대 근동에도 해방의 해를 선포하는 관습이 있었다. 아카드어로는 ‘안두라루’라 불렀으며, 이스라엘보다 몇 세기 앞선다. ‘해방’을 뜻하는 그리스어 ‘드로르’가 이 아카드어에 어원을 둔다. ‘드로르’는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다(레위 25,10; 이사 61,1; 에제 46,17 등).
고대 근동에서는 새 임금이 즉위할 때, 해방이 선포되었다고 한다. 나라 전체에 횃불을 올려, 해방의 신호로 삼았다(이스라엘에서 숫양 뿔 트럼펫을 분 것처럼). 하지만, 해방 선포의 여부는 전적으로 임금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곧, 의무가 아닌, 임의적 성격의 관습이다. 반면, 레위 25,10은 해방의 해를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온 이스라엘이 준수해야 할 율법으로 규정했다.
속죄와 해방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고 권리에는 의무가 수반되듯이, 희년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레위기(25,9)도 해방 선포에 앞서, ‘속죄일’을 전제조건으로 규정한다. 빼앗긴 자유와 권리를 되찾으려면, 그 결과를 가져온 지난 날의 행동에 회개가 먼저 요구되는 법이다. 그래서 속죄일에는 온 이스라엘이 옛 과오를 돌아보고 죗값으로 고행하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23,26-32 참조). 곧, 자신을 속박에 빠뜨린 죄를 깨닫고 용서받은 뒤에야,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
대희년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셨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선포하신 대희년도 지난 날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희년의 실효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희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이사 5,8; 미카 2,2 등 참조). 빚을 준 이, 노예를 사들인 이, 땅을 구입한 이들이 희년마다 실제로 빚을 탕감해 주고, 구입한 것을 반환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역대기 하권(36,21)에 따르면 안식년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으니, 희년은 말할 것도 없다. 예레미야는 안식년인지 희년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종을 해방시키는 율법(신명 15,12-18)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세태를 꾸짖는다(예레 34,8-22 참조).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을 겨냥해, ‘해방의 해’를 재규정했다(에제 46,16-18 참조). 이제까지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해도, 훗날 회복될 이스라엘 땅에서 지파 간 평등을 유지하고 귀족층의 수탈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신약시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루카 복음(4,16)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인이 되셨을 때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예로부터 안식일마다 구약성경의 일부를 봉독했다. 모세오경을 봉독하고, 뒤이어 예언서를 읽는다. 예수님께 주어진 부분은 ‘해방(드로르)’을 선포하는 이사 61,1-2였다.
이사야의 예언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선언으로 대희년을 선포하시자, 사람들이 처음에는 말씀의 은혜로움에 감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웃집 요셉의 아들이 어떻게 저런 선포를 한단 말인가?’ 하며,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벼랑에 떨어뜨리려 한 사건으로 발전했던 것이다(루카 4,28-30 참조).
희년의 실현
희년은 대물림의 빈곤에 빠진 이들에게 더 할 수 없이 기쁜 한 해다. 하지만, 레위기가 희년을 일생에 한 번 누리는 특별한 해로 규정한 까닭은, 늘 그렇게 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헤아렸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선한 규칙도 악용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딱한 상황도 아니면서 교묘히 빚을 떼먹는 부작용도 발생할 수 있다. 흥청망청 낭비하고도 희년에 의지하려 들 수도 있다. 이런 부작용은 실제로 어려운 이웃에게 빚을 주려는 의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희년을 규정하여, 나름대로 지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마태 22,21 참조)고 하신 말씀처럼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할 때, 기꺼이 일부를 나누어 이웃을 도울 수 있다.
또한 내 죄를 용서받듯이, 내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려 노력할 수 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완전한 빚 탕감이나 용서는 힘들다 해도, 노력 속에 새로운 희년을 창출해 갈 수 있지 않을까 묵상해 본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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