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특강]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 저는 예수님이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성탄을 기다리면서 대림절에, 예수님의 죽음을 성찰하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 로마 4장에 묘사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로마 5,1-11을 중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기 위해 배운 신앙의 신비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입니다. 이것은 바로오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로마 5-8장. 우리 체험 이야기 바오로는 로마 4장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장엄한 신앙 고백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4,25). 로마 1-4장의 주제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화’라면 5-8장의 주제는 ‘세례받은 이들의 새로운 삶과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가 전개되는 것이지요. 로마 5-8장을 읽을 때에 두 가지 요소를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 로마 5-8장의 전제에 해당하는 배경으로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사이의 대조(antitesi) 가 암시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 편에는 아담(죄, 죽음, 율법, 육)이 있고, 반대편에는 그리스도(의화, 생명, 은총, 성령)가 있습니다. 아담에게 속한 삶이 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삶이 있습니다. 로마 5-8장의 맥락에 따르면 믿는 이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건너간 사람’,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변화된 인간입니다. 둘째, 1-4장과 비교해서 5-8장에서 일인칭 복수형, ‘우리’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주로 로마인들과 자신이 같이 체험하고 있는 신앙을 나누고 그 체험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전달할 때입니다. 여기에서 그 공통 기반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인데 이것이 5,1-11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로마 5,1-11은 로마 5-8장에서 입문 역할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이 이 대목의 처음과 끝을 열고 닫는 표현입니다(1,11). 전반부인 5,1-5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체험의 첫 출발점에 대해 다루면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이 얻게 된 선물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 삶의 고통이 방해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통하여 당신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5,5). 후반부인 5,6-11의 중간인 6절에서 바오로는 ‘하느님 사랑’의 게시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6절). 하느님 사랑은 우리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드러난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찬란히 빛납니다. 바오로는 10절에서도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통해 믿는 이들에게 공통적인 역사 전체를 요약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지금’이라는 말은 우리들의 자랑이 미래의 희망만이 아니라, 또한 현재의 체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의화의 목표는 하느님을 닮은 삶,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보여주는 삶을 보여주는 것, 현재에 내 삶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내 삶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화를 완전히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의화, 곧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의 첫 단계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뒤에 인간을 계속해서 의화시켜 가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5,1-11에서 구체적으로 성찰하고 싶은 주제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바오로는 어떻게, 어떤 환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런 죽음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오로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감정을 섞지 않고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것이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케리그마)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핵심 단어는 ‘하느님, 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오로는 항상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우리를 위하여’와 밀접하게 연결하지 않으면 피상적인 수난 이해에 머물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정말 나의 일임을 인정할 때, 내면화할 때,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를 정말로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은 내 죄가 그분을 죽였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오순절에 청중에게 한 설교입니다. “여러분이 나자렛 예수를 죽였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하고 의인이신 분을 부정했습니다!”(참조. 사도 2,23; 3,14). 베드로는 이 3,000명이 골고타에서 예수님를 직접 못 박지 않았고,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지도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청중은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정말로 ‘그들을 위해서’임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다음에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라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오늘날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598항에서는 “계속해서 죄에 다시 떨어지는 사람들이 이 무서운 잘못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권고』 5,3)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고통과 사랑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로마 5-8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인데, 바오로는 그 구원의 궁극적인 원천이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남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은 왜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런 고통을 허용하실까? 아들에게 무정한 그런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도 지구 곳곳에서 폭력에 의한 무죄한 이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들을 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IS에 의해 살육당하는 임신부의 태아들과 시리아 난민들의 아기들의 비참한 죽음을 허용하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어.” 인간의 고통은 쉽게 하느님의 부재와 불신앙과 연결돼 버리곤 합니다. 하느님은 정말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에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성경 전체의 증언, 특히 구약을 살펴보면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하늘에서 인간의 고통을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해 마음속으로 고통을 겪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6).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배반에 슬픔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몇 번이나 그분께 반항하였고 황야에서 몇 번이나 그분을 괴롭혔던가!(시편 78,40).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백성아, 내 백성아!” 하고 외치는 하느님의 고통에 찬 외침을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고통 앞에서 아무 감정 없이 구경꾼처럼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바오로는 로마 8,32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과 창세 22,16에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의 희생제사와 관련된 표현과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오리게네스는 『창세기 설교』에서 창세 22,16을 해설하면서 바로 바오로를 떠올립니다. “이 말씀을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바오로와 비교해봅시다. 그분은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주셨습니다.” 이사악을 죽이기 위해 모리야 땅에 있는 산에서 아무 말 없이 올라가는 아브라함은 하느님 아버지의 다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속(救贖)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아버지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느님 뜻에 따라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갈바리를 향할 때 부재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아브라함이 가장 비참할 때가 아들 이사악이 “내 아버지!”(히브리어 원문)라며 “바쳐질 희생제물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볼 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같은 말을 외칩니다. “아빠! 아버지!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주십시오.”(마르 14,36). 바오로가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소중한 보물’을 아껴 놓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세자를 받으시는 분만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며 침묵 중에 아들의 희생제사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큰 희생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출발하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영성의 활력은 항상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면화한 성인들, 신비가들, 보통 사람들의 체험들로 구성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일 년 전체, 온 생애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숙한 나이에 이르는 지점에까지 성숙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결합하며,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어둔 밤 안에서도 인내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가장 어둔 밤 한가운데에서도 ‘당신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에디트 슈타인, ‘성탄의 신비’, 1931년 1월 31일). 철없던 어린 시절은 지나가고 새해에는 성숙한 어른으로서 살아야겠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출발해야겠습니다. [평신도, 2015년 겨울호(VOL.50), 임숙희 레지나(엔아르케 성경삶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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