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브리트, 계약
‘계약을 자르다’… 반으로 자른 짐승 사이 지나간 의례서 비롯 브리트는 히브리어로 계약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선조들에게 베푸신 큰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브리트는 고대 히브리인들과 우리 사이에 문화적 장벽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 브리트. 히브리어로 계약을 의미한다. 계약을 맺다 브리트는 본디 인간 사이에 맺던 약속이나 조약 등을 의미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민족들과도 브리트를 맺었다. 이를테면 일찍이 아브라함은 필리스티아인 아비멜렉과 브리트를 맺었다(창세 21,27.32). 라반은 야곱과 브리트를 맺었고(창세 31,44), 다윗도 요나탄, 아브네르 등과 브리트를 맺었다고 전한다(1사무 23,18; 2사무 3,13.21). 호세아 예언자는 에프라임이 아시리아와 브리트를 맺었다고 비판한다(호세 2,12). 그래서 이따금 브리트를 문맥에 따라 ‘동맹’ 등으로 옮긴다(창세 14,13). 브리트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노아를 살려주실 때 처음 나온다(창세 6,18; 9,9.11 등). 이어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창세 15,17) 모세와도(탈출 34,27; 신명 5,3) 브리트를 맺으셨다. 계약을 끊다 브리트와 가장 자주 쓰이는 히브리어 동사는 카라트인데, 이 말의 뜻은 ‘끊다, 자르다’이다. 그러니 ‘카라트 브리트’를 직역하면 ‘계약을 자르다’ 또는 ‘계약을 끊다’가 된다. 이 말을 우리말로는 ‘계약을 맺다’로 옮긴다. ‘자르다’를 ‘맺다’로 옮겨야 뜻이 통하는 것이다. 이런 번역에서 엄청난 문화적 거리를 느낄 수 있다. - 카라트 브리트. ‘그가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카라트’는 ‘자르다’를 뜻하므로, 이 말을 직역하면 ‘그가 계약을 잘랐다’이다. 우리말과 히브리어의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왜 브리트를 맺는 것을 ‘계약을 자르다’라고 표현했을까? 그 대답은 창세기 15장에 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브리트에 쓸 제물을 명하시고(15,9), 그 짐승을 반으로 자르라고 하셨다(15,9). 그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화덕과 횃불이 지나가고(15,17),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브리트를 맺으셨다(15,18). 그러니 ‘계약을 끊다’는 말은 계약식의 의례와 관련된 전통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약속을 상징하는 행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새끼손가락을 걸 수도 있고, 계약서에 서명을 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 장의 어음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보관했다가 약속한 날 서로 맞춰보고 대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토기 조각이나 금속 파편을 두 조각내어 약속의 확실한 징표로 저마다 한 조각씩 보관했다는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면, ‘계약을 자르다’는 표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브리트의 징표로 돌을 세우기도 했다(신명 27,1-13). 그래서 ‘계약을 끊다’는 표현과 함께 ‘계약을 세우다’(창세 9,9.11 등)는 표현도 볼 수 있다. - 브리트 올람. ‘올람’은 ‘영원’을 의미하므로, 이 말은 ‘영원한 계약’이란 뜻이다. 하느님과 한 번 맺은 계약은 영원한 계약이다. 가난한 유목민의 계약 한민족에게 계약은 낯선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도 친밀한 관계일수록 일일이 계약서를 쓰는 일이 어색하지 않은가? 하지만 가난한 유목민에게 브리트는 생존의 비책이었다. 가족 단위로 풀밭을 따라 이동하며 살던 유목민들은 거친 자연환경을 이겨야 했고, 짐승과 강도 등을 만날 수도 있었고, 광야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가까운 가족은 손에 닿지 않고, 때로 부족과 씨족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들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추울 때 재워주고, 짐승과 강도의 위협에서 보호해 준 사람들과 브리트를 맺으며 살았다. 이 호의를 절대 잊지 않고 내 후손들에게 꼭 말해주겠노라고, 그래서 당신과 나의 자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주치더라도 서로 호의와 평화를 유지하게 하겠노라는 의미에서 서로 ‘계약을 끊었다’. 그러므로 내 조상들이 누구와 브리트를 맺었는지 기억하는 전승이 집집마다 이어졌다. 창세기는 선조들이 언제 어떻게 어느 민족과 브리트를 맺었는지 상세하게 전한다. 과연 누가 은인이고, 누가 친구이고, 누가 인색한 사람인지, 누가 원수인지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전승에 기반해서 인식하고 살았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브리트를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의무이자 선조들이 물려준 귀한 축복이기도 했다. 소박한 유목민이었던 신앙의 선조들은, 그러므로 자신들이 아는 최고의 방법이자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는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큰 사랑과 호의에 감사하며 반드시 믿음과 실천으로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후손들을 위한 축복이기도 했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11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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