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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의 세계: 다윗과 필리스티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2-13 조회수5,401 추천수1

[성경의 세계] 다윗과 필리스티아 (1)

 

 

기원전 13세기 이집트를 벗어난 히브리인은 가나안에 정착한다. 이보다 앞서 다른 민족도 정착을 시도했다. 그리스 남쪽 바다를 떠돌던 해양민족이다. 이들은 크레타 섬을 거쳐 지중해 동쪽 해안에 자리 잡았다. 필리스티아인이다. 갓,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에크론 다섯 도시는 그들이 세운 국가였다(여호 13,3).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 했다. 성경도 오랫동안 블레셋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현재 가톨릭 성경은 블레셋을 필리스티아로 바꿨다. 히브리 발음 블레셋을 오리지널 발음 필리스티아로 교체한 것이다. 블레셋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되었다. 야훼란 말을 주님으로 대치한 것도 같은 이유다. 히브리말 야훼를 우리말 주님으로 바꾼 것이다.

 

다윗은 필리스티아와 묘한 인연을 맺었다. 적대관계에서 친밀관계로 갔다가 다시 원수로 돌아섰다. 사울 휘하에서 명성을 쌓은 건 필리스티아 전쟁 덕이었다. 싸움마다 승리했기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필리스티아는 증오했고 사울에겐 신경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결국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필리스티아로 숨어든다. 공생관계를 모색한 것이다. 필리스티아가 받아준 건 언젠가 써먹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다윗은 아키스(Achish) 왕이 있는 갓(Gath) 지방으로 갔다. 유다 지역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골리앗도 갓 출신이었다. 왕의 측근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폭로하자 미친 척한다. 뭔가 긁적거리며 수염엔 침을 질질 흘렸다(1사무 21,14). 다윗에겐 생사가 걸린 쇼였을 것이다. 아키스 왕은 미친놈이라며 돌려보낸다. 근동에선 사람이 미치면 악령의 개입으로 봤다. 접촉하면 악한 영이 들어온다고 여겼기에 내쫓았던 것이다.

 

이후 다윗은 아둘람(Adullam) 지역에 피신처를 정한다. 여호수아가 유다 지파에 분배한 남쪽 땅이었다(여호 15,35). 구릉지(丘陵地)로 자연동굴이 많았다. 다윗이 숨어 있다는 소문에 떠돌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백 명가량 되었다고 한다(2사무 22,2). 세력을 키운 다윗은 필리스티아로 다시 간다. 이번엔 육백 명 부하와 함께 가는 도피였다(2사무 27,2). 아키스 왕은 용병으로 받아준다. ‘임금님 눈에 드신다면 지방 성읍 한 곳을 주시어 살게 해 주십시오(2사무 27,5).’ 다윗의 청에 아키스는 치클락(Ziklag) 성읍을 줬다. 가나안 최남단 네게브 지역에 있었다. 네게브는 바싹 마른 곳이란 뜻이다. 사막지대임을 알 수 있다. 다윗은 1년 4개월간 필리스티아 용병으로 지내며 때를 기다린다(1사무 27,7). [2017년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다윗과 필리스티아 (2)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간 왕으로 있었다. 당시는 남쪽 지파만 다스렸기에 반쪽 왕이었다. 북쪽 지파를 통합한 실질적인 왕으로선 33년간 통치했다. 40년간 왕이었던 셈이다. 그동안 끊임없이 맞섰던 민족이 필리스티아다. 남북이 통합되자 이들은 곧바로 치러왔다. 군대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다윗은 즉시 되받아쳤고 승리한다. 그리곤 이긴 장소를 바알 프라침이라 했다(2사무 5,20). 바알이 깨진 곳이란 뜻이다. 다윗 왕의 등장과 함께 필리스티아는 서서히 약해진다.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1열왕 5,1).

히브리인이 이집트를 떠날 때 이들은 가나안에 살았다. 지중해 동쪽 해안에 도시를 만들며 거주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해안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지 못했다. 막강한 군대의 필리스티아를 피한 것이다(탈출 13,17). 홍해를 건너 광야를 돌고 돌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과는 출발부터 껄끄러운 상대였던 셈이다. 판관 시대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에 계속 당하기만 했다. 서둘러 왕정체제로 전환한 것은 이들과 맞서기 위한 강력한 조치였다. 이렇게 해서 다윗이란 영웅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윗은 밑바닥 사람이 아니다. 부친 이사이는 베들레헴 유지였고 다윗은 그런 집안의 막내였다. 하지만 철저하게 나락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다. 사울에 쫓기어 오랫동안 광야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적국 필리스티아로 가서 용병으로 지낸 적도 있었다. 곤경에 빠진 이와 빚지고 불만에 찬 이들이 다윗 주변에 모였다고 했다(1사무 22,2). 4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이해하고 받아줬기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내내 쫓기는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폭넓은 처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윗 이야기는 열왕기 하권에서 끝난다. 모든 왕은 그를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다윗의 길을 따랐는지 따르지 않았는지가 기준이다. 그런 까닭에 신화적 요소도 많다. 역대기는 다윗에게 불리한 사료는 일체 전하지 않는다. 사울을 섬긴 일, 광야로 도망간 일, 나발을 죽이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은 일, 밧 세바 사건, 필리스티아 용병생활은 전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다윗은 성경을 통해 화려하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필리스티아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침략으로 약해지다가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정복되고 만다. 포로로 끌려간 백성은 주변 민족에 흡수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팔레스티나란 지명만 남아 있다. [2017년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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