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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성경의 물신: 과거의 바알 오늘의 바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28 조회수5,504 추천수0

[구약 성경의 물신] 과거의 바알 오늘의 바알

 

 

바알은 강하고 매혹적이다. 권력과 재물과 성적 풍요를 보장하는 바알은 신과 인간을 거느렸다. 바알은 하느님 백성 밖에서 유래하였기에 본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왕국을 세우고 살림이 늘어나자 백성은 바알에 흠뻑 빠졌다. 벌써 바알을 살펴보는 1년의 여정을 마무리할 때다. 이번 호는 바알에 관한 성경 안팎의 정보를 요약하고, 바알을 연구하는 오늘날의 의미를 간략히 성찰해 보겠다.

 

 

권력과 풍요의 황태자 바알

 

바알은 ‘풍우 신’(風雨神)에 속한다. 한편으로 비를 내려 생명을 키우고, 다른 한편으로 적들을 폭풍처럼 섬멸한다. 풍요와 권력을 바탕으로 ‘거룩한 권능’(numinous power)을 지닌 존재였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인간은 ‘비바람의 신’에게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바알은 대략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레반트의 도시 국가에서 급격히 퍼졌다. 본디 바알(לﬠכ)은 ‘주인’, ‘주님’, ‘남편’ 등을 뜻하는 일반 명사였지만, 훗날 고유 명사가 되었다. 이 신의 이름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자극하기에 알맞다. 바알은 아버지가 둘이다. ‘하느님’ 또는 ‘신’을 의미하는 ‘엘’과 곡식의 신 ‘다곤’이다. 최고신과 풍요의 신을 아버지로 두었으니 바알은 권력과 풍요의 황태자다.

 

바알을 돕는 신들도 강하고 매력적이다. 용맹하고 강한 여전사 아나투는 바알의 오른팔이다. 바알의 세 딸은 촉촉하고 어여쁜 습기와 이슬과 안개다. 장인 신(匠人神) ‘코싸루와하시수’는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 내고, 결국 바알의 신전을 짓는다. ‘포도 덩굴과 들’이란 뜻의 ‘구파누와우가루’는 바알의 충실한 전령인데, 또한 풍요의 하위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알 신화는 바알이 두 신을 꺾는 이야기다. 신화의 전반부는 혼돈의 신 얌무를 꺾은 이야기요, 후반부는 죽음의 신 모투를 꺾고 바알이 부활한 이야기다. 결국 바알은 혼돈과 죽음을 꺾은 ‘질서와 생명의 신’이다. 바알은 얌무와 모투를 꺾고 천상과 지상을 영원히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다. 신들의 영도자이니 당연히 인간의 영도자 자격을 갖춘 셈이다. 이 지점에서 바알의 매혹은 극치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이 투영된 신이 바알이다. 권력과 재물과 풍요를 모두 갖춘 최고의 매혹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매혹은 하느님 백성의 내면을 삼켰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바알은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꽤 번성했다. 구약 성경에는 바알과 관련된 지명과 인명이 비교적 풍부하다. 남유다나 북왕국의 여러 지역에 이미 바알 신전이 존재했다. 게다가 솔로몬은 부국강병을 위해 외국과 교류하고 외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폈다.

 

바알 신전에는 바알의 예언자와 사제들이 즐비했다. 구약 성경은 바알 관련 의례와 바알 행진도 전한다. 요시야 임금은 바알에게 분향하던 사제와 숭배자들을 내쫓았다(2열왕 23,5). 예레미야는 “바알에게 향을 피우려고 세운 제단”을 꾸짖고(예레 11,13), 그런 행위는 주님을 진노케 한다고 경고했다(예레 11,17; 32,29).

 

바알은 외부에서 도래했지만, 고대 이스라엘 안에서 나름대로 독특하게 적응하고 발전했다. 이른바 ‘이스라엘에 토착화된 바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창궐하는 바알에 대해서 대단히 예민하게 대응한다. 성경의 자료를 토대로, 바알 숭배의 토착화는 크게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모세 오경 등 비교적 오래된 자료이다. 일찍이 바알은 이집트 탈출의 의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들의 상징이었다. 이른바 ‘반(反)탈출 이데올로기’는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근본적인 목표와 백성의 간절한 희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자 모세의 지도력을 거스르는 것이다(탈출 16,3; 민수 16,13 등). 바알은 탈출의 하느님에 정면으로 맞서는 존재였다.

 

그런데 나라를 분단시키고 북왕국을 세운 예로보암은 신생 국가의 정통성과 대중성을 위해 바알을 이용했다. 그는 이 매혹적인 신을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이라고 선전했다(1열왕 12,28). ‘반(反)탈출의 상징’이 어느 날 ‘탈출의 상징’으로 둔갑한 것이다. 하느님의 자리에 슬쩍 바알을 끼운 것이요, 하느님과 바알을 섞어 버린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예로보암의 죄’를 더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바알 토착화의 절정이다. 아합은 아예 주님 신앙과 바알 숭배의 두 축으로 나라를 운영하려는 ‘이원적(dualistic) 종교 정책’을 시도했다. 고대의 전쟁 신으로서 왕국의 정체성을 위해서는 주님이, 다신교 세계의 현실적 흐름과 경제와 교역을 위해서는 바알이 필요했다. 왕권 세력은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위한 묘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주님을 기능화(functionalisation)시킨 것이다.

 

아합과 이제벨은 왕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양대 종교 세력이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라고 주문했다. 이제 바알은 이스라엘의 발전과 풍요를 위해 꼭 필요한 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자 역전이 일어났다. 바알 숭배를 비판하는 세력, 주님의 예언자가 임금을 거스르는 저항 세력이 된 것이다.

 


오직 주님만 섬겨라

 

엘리야는 이원적 종교 정책의 문제점을 정확히 보고 최초의 반기를 든 인물이자 저항 예언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아합 주위의 왕권 세력은 ‘주님과 함께 바알을 섬기자.’는 현실적이고 화합하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엘리야 예언자는 ‘오직 주님만 섬겨라.’는 배타적인 ‘유일 섬김’(monolatry)을 주장했다. 왕권 세력은 왕국 운영의 ‘현실’을 내세우며, 부족하지만 절반만이라도 주님 신앙을 지켜 주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주장했을지 모른다.

 

이에 맞서 엘리야는, 주님은 하느님 백성의 절반으로 절대 축소될 수 없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하느님은 전부였고, 하느님 백성에게 하느님은 전부인 존재여야 했다. 엘리야에게 ‘반(半)주님’은 ‘반(反)주님’과 같은 말이었다.

 

엘리야, 엘리사, 미카, 아모스, 예레미야, 이사야 등의 예언자는 물론이고 신명기계 신학자들도 모두 바알 숭배를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강한 공통점을 보인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유일하시고 특권적인 분이시요, 그분만을 섬기는 것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은 이스라엘 신학의 가장 귀한 유산이다.

 

일부 임금과 사제와 예언자가 바알 숭배에 빠지자 큰 문제가 생겼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올바른 주님 신앙이고 어디까지가 바알 숭배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일부 사회 지도층은 아예 주님을 바알처럼 생각하고 믿었다. 이른바 ‘주님의 바알화’(Baalisation)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호세아는 이 점을 정확히 꿰뚫은 선각자였다. 그는 성(性)이 개인적 쾌락과 생산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종교를 꿰뚫는 키워드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이야말로 참사랑과 참풍요의 주님이시라는 점을 설파했다. 

 


바알의 후배 유혹자 사탄과 오늘날의 바알

 

이처럼 바알은 매혹적이고 강력했다. 그 이유는 ‘힘과 돈과 성의 유혹’이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스며있는 본성을 일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바알은 유배 이후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유배 이후에 하느님의 적대자를 대표하는 위치는 사탄이 물려받는 것 같다. 그런데 욥기 등에서 사탄이 본디 ‘유혹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바알의 강력한 그림자를 볼 수 있다.

 

필자는 바알을 연구하며 새삼스레 느낀 점이 있다. 왜 하필 예수님께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하셨는지 말이다. 주님의 기도에도 마찬가지로 바알 극복의 역사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구약 성경은 인간적 한계를 넘어 하느님을 향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도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책이다. 바알에 무릎 꿇은 역사를 보면 인간의 민낯이 드러난다. 하지만 바알을 넘는 모습에서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

 

오늘날 우리는 물신과 왜곡된 성 문화가 넘치는 세상에 산다. 하느님 백성은 권력과 돈이라는 유혹에 힘없이 노출되어 있다. 이런 현대 세계를 사는 하느님 백성의 처지는 힘과 돈과 성의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던 일부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방문하시어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사는 한국 교회’를 언급하셨다. ‘세상에 도전받는 신앙’은 오늘날 무엇일까?

 

바알 숭배를 극복하는 몫은 주로 예언자들이 맡았다. 안일한 종교 생활을 질타하고, 자기만족적인 제의 등을 강하게 비판했던 예언자의 외침은 오늘날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내년에는 예언자의 모습을 돌아보며, 다시 독자들을 찾아뵙게 될 것 같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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