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53) 예루살렘아!(루카 13,31-35)
회개와 구원 거부한 이스라엘… 우리의 자화상 아닐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들르는 마을과 고을마다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또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표징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헤로데가 죽이려고 하니 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십니다.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13,31-33)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헤로데가 죽이려고 하니 몸을 피하라고 일러줍니다.(13,31)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 당시에 유다 지방을 포함해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스린 헤로데 대왕의 아들 중 한 명인 헤로데 안티파스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당시에는 갈릴래아 호수를 끼고 있는 갈릴래아 지방과 사해 북부 요르단강 동쪽 페래아(베로이아라고도 함) 지방을 영주였습니다. 요한 세례자를 체포해 감옥에 넣고 처형한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예수님께 전한 이들은 사리사이들이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라시아들을 위선자라고 질타하식도 하지만 또한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이시는 등 함께 어울리시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을 깎아 내리는 듯한 예수님이 한편으로는 점점 더 밉고 싫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존경의 감정 그리고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늘 교차하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이 바리사이들도 혹시 그렇지 않았을까요? 헤로데는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헤로데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비범함을, 또 제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른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을 따라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에는 헤로데의 관할 지역이 상당히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헤로데로서는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하는 걱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헤로데는 요한 세례자를 체포해 놓고도 그의 말을 즐겨 들었을 뿐 아니라 요한 세례자를 죽인 후에도 마음에 걸려 했다고 복음서들은 전하지요.(마태 14,1-12; 마르 6,14-29참조) 그렇다면 헤로데는 정말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다기보다 예수님이 말썽 없이 영토 밖으로 나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말을 일부러 흘렸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추측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이고 싶어도 그를 예언자로 여긴 군중이 두려워 한동안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마태 14,5)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결연한 뜻을 밝히십니다. 여우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힘은 없지만 간특함의 표본입니다. 헤로데에게 적절한 표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 권력을 지닌 지역 영주를 거리낌 없이 ‘여우’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13,32-33) 헤로데가 당신의 목숨을 앗으려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당신의 일을 하시겠다는 뜻을 단호하게 표명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는 일, 곧 사람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시지만 그 끝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에서부터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죽음을 바리사이들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밝히시면서 그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죽음을 예언자들의 죽음에 비기십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한탄(13,34-45) 예수님께서는 이어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십니다. 이 한탄은 두 부분으로 이뤄집니다. 앞부분 34절은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뒷부분 곧 35절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에 가깝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13,34)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이 표상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예언자들을 죽인 일들을 지적하면서, 당신 또한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모으듯이 이스라엘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거부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계십니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13,35) 이 대목은 예루살렘이, 곧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거부하고, 마지막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를 예언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 집’이 예루살렘 성전 또는 유다인들의 거처 곧 이스라엘 땅 자체를 가리킨다고 할 때,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망하고 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13,35)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일말의 위안과 희망을 갖게 해줍니다. 지금은 비록 예수님을 거부해 멸망을 자초했지만 다시 회개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고 고백한다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시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헤로데가 죽이려고 하니 몸을 피하는 바리사이들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오늘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해줍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언직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일이 꼭 거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 뜻에 좀더 합당하도록 노력한다면 그것 또한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변의 유혹에 넘어가 우리의 예언직을 저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 자신을 성찰합시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되새기며 우리 삶의 길잡이로 삼읍시다. 혹시 유혹에 빠져 넘어지더라도 끝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고 노래할 수 있도록 다시 일어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3월 4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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