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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이사야서 -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준 제3이사야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093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이사야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준 제3이사야서

 

 

탈무드에 따르면,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열 개 분량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려 주셨는데 그중의 아홉은 예루살렘의 몫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저 하나의 평범한 도성일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혼이 그곳에 거하시는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도성,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도성입니다.

 

 

키루스 칙령, 유배민들의 귀환

 

비잔틴 시대에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 골짜기와 티로페온 골짜기 하단 고원 지대를 ‘시온 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시온 산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성전이 자리 잡은 예루살렘을 총괄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심점이었기에 유배를 마치고 귀환한 유다인들은 성전과 성벽의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제3이사야서는 이렇게 유배 이후 팔레스티나에 형성된 공동체와 관련됩니다. 예루살렘 도성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약속의 성취에 초점을 맞춥니다.

 

페르시아의 황제 키루스는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인 538년 유다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는 ‘키루스 칙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제3이사야서의 시대적 배경은 유다인들이 유배에서 풀려나 팔레스티나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페르시아 시대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2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귀환 길이 열렸으나 모든 유배민이 고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유배 생활이 어렵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 유배 2세대가 주류를 이루게 되자 유배지의 삶이 오히려 친근하고 익숙해져 모든 사람이 귀환을 열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어 면에서도 그렇고 경제 면에서도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야가 팔레스티나 땅보다 살기가 더 수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귀환한 유다인 대부분은 야훼 신앙에 열성을 가진 사람이거나 페르시아의 관료로 파견된 이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합니다.

 

키루스 칙령이 포고된 직후인 기원전 538년에 세스바차르의 인도 아래 소수의 유다인이 귀환합니다. 그 뒤 기원전 520년경에 즈루빠벨의 지도하에 귀환합니다. 즈루빠벨은 키루스 임금의 후계자인 캄비세스(기원전 530-522년)가 유다 총독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즈루빠벨과 귀환한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대로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페르시아는 이집트의 공격에 대비할 최전선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임금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선포합니다. 총독인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가 온 힘을 다하여 애쓴 결과 기원전 515년 성전 재건이 이뤄집니다. 기원전 445년에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군사 및 다른 유다인 관리들과 함께 파견됩니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예배를 개혁하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주변의 반대와 방해를 무릅쓰고 단기간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 궁정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에즈라가 5천 명 정도의 유다인과 함께 기원전 458년과 398년 사이에 귀환합니다. 이처럼 귀환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인도자가 바뀌면서 네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습니다.

 

열정적인 야훼 신앙을 가진 귀환자들이 돌아왔을 때 팔레스티나에는 유배의 공백을 메우며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다 땅에 이미 자리 잡고 살던 사람들은 귀환자들이 돌아와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이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 같아 보여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귀환자들은 그들이 올바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경시하였습니다. 따라서 귀환자들과 그곳에 살던 현지인들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2이사야서가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이야기인 반면, 제3이사야서는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갈등하고 분열하는 상황에서 좌절과 실망에 빠진 유배 이후의 공동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제3이사야서는 귀환 후 겪는 갈등과 투쟁을 반영하듯 빛과 어둠, 축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 등 상반되는 두 이미지를 대비시킵니다. 고국으로 귀환했으나 공동체의 첨예한 대립으로 암담하기만 한 현실에서 예언자는 오히려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가 제시한 이 희망의 원천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은 하느님의 권능이 마침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리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새로운 공동체(56-59장)

 

제3이사야서의 서두를 여는 56,1-8은 뒤에 나오는 66,15-24과 짝을 이루며 새롭게 형성될 공동체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야곱의 후손으로 제한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는 만민에게 열어 놓습니다. 56장이 “정의를 실천하여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도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은 그에 맞춰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합당하게 살아갈 다른 예로 ‘참된 단식’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자유를 잃은 이에게 자유를 찾아 주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58,6-7 참조). 이는 예배와 의식儀式이 진실한 마음을 담은 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듯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에 속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시온) 재건을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암시하는 것으로 유배 이후 공동체의 성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예배의 기회마저 주지 않던 이방인과 고자를 구체적으로 예로 들며, 새 시대에는 거룩한 백성에 속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하느님께 와서 순종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혁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제 새롭게 형성할 공동체는 ‘선민(選民)’이라는 특권 의식에 젖었던 과거의 폐쇄된 집단이 아니라 만민을 위해 열린 공동체입니다. 이로써 이방인이라도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보여 줍니다.

 

 

일어나 비추어라(60-62장)

 

62장에서는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나타나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넘어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은 여러 차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래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불립니다. 60,1-3에서는 이러한 고도(古都) 예루살렘이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여 만국의 빛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형성하기 위해 회개가 꼭 필요하기에 조건 없이 은혜를 선포한 제2이사야서와 달리 제3이사야서는 회개를 강조합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이루는 새로운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여기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예루살렘의 머리 위에 주님의 영광의 빛이 떠올랐으니 그 빛을 받아 일어나 비추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려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국의 빛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제2이사야서에서 보여 준 주님의 종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새 예루살렘(63-66장)

 

제2이사야서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해 예언한 것과 마찬가지로(43,14-21; 45,7.12.18; 48,6 참조), 제3이사야서도 새 창조를 강조하여 “새 하늘과 새 땅”(65,17)이라고 표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끝 날’을 암시하지만(묵시 21,1 참조), 제3이사야서에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혀 기대할 수 없던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새로운 시대를 가리킵니다.

 

65장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한 예로 ‘이상적인 왕이 통치하는 아름다운 세계’, ‘메시아가 통치하는 평화로운 시대의 이미지’(11장 참조)를 활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묘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창조와 연결합니다.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살아간다는 예언(65,25 참조)은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사야는 하느님의 창조 능력으로 강자와 약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이렇게 상생(相生)하는 새로운 하늘과 땅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민족을 가르는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이 내 앞에 경배하러 오리라”(66,23)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창조주를 믿는 모든 이가 하느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보여 줍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계신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며 마음의 심연에 평화가 강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 황미숙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으로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에서 소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황미숙 마리루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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