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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호세 11,8)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209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호세 11,8)

 

 

성경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자기들이 겪는 일이 먼 훗날 어떤 의미를 지닐지 모른 채 하느님께서 주시는 몫대로 살아갈 뿐이니까요.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호세아서를 읽으면 하느님께서 불쌍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11장을 읽으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유다를 재판하시어”(호세 12,3)

 

호세아서에는 고발이 세 차례 나옵니다. 2,4에서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하고, 4,1에서 “주님께서 이 땅의 주민들을 고소하신다”고 하며, 12,3에서 “주님께서 유다를 재판하시어…”라고 합니다. ‘고발하다, 고소하다, 재판하다’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모두 ‘리브(rib)’입니다. 이러한 고발을 시발점으로 호세 1-3장과 4-11장, 12-14장은 각각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법정 논쟁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3장을 호세아의 혼인에 관한 부분으로 치면, 4장 이후의 두 부분은 우선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 다음 마지막에 구원을 선포합니다. 4,1-11,7이 심판 선고이면 11,8-11은 구원 선포이고, 12,1-14,1이 심판 선고이면 14,2-9은 구원 선포가 됩니다. ‘심판-구원, 심판-구원’, 이러한 도식이 두 번 반복되는 셈이지요.

 

1-3장에서도 세 번에 걸쳐 불충한 아내를 고발하고 마지막에 그 관계를 회복시키지만, 그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아모스서의 경우 구원 선포가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점이 거의 명백하지만, 호세아서의 경우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호세아의 혼인이라는 사건부터 심판뿐 아니라 심판 후에 있게 될 관계 회복까지 예고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단락을 본문에서 떼어 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개와 새로운 삶을 그린 14,2-9은 거의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봅니다.

 

 

“부를수록 … 멀어져 갔다”(호세 11,2)

 

호세 11장은 1-3장과 병행합니다. 1-3장이 배반당한 남편의 한결같은 사랑을 말한다면, 11장은 아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변치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나의 … 아들”(호세 11,1), 어린아이라 부르십니다. 그 아이가 사랑스러워 이집트에서 불러냈다고 하십니다. 이집트 탈출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호세 11,2)고 하십니다. 호세아서에서 가장 마음 아픈 부분입니다. 간절히 불러도 외면하고 오히려 멀어져 가기만 하는 아들. 자식을 ‘웬수’라고 하지요.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이라면 절교라도 할 수 있으련만 아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싫어서 멀어져 가기만 하는 아들도 끝까지 아들입니다.

 

호세 11,3-4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린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고, 볼을 비비고 음식을 떠먹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배반하려 하고, 그 결과로 멸망을 맞게 될 것입니다(호세 11,5 참조). 이렇게 이스라엘이 자기 죄 때문에 멸망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호세 11,8) 이스라엘을 내버리지 못하십니다. 자녀를 내칠 수 없는 부모의 정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호세 11,8)

 

지금까지 호세아서에 여러 차례 나타난 바와 같이, 심판에서 구원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호세 11,9). 그래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인간에게는 너무 어리석게 보이는 태도를 취하십니다. 끝없이 배반하는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노를 거두고 다시 이스라엘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하느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손을 계속 뿌리치려 해도 하느님께서는 꼭 붙든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참 어리석은 이 사랑이 이스라엘을 주님께 돌아오게 합니다(호세 11,10-11 참조). 이스라엘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이기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호세아서에서 마지막으로 구원을 선포하는 14,2-9은 후대에 덧붙여진 본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느 학기에 제가 호세 14장을 배우고 싶어 호세아서 과목을 수강 신청했습니다. 마지막 시간, 신부님은 “14장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책을 덮으셨습니다. 앗! 그러시면 안 되지요. 어떤 본문이 후대에 첨가되었다 해도 그것은 성경 본문입니다. 설령 역사적 인물인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선포했을 뿐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편집 과정으로 형성된 ‘호세아서’라는 책은 미래의 구원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더구나 호세 1-3장에 들어 있는 호세아의 혼인은, 호세아의 근본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죄를 끌어안는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본문을 보면 14,1까지는 명백한 심판 선고입니다. “임신한 여자들은 배가 갈리리라”가 14,1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14,2에서는 아모스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반전이 이뤄집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3절 이하의 기도를 읽을 때에는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라고 이스라엘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바쳐야 할 회개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시리아와 군마와 우상(호세 14,4 참조), 곧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즉시 “나의 분노가 풀렸다”고 선언하십니다(호세 14,5 참조). 호세아서 앞부분에서 고메르가 마음을 바로잡아 호세아에게 돌아오지 않고 호세아가 집 떠나간 고메르를 찾아 왔듯, 이스라엘이 먼저 돌아오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으로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해 주시기에 이스라엘이 회개합니다. 예레미야나 에제키엘이 말하는 “새 마음”, “살로된 마음”이 떠오르지요. 마음을 돌려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회개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라고 말하지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이스라엘을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호세 14,9)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호세 14,6)

 

자신의 죄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체험. 더 이상 나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내세울 수 없는 처지. 이스라엘은 그 비참함을 겪으면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정말 하느님께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한순간도 내 손을 놓지 않았음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당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내 손을 붙잡고 계셨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은 멸망을 겪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호세 14,4)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메마른 땅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이슬이 되어 주실 때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납니다(호세 14,6 참조).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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