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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60,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8,445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60,1)

 

 

언젠가 한 학생이 박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주제는 이사야 예언서 제2부와 시편의 일부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교 사명이었습니다. 내용은,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기억은 안 납니다. 그런데 심사를 하시던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유배를 갔을 때, 바빌론 사람들이 개종을 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쩌면 그 질문이 핵심을 찌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의 선교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달에는 특히 이사야 예언서 제3부에서 예루살렘이 다른 민족들을 향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다른 민족들에 대한 사명은 이사야 예언서 제2부,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49,6).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노래에서는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49,3)라고 하니, 이 본문에서 종은 충실한 이스라엘이라고 해 둡시다. 그렇다면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세상의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 어떤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민족들이 쳐다볼 만한 업적을 이루어 열심히 빛을 발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종이 그렇게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자신이 쓸데없이 고생만 했다고 생각했고(49,4), 모욕과 수모를 당했으며(50,6), 죽임을 당해 묻히기까지 했습니다(53,8-9). 그런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그의 사명이 민족들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종이 열심히 선교 사업을 해서 바빌론 사람들을 개종시켰을까요? 그건 아닌 듯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 머물면서 힌트가 없는지 되짚어 봅니다. 어쩌면, “나의 구원”(49,6)이라는 말이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종은 “심한 멸시를 받는 이, 민족들에게 경멸을 받는 이, 지배자들의 종이 된 이”(49,7)입니다. 그런데도 임금들이 일어서고 제후들이 엎드리는 것은 “신실한 주, 너를 선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때문”(49,7)입니다.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하시기 때문에 임금들이 경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60,1)

 

이사야 예언서 제3부(56-66장) 중에서, 60-62장은 더 이른 시기에 형성된 부분이라고 봅니다. 여기서는 귀향 후의 예루살렘을 묘사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60장과 62장입니다.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에게, 앞서 주님의 종에게 했던 말과 유사한 말을 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60,1). 이 말을 듣는 예루살렘의 처지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의 상황과 같았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완전히 멸망했던 그 땅에, 유배 갔던 이들이 돌아옵니다. 구원의 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은 아니었습니다. 폐허, 빈곤, 분열, 침략을 비롯한 어려움은 계속 있었습니다.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다는 대수롭지 않은 작은 변두리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짓고 도성을 쌓았다 해도, 대단한 힘을 가지고 페르시아에 맞서 일어날 만한 세력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어떻게 일어나서 다른 민족들을 비출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에서도, 앞서 나왔던 “나의 구원”(49,6)과 비슷한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 올랐다”(60,1).

 

‘너의 빛’은 예루살렘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는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은 예루살렘에게 ‘옵니다.’ 예루살렘은 그 빛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위에 떠오르는 그 빛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온 세상이 어두울 때에도 예루살렘 위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비칩니다(60,2). 어두운 무대 위에 많은 사람이 올라가 있을 때, 한 점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 눈에 보이겠지요. 그것은 그 사람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이 그 사람만을 비추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 빛이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들고 세상의 모든 민족도 모여듭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60,9).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보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 예루살렘을 비추시는 하느님입니다. 예루살렘은 해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달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춥니다. 예루살렘이 빛나는 것은 순전히 주님 덕분입니다(60,9).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60,19).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시어”(62,7)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주님은 예루살렘에게 무엇을 해 주시는 것일까요? 62장에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실 때까지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62,1). 그리고 이 장에서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러 가지 새로운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소박맞은 여인’,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불리던 예루살렘은 ‘내 마음에 드는 여인, 혼인한 여인’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고(62,4), ‘그리워 찾는 도성’, ‘버림받지 않은 도성’이라 불리며 그 주민들은 ‘거룩한 백성, 주님의 구원을 받은 이들’이라 불리게 됩니다(62,12).

 

소박을 맞고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유배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7,23)라는 말로 요약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은, 이스라엘의 불충실로 인하여 깨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예언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62,1), 다른 이들에게도 쉬지 말고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라고 말합니다(62,6).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시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62,7). 그리고 하느님은 그 예루살렘을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부르시며 그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십니다(62,4). 이렇게 깨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일으켜 주실 때, 다른 민족들은 거기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봅니다.

 

답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열심히 말을 하면 그들이 들을까요? 바빌론이, 페르시아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까요?

 

이사야서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해야 할 일은 업적을 세우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께 구원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시라는 것을(60,16) 어떻게 증언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손에 구원됨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사명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서 주님의 종이 지녔던 역할과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자신은 멸망과 파괴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철저한 무력함 속에서 하느님께 구원되었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충실하심과 그분의 능력을 온 세상 앞에서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을 세우시고

당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에 몸을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으시리라.

오는 세대를 위하여 이것이 글로 쓰여

다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시편 102,17-19).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구약 종주》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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