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어느 오후,어떤 사건 인류 역사상 가족 관계를 깨뜨린 최초의 사람은 형제를 살인한 카인입니다.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피해야 할 전형적인 모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1요한 3,12-15) 카인이라는 이름은 ‘획득한 자’, ‘얻은 자’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이것은 하와가 카인을 낳고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하와는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지만 왜 그런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 또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를 돌아보면 ‘아벨’은 ‘허무’, ‘수증기’, ‘공기’, ‘숨’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를 낳은 후 그에 대한 하와의 논평이 없는 것은 이름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비물질적이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이 이름은 그의 삶이 불길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카인과 아벨을 소개하며 아울러 그들의 직업을 알려줍니다. 카인은 농부요 아벨은 양치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 해 동안 각자의 노동에서 수확한 것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농부였던 카인은 곡식 제물을, 양치기였던 아벨은 양들을 제물로 봉헌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시고 카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두 사람의 제물에 담긴 정성에서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제물을 바친 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 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3-4) 성경은 아벨이 바친 제물이 그 해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카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그저 ‘땅의 소출’ 중 일부라고만 말합니다. 카인이 바친 곡식 제물이 ‘첫 곡물’이라든지, ‘햇곡식’이라는 식의 표현은 그 어디에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카인이 준비한 곡식 제물은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 것은 제물 자체뿐만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당사자의 정성과 마음 역시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독일에 살고 있을 때 종교적 행위에 앞서 참여자의 정성과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휴일, 산책을 나섰습니다. 다른 날과 달리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당 문이 열려 있었고 불도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하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에서는 첫 영성체를 준비하는 15명 남짓한 아이들이 신부님과 함께 성체성사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대 위에는 예쁜 바구니에 빵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갓 구워낸 빵에서 풍기는 냄새가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빵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미사를 잘 봉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제 생각들을 말하려고 조약돌 같은 손을 앞다투어 높이 들었습니다. “꽃이 필요해요.”, “초가 필요해 요.”, “빵과 포도주, 성경도 필요해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소녀가 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래. 막달레나, 한번 말해보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음… 미사를 잘 봉헌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가 고파야 해요.” 막달레나의 대답이 제 마음속을 사정없이 파고 들었습니다. 미사를 잘 봉헌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첫 준비가 “예수님을 향한 배고픔, 목마름”이라는 것을 작은 아이의 입을 통해 듣자 부끄러움이 온몸으로 확 번졌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보다는 때때로 이미 다른 것으로 배가 부른 채 미사에 참례하기도 했었기에 한 소녀의 말에 한없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카인의 죄는 분명 ‘명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핏 종교적 행위를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성과 감사가 결여된 그저 해야 해서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배고픔과 목마름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저 명목적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물은 언제나 정성과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한 예배자 자신이라는 것을 카인과 아벨 이야기가, 그리고 그날의 소녀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두 가지 책임을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을 돌보는 책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책임이 그러합니다. 이 두 가지 책임의 핵심은 ‘돌보는 것’, 즉 땅을 돌보고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아담이 땅을 가꾸고 카인은 아우를 돌보고 지켜야 하는 일에 대해 말하면서 '돌보다’,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샤마르'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아담은 땅을, 카인은 아우를 돌보고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시작되었던 가족 연대의 분열은 불과 한 세대만에 형제 살인이라는 불행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벨이 성경에서 처음 소개될 때, 그리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카인의 동생으로, 카의 형제로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카인의 이름은 성경 본문에 13회 언급되고 있습니다. 13은 불안전한 숫자입니다. 불완전한 카인이 완전하고 충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생 아벨을 품을 때 자기 아우와 하나가 될 때임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가 없는 카인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인간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던지신 질문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완전하고 충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의 이웃을 품는 사람이 되라는 간절한 호소인 것입니다. [월간빛, 2021년 5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룻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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