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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이 전해 주는 따뜻한 이야기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07 조회수3,521 추천수0

[구역반장 월례연수] 요한이 전해 주는 따뜻한 이야기들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이라고 불리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일생을 전기식으로 전달했다면, 요한 복음은 사도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신학적 성찰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요한 복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서가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체험이 담긴 사랑의 복음서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요한 복음서의 집필 시기와 환경

 

먼저 요한 복음은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작성된 복음서입니다. 학자들은 대략 90~1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명백하게 갈라서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은 기원후 70년경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나자렛 이단 세력(그리스도교)과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자신들이 매일 바치는 18개의 기도문(Shemoneh Esreh)에 ‘나자렛 도당들과 이단자들을 즉각 사라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을 넣었고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9,22)라며 그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 복음 사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감추고 함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분이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인가 갖지 않을 것인가를 힘주어 묻고 있습니다.

 

두 번째 환경적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요한 복음은 에페소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에페소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과 문화의 요충지이며, 특히 그리스 문화가 많이 발달된 지역입니다. 또한 영지주의 사상이 꽃을 피웠던 곳인데, 영지주의란 ‘지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그노시스(γνῶσις, gnosis)에서 유래한 사상입니다. 영지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세상을 이원론적 세계관, 즉 물질 세계와 영의 세계로 구분하는 가운데 지식의 열망만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요한 복음서에 나타나는,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선한 세상과 악한 세상’ 등의 대비되는 표현들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내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1)

 

 

2. 집필 목적과 메시지(마지막 2개의 결문)

 

요한 복음서의 끝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저자가 과연 누구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문이 두개이기 때문입니다(20,30-31; 21,24-25 참조). 첫 번째 결문인 20장 30-31절을 보면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고, 두 번째 결문인 21장 24-25절을 보면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21,24)라고 말하면서 증언의 참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의 글에 결문이 두 개라는 것은 적어도 2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책을 작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현재 학자들은 첫 번째 결문은 사도 요한의 것이며, 두 번째 결문은 최종편집자인 요한계 학파의 결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결문의 작성자인 요한계 학파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취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자신이 하느님으로서 세상 창조에 함께 하셨으며, 세상에 아버지 하느님을 계시하시고 어둠에 빛을, 오류에 진리를 가져오신 하느님의 말씀이자 아들이신 분임을 전해 주고 이를 믿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적들의 의미를 전달해 주는 데 초점을 맞췄던 것입니다.

 

공관 복음에서 기적이라는 용어에 사용되던 두나미스(δύναμις, dunamis)라는 용어는 요한 복음에서 표징이라는 뜻을 지닌 세메이온(σημεῖον, semeion)이라는 단어로 바뀝니다. 이를 통해서 요한 복음은 기적 이면에 담긴 의미를 전달해 주고자 합니다.2)

 

이때 요한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신 상징과 일으키신 표징을 처음에는 청중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와 몰이해는 예수님이 상징과 표징의 의미를 더 깊게, 더 길게 설명하시는 계기가 됩니다(2,20; 3,4; 4,11; 6,25; 8,33; 11,11~12; 14,5.8 참조).

 

 

3.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복음서

 

요한 복음서를 읽다가 보면, ‘나는 생명의 빵이다.’(6,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착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라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나는 ~이다,’라는 표현들은 예수님의 신원과 깊은 연관이 있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는 하느님의 이름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표현들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신원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신앙의 길을 갈 것인지 가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 복음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보다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삶을 말하는 것이며, 관계적 의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이며, 하느님을 통해 주어질 영적인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며, 그분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분을 참 주님으로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4. 사랑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

 

갓난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엄마와 아빠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경탄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런 엄마와 아빠의 사랑 속에서 첫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인간의 창조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라고 말씀하시면서 경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사랑의 첫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종종 부모님의 큰 사랑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인간도 하느님 창조의 첫 순간을 알지 못하기에 그 안에 담긴 커다란 사랑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렇지만 분명 사랑은 있었으며, 그 사랑으로 생명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그 사랑을 제자들을 통해 다시 드러내십니다. 요한 복음의 최후의 만찬은 공관 복음의 최후의 만찬과는 달리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행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행적의 의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라고 말씀하시면서 알려주신 예수님의 새 계명과 연결될 때 명확해집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신체 중 가장 더러운 부분을 만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종이 주인에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십니다. 이는 부모가 어린아이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의 더러운 부분을 만지고 닦아 줄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사랑 때문입니다. 창조 때부터 있었던, 하지만 잊혀진 사랑이 인간에게 다시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랑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나 자신을 낮추는 희생의 사랑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요한 복음에서 나타나는 희생의 십자가에는 두려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사랑을 드러내는 선포의 길이 됩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14,31)

 

결국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고, 그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태초부터 사랑이 있었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있으며,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간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 복음서를 두 단어로 정리해 보라고 한다면 ‘생명’과 ‘사랑’을 뽑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생명 안에 있는 사랑을 드러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생명과 사랑은 각각이 아니라 생명 안에 사랑이 있고, 사랑은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예수님도 하나이시고, 그분들이 진정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심오한 듯 느껴지지만 생명이 넘치는 우리 주변을 관찰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심오한 부분은 요한 복음 안에서 아직도 넘쳐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심오함은 언제나 예수님의 신성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하나 되는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성체성사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6,56)

 

1) 참조 : 정태현, 『요한 복음-거룩한 도서를 위한 신약성경 주해』, 바오로딸 출판사, 25쪽. / 박태식, 『복음서와 서간』, 생활성서사, 159~164쪽.

 

2) δύναμις - 능력, 놀라운 일, 유능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σημεῖον-지시, 신호, 표시, 상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PQ_fM7eWGKA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1년 6월호, 김덕재 신부(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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