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예수님은 모든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셨다는데 이들에겐 왜 예외인가요?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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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5-06-02 | 조회수1,386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마르코4장12절 " 너희에게는 하느님의 나라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 간다 12절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 와 용서받는 일이없게 하려는 것이다."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이 말씀을 이해하시려면 먼저 이사야 예언서 6,9-10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으셔야 좀 쉽게 다가오실 수 있으십니다.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 예언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예언자 는 높이 솟아오르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고, 주님께서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하시는 말씀을 듣고 용감하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응답 합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9-10)
이 말씀은 반어법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네가 그렇게 용감하고 자신 있게 가겠다고 말하느냐?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나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이 즉시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아시고, 다른 예언서들 에서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보시면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등을 돌렸으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이전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보내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을 금강석처럼 굳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만군의 주님에게서 커다란 분노가 내렸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 하셨다. '내가 부를 때에 그들이 듣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부를 때에 나도 듣지 않겠다."(즈카 7,11-13)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 그대로 이사야 예언자가 나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나 이스라엘 백성은 똑같이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등을 돌릴 것이며,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을 것이며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예수님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라고 가르쳐 주나 그 당시의 사람들이 마치 이사야 예언자 시대 에 그러했던 것과 똑같이 자신들의 마음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하여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치 ... "어리석고 지각없는 백성아 제발 이 말을 들어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구나. 너희느 나를 경외하지도 않고 내 앞에서 떨지도 않는단 말이야?"(예레 5,21-2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에제 12,2)
이와 같이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들 스스로 거부할 것임을 아주 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반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의 마음이 굳어 있는지 그것이 이미 하느님께서 구원을 주시지 않으시려고 정해져 있는 것처럼 그만큼이나 그들의 마음이 아주 강한 금강석처럼 단단해져서 말씀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금강석처럼 마음이 단단하게 굳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에 이르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들의 마음이, 영적인 상태가 하느님께서 미리 구원을 주지 않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처럼 조금도 예수님을 향해 돌아설 어떤 작은 희망도 틈도 없을만큼 굳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보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200주년 기념 주해서 부분 발췌 12절은 이사 6,9-10 인용문인데, 히브리어 원문이나 그리스어 칠십인역을 따르지 않고 예수시대 이스라엘 상용어인 아람어역을 그리스어로 중역한 것이다. 비신도들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이라 한다.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묵시문학계에서는 예정설이 성행했 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어느 신도가 비신도들의 불신현상을 예정설로 설명했을 것이다. 위의 여러 논거로 11-12절의 단어는 유다계 그리스도 교회에서 만들어 전한 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했더니 그것을 받아들여서 신도가 되는 사람들과 물리쳐서 비신도로 남는 사람들로 양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이 현상을 묵시 문학적 예정설로 설명했다. 말하자면 신앙와 불신의 현상을 철두철미 신론적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인간론적 관점을 일체 고려하지 않은 극기 일방적인 해설이다. - 발췌 끝 -
주석성경 일부 발췌 이 인용구는 이사 6,9-10을, 예수님 당시에 쓰이던 구약성경의 아람 말 번역본인 타루굼에서 그리스 말로 옮긴 것이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예언자의 설교가 실패하리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백성은 고 집스럽게 예언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그 죄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전교가 유다인들 사이에서 실패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 본문을 사용한다. 유다인들의 완고함이 이미 예언자들에게서 예고되었고,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한 12,39-41; 사도 28,26-28). 예수님께서도 이 같은 완고함에 부딪혀 실패를 체험하셔 야만 했다. 그러나 예언서의 구절이 여기에서 인용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세지를 감추시고 "바깥 사람들"의 회개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의 실패가 성경이나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과 일치한다는 점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계획의 최종적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로마 11,7-16.29-32 참조). 그렇다고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생각이 인간의 책임성을 결코 약화시키지는 않는다(24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두 전제 아래 당신의 실패를 이해하셨을 것이다.
마르코는 이러한 숙고를,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된 상황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이해하 기 어려워진 비유들에 적용한다. 비유들은 그것들이 전제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따라서 이해되 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서 먼저 제자들에게, 그 다음에는 교회 공동체에 제시되는 것 이다. - 발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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