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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태오 복음서 18장 해설-----송영진 모세 신부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10 조회수1,452 추천수0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태오 복음서 18장>


 


18장


 


<1절-5절 :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1절..<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그때에'는 '어느 날'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


    었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뭔가 특별한 질문을 하려고 예수님께 다가왔음을 암시합니다.


    마르코복음 9장 34절과 루카복음 9장 46절에는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나라에서


    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표현만 다


    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를


    확실하게 정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의 16장 18절-19절에서 예수님께서 베


    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이 베드로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삼으신 일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


    는 제자들의 질문 쪽에서 보면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 쪽에서 보면 어린이처럼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하느


    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현재의 그들 사이의 서열을 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절..<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예수님께서는 일


    종의 시청각 교육으로, 그리고 하나의 상징으로 어떤 어린이 하나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


    데에 세우십니다.


    '가운데에' 세우신 것은 제자들의 시선과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입니다.


 


3절..<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하늘나


    라의 주님으로서 엄숙하게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회개하여' 라는 말의 원문 단어


    는 '돌아서서'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생각을 바꾸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회개


    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고, '생각을 바꾸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어떻든 지금 예수님


    말씀의 뜻은 제자들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를 묻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


    십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변화되어야 하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경쟁하지 말고 가장 낮은 사람이 되기 위해 경


    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뀌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변화'이고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장 낮은 사람, 가장 겸손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은 어린이처럼 변화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4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다.>--앞의 3절에서는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를 묻지 말고 먼저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


    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4절에서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치십니다. 3절에서 어린이처럼 변화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 하늘나라에는 어린이처럼 변화된 사람들만 있을 것입니다. 그런


    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낮춘 사람이라는 것이 예


    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높은 사


    람이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서 경쟁하지 말고 더 낮


    아지기 위해서 경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어린이처럼'이라는 말은 '이런 어린이처


    럼', 또는 그냥 '어린이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린이'는 지금 제자들 가운데에 서 있


    는 바로 그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 사용된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의 3절에서 말한 '하늘나라'는 우리가 언젠가는 들어가야 할 하느님 나라를


    뜻했는데, 4절에서는 그 하느님 나라와 지금의 교회를 모두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


    래서 하느님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지상의 교회에서도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


    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란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5절..<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 라는 말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5절은 앞의 내용과 다른 가르침입니다.


    1절-4절은 겸손에 대한 가르침이고, 5절은 자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어린


    이 하나' 라는 말은 '어린이처럼 보잘것없고 힘없고 낮은 사람 하나라도' 라는 뜻입니다.


    당시 그곳에서는 실제로 어린이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었고 사람대접도 못 받


    았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어린이는 보잘것없고 불쌍하고 소외되어 있는 사람을 상징합


    니다. '내 이름으로' 라는 말은 '내 제자로서, 나를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이라는 말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나


    를 위해서(나를 섬기듯이) 받아들이면'이라는 뜻이고,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런 불


    쌍한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받아들이다.' 라는 말은 '섬기다.' 라는 뜻


    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에게 예


    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은 사랑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


    은, 예수님에게 바치는 섬김과 사랑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은 25장 31절-46절의 '최후의 심판' 대목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반복되고 있습


    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


    게 해 준 것이다(25,40)."


 


<6절-9절 :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6절..<"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


    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 라는 말은 일


    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 라는 뜻이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가운데 하나'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이라는 말은 세상의 죄악 가운데


    에서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의 힘든 처지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죄짓게 하는 자'를 원문대


    로 직역하면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흔들어 놓고 유혹해


    서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 너무나도 무서워


    서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


    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 죄는 무거운 죄이고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연자매


    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서 사형시키는 방법은 로마제국의 사형 방법 중 하나였는데, 유


    대인들은 십자가형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체를 땅에 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정상적인 장례식마저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7절..<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불행하여라.'


    라는 말은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며 경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행'은 하느님의


    벌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불행을 뜻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이라는 말은 '자신들도 죄를 짓지만 남들도 죄를 짓


    게 만들고, 죄와 악에 물들어 있는 인간 세상(인간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하느


    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


    다.' 라는 말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늘


    그런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


    니다. 늘 그런 일이 생기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라는 말


    은 세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고, 각 개인에게도 하느


    님의 심판과 벌이라는 불행이 내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


    는 사람'이 받게 될 벌은 '남을 죄짓게 하는 세상'이 받게 될 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


    님께서는 각 개인에게도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8절..<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


    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손, 발'은 죄를 짓게 만드는 내부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성적인 욕망이나 육체적인 본


    능뿐만 아니라 모든 내적인 유혹, 충동, 욕망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한다는 것은 자기 내적인 욕망이나 유혹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앞의 6절-7절


    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대한 가르침이고, 8절-9절은 자기 스스로 짓는 죄에 대한 가


    르침입니다.) 손과 발을 잘라 던져 버리라는 말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손과 발을 자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라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불'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상


    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라는 번역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이 번역은 원문


    단어를 너무 기계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불구의 몸'으로 번


    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불구의 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라는 말은 죄


    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마치 장애자처럼 온갖 불편을 감수하고, 희생을 치르더라도, 또는


    그렇게 해서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


    시는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생명에 들어가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다.' 라는 뜻입니다.


 


9절..<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


    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9절은 표현만 바꾸어서


    8절의 가르침을 반복한 것입니다. '불타는 지옥'이라는 말도 8절의 '영원한 불'을 표현만


    바꾼 것입니다.


 


<10절 -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10절..<"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


    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과 신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작은 이들'은 좁은 뜻


    으로는 교회 내의 약하고 낮은 위치에 있는 신자들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보잘것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라는 말은 자기보


    다 약하고 힘없고 불쌍한 사람을 하나라도 업신여기거나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명


    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엄숙하게 명령한다는 뜻


    입니다. '그들의 천사들'이라는 말은 '그들의 수호천사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는 각각의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은 작


    은 이들을 업신여기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하느


    님입니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는 하늘에


    서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작은 이들의 수호천사들이 하느님께 언제


    든지 직접 보고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직역한 것이고,


    공동번역 성서의 '항상 모시고 있다.'는 의역한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직역을 하더라도


    '뵙고 있다.' 라고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각의 수호천사들이 하


    느님 곁에서 시중을 들면서 직접 보고를 드린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작은 이들(보잘것없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0절은, 하느님께서 귀하게(소중하게) 여기시고 보살펴 주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눈에


    는 보잘것없게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귀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11절..<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구하러 왔기 때문이다.>--일부 필사본에만 11절이


    있는데, 이 구절은 후대의 어떤 필사자가 루카복음 19장 10절을 이 자리에 옮겨 적은 것


    으로 생각되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경 본문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12절-14절 : 되찾은 양의 비유>


 


12절..<"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


    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되찾은 양의 비유'는 루카복음 15장 1절-7절에도 있는데, 루카복음에서는 죄인 하나


    라도 버려두지 않고 회개시키는 기쁨을 이야기한 것이고, 여기서는 '작은 이들' 하나라


    도(14절)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내용이


    지만 세부적으로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이들'은 죄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12절의 '길을 잃는 것'과 14절의 '잃어버리는 것'은 구별됩니다. 길을 잃은 양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 양을 아주 잃어버리는 것은 돌아올 가능성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은 이유가 자신의 잘못에 있는지, 다른 사람의 잘못 때


    문인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


    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말은 잘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양 백 마리


    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한 마리를 잃었다는 것은 재산 피해가 별로 크지 않다는 뜻


    이고, 그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것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


    는 것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두고 가는 것을 신중하


    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길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걱정과 사랑입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가 사랑을 덜 받는


    다거나 위험 속에 방치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에게 많은 사랑을 쏟아도 다른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은 아


    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들의 편애와는 다른 것입니다.


 


13절..<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


    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그가 양을 찾게 되면'이라는 말은 양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단 한 사람이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구원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


    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도 하느님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이 무슨 특권은 아닙니다. 목자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것처럼 길 잃은 양도 목자를 애타게 찾아야 합니다. 어떻든 목자는 그 양을 찾게 되면


    '굉장히' 기뻐하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라는 말은 착한 목자이신 분


    으로서 엄숙하게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는 말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


    입니다. 즉 아흔아홉 마리에 대해서는 덜 기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다면 다행인데, 그 중 한 아이가 병을 앓게 된다면


    건강한 다른 아이들보다 앓는 아이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가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병이 나아 건강해지면 원래 건강했던


    다른 아이들보다 병을 앓다가 낫게 된 아이에게서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아이들을 덜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이가 더 많은 걱정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녀들은 건강하기 때문에 부모의 기쁨이고, 병을 앓다가 건강해진


    자녀는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에 부모의 기쁨이 됩니다.


 


14절..<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의 뜻이 아니다.">--바로 이 구절이 루카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와 마태오복음의 되찾


    은 양의 비유가 차이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이란 보잘것없다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의 10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여


    기서는 작은 이들을 하나하나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라는 말은 아버지께서 바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14절은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여기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뜻입


    니다. 그리고 단 한 명도(하나라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거나 소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작은 이들이고 보잘것없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


    람 앞에서 잘난 체 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15절-18절 :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15절..<"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


    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어떤 필사본에는 15절에 '너에게' 라는 말이 있고,


    어떤 필사본에는 없는데, 여기서 '너에게' 라는 말을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


    입니다. '너에게' 라는 말을 그대로 두면 신자와 신자 사이의 개인적인 잘못에 대한 가르


    침처럼 됩니다. 그러나 15절-18절은 개인 사이의 사적인 잘못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공적인 죄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너에게' 라는 말을 삭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후대의 어떤 필사자가 뒤의 21절을 보고 15절에도 '너에게' 라


    는 말을 써넣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인 사이의 사적인 잘못에 대한 가르침은 21절-22절에 나옵니다.)


    '형제'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


    라.' 라는 말은, 어떤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그


    형제의 잘못을 공개할 필요는 없고, 단둘이 만나서 충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이


    르다.' 라는 말은 '형제적 충고'를 뜻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이라는 말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너의 충고를 듣고 회


    개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라는 말은 잃은 형제를 되찾은 것


    과 같다는 뜻입니다.


 


16절..<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죄를 지은 사람이 충고를 듣


    지 않으면 신명기 19장 15절의 규정처럼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회개하


    도록 타일러야 합니다. 원래 이 규정은 재판 때 증인을 두 사람 이상 채택하라는 규정이


    지만, 지금의 상황은 법률적인 절차는 아닙니다. 이것은 충고의 효과를 높이고, 마지막 절


    차를 늦추기 위한 것입니다.


 


17절..<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첫 번째 충고와 두 번째 충고는 사


    적인 것이고, 세 번째 충고는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충고입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


    려고 하지 않거든'이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이 16절에서 말한 두 번째 충고도 거부한


    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에 알려라.' 라는 말은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일로 넘기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이라는 말은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권고도


    거부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공적인 충고(권고)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동체 전체 회의


    를 할 수도 있고, 교회의 직권자가 공동체의 의견을 들은 다음 교회의 이름으로 권고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죄인의 문제가 이제 공개되고 공동체에서 공적으로 다


    룬다는 것인데, 이것을 중세기 때의 종교재판 같은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개인의 문제에 공동체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공적인 충고도 거부한다면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이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여기서 '세리'는 '공개적인 죄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은 교회에서 파문하라는(쫓아내라는) 뜻입니다. 너무 냉정하고 가혹


    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스스로 교회를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파문이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스스로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파문하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파문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에 파문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과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문당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회개만 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받


    아들여지고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18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


    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은 17절에서 말


    한 '파문'에 대한 교회의 권한을 다시 확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주님으로서 엄숙하게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6장 19절에서는 매고 푸는 권한을 베드로 한 사람에


    게만 주셨는데, 지금은 이 권한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


    들 각 개인에게 하나하나 따로 권한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베드로와 일치되어


    있는 사도단의 일원으로서 그 권한을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각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단의 일원으로


    서 그 권한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땅에서 매고 푸는' 일은 어떤 사람의 신자 자


    격을 박탈하거나, 신자 자격을 주는 일을 뜻합니다. 또 이것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사죄


    권)도 포함된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릴 것이라는 말은 땅에서 결정한 것을 하


    늘이 무조건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교회가 결정한 것을 하느님께서 무조건 따르신다는 뜻


    이 아니라), 하느님의 결정이 지상의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또는


    교회의 직권자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19절-20절 :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19절..<"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절-20절은 앞뒤


    문맥과 연결이 안 되는 내용인데, 마태오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이 구절이 공동체, 또는


    형제애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앞의 17절-18절의 교회의 결정에 관한 가르침과 연관


    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주님으로서 엄숙하게 약속한다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라는 말은


    '너희들이 두 사람 이상 모여서' 라는 뜻인데, 이 말은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 땅에서'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하늘


    을 향해 기도하는 지상의 인간들의 처지를 나타냅니다. '마음을 모아' 라는 말은 '한마음


    으로' 라는 뜻인데 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무엇이든 청하면'이라는 말은 기


    도 내용에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


    의 가르침에 맞아야 한다는 것과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 모두의


    이익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는 하느님인데, '땅에서' 바치는 인간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인간들이 청하는 것을 주신다는 뜻


    입니다. 혼자서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도 중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형제애를 가지고 함께


    모여서 한마음으로 바치는 공동체의 기도는 더욱 좋은 일입니다.


 


20절..<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이라는 말은 '몇 명이 모였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라면'이라는 뜻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수가 많고 적고는 중


    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고,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에 공동체의 기


    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가 되고, 따라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당연히 들어 주신다


    는 뜻입니다. 또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곧 하느님이다. 내가 그


    기도를 들어주겠다.' 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


 


<21절-22절 :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21절..<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앞의 15절-18절의


    가르침을 들은 베드로가 이제 개인끼리의 잘못과 용서에 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베드


    로가 지금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스승이나 교사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


    니라 하느님의 권한과 권위를 지니신 분께 질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이라는 말은 '형제끼리 서로 형제애를 거스르는 잘못을 했을 때' 라는


    뜻입니다. 즉 신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잘못에 관한 질문입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용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뜻입니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


    니까?' 라는 질문은 베드로가 생각하는 용서의 한계는 일곱 번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함'과 '가득 참'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기서 베드로가 일곱 번의 용


    서를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의 한계는 일곱 번일 것이라고 추측했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이 일곱 번까지만 용서하신다면 인간들도 그 정도만 해도 되지 않겠는가? 라는 것


    이 베드로의 질문입니다.


    (루카복음 17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번'은 '일곱 번 이상 무한정'의 뜻이


    고,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일곱 번'은 '일곱 번까지만'의 뜻입니다.)


 


22절..<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


    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주님으로서 답변하신다는


    뜻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라는 말은 '일곱 번이라는 한계를 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라는 말은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


    서 '일흔일곱 번'을 공동번역 성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을 보면


    70과 7을 나타내는 단어가 나란히 적혀 있을 뿐이어서 70+7=77로 번역할 수도 있고,


    70X7=490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뜻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지 간에


    예수님 말씀의 뜻은 '무한정'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7장 3절을 보면 '회개하거든'이라는 조건이 있고, 지금 마태오 복음에는 그런


    조건이 없는데, 그래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죄를 지은


    사람의 회개 여부가 아니라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들여


    구원을 받거나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멸망하거나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고,


    이쪽에서는 무한정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용서


    에 대한 가르침을 좀 더 알기 쉽게 '매정한 종의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23절-35절 : 매정한 종의 비유>


 


23절..<"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그


    러므로 하늘나라는'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하느님의 용서는'이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임금'은 하느님이고, '종들'은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인간들입니다. '셈'은 하느님


    의 심판입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많이 과장되어 있고 비현실적인 내용인데, 이것은 예


    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방법일 뿐입니다. 이 비


    유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들 사이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24절..<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임금이 셈


    을 하기 시작하는 때는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때로 해석됩니다. '만 탈렌트의 빚'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죄입니다. 빚진 사람이 끌려오는 것은 빚을 갚을 때가 되어서 끌려


    온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하느님 앞으로 끌려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한 탈렌


    트는 20년 동안의 노동자 품삯이고, 만 탈렌트는 20만 년 동안의 품삯이 됩니다. 그야말


    로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큰


    액수와 그 당시 가장 큰 화폐 단위를 사용해서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라는 것을 과장되게


    나타낸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 지은 죄를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속죄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25절..<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그 당시에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과


    아내와 자식'을 노예로 팔고, 가진 것(재산)을 다 파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해도 빚을 갚을 수 없다


    는 뜻입니다. 그만큼 큰 빚이라는 것입니다.


 


26절..<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


    하였다.>--그 종이 엎드려 절하는 것은 복종과 애원의 표시입니다. 제발 참아달라는 말


    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뜻입니다. '제가 다 갚겠습니다.' 라는 말은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애원하는 말입니다. 즉 거짓 약속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갚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애원하는 태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즉 왕이 그 종을 놓아주는 것은 그가 약속했기 때문


    이 아니라 그가 애원했기 때문입니다.


 


27절..<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주인


    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인간의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 용서, 사랑을 뜻합니다.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


    감해 주었다는 것은 빚 자체를 모두 없애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종은 주인에게 빚


    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


    서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지은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자비로만 되는 일입니다.


 


28절..<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왕과 첫 번째 종 사이에


    있었던 일이 두 종들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만 탈렌트에 비하면 아


    주 적은 액수입니다. 첫 번째 종은 자기가 엄청나게 큰 액수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


    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동료가 자기에게 빚진 적은 액수의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고 있습


    니다. 이것은 받은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받을 것만 생각하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은 엄청나게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다면 이웃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첫 번째 종은 동료에게 백 데나리온


    을 탕감해 주는 아주 작은 은혜도 베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붙들어 멱살을 잡고' 라


    는 말은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이것은 첫 번째 종이 자비를 베풀 줄 모르는,


    인정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9절..<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그의 동료


    역시 빚을 갚을 능력이 안 되어서 애원하고 있습니다. 29절은 26절의 반복인데, 이것은


    하느님께 빚진 것이든 이웃에게 빚진 것이든 간에 빚진 사람의 처지는 같다는 것을 나타


    냅니다. 즉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일이든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이든 간에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처지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할 뿐입니다.


    (용서는 흥정이나 거래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30절..<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었다.>--'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라는 말은 첫 번째 종


    에게는 동료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종에게 동료를 감옥에 가둘 권한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고, 아마도 법정에 고소


    를 해서 감옥에 갇히게 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서 빚을 다 받아낼


    수 있었는지, 즉 감옥에 갇힌 동료가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


    기서 강조하는 것은 첫 번째 종의 무자비하고 인정 없는 태도입니다.


 


31절..<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이 구절에 특별한 뜻은 없고,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삽입한 구절입니다.


 


32절..<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


    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그 종이 동료에게 한 행동을 알게 된 왕이(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서 그의 빚을 다 탕감해 준 이유를 깨우쳐 줍니다. 빚을 탕감해 준 이유는 그가


    애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불쌍해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여기서 '네가 청하기에'


    라는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네가 애걸하기에'로 번역하거나 '네가 간청하기에'로 바꾸


    는 것이 적절합니다.


 


33절..<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


    냐?'>--왕은 자기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왕이 그


    종에게 바라는 것은 그 종이 동료에게 똑같이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


    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내가 바라


    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12,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


    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34절..<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이미 앞의 25절에서 만 탈렌트의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그 종을 고문 형리에 넘긴다고 해도 그 빚은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4절은


    그 종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5절..<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이 구절의 뜻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다면 형제


    들끼리 서로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예


    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용서를 주셨는데도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


    는다면 이미 주신 것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앞의 비유는 이야기 전개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즉 동료


    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일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왕에게 애원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의 상황과


    도 맞게 됩니다. 지금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용


    서해 달라고 간청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이라는 말은 '너희가 형제(이웃)끼리 서로' 라는 뜻입


    니다. 용서를 해야 할 사람과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


    면 용서를 해야 할 일도 있고, 받아야 할 일도 있는 법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라는 말은 '진심으로'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앞의 27절에


    서 말한 것처럼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주는 일입니다. 즉 상대방의 죄를 완전히 지워서


    없애 주고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입


    니다.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 기준은 인간의 행동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에 말씀하신 황금률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하느님께서 자


    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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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용서"


 


배신감과 소외감에 떨며 울고 있을 때,


원한이 뼈에 사무쳐 이를 갈고 있을 때,


무조건, 무한정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실까?


 


죄를 지은 그 자는 자기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죄 지은 줄도 모르고 있고,


자기가 잘했다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피해를 입은 나는, 배신을 당한 나는, 상처를 입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 나는, 내 가족은,


이렇게 그 자가 한 짓 때문에 분노와 증오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용서하라는 것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냥' 용서해라. 정말로 용서가 안 되어도,


정말로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그냥' 용서해라, 그냥...


복수는 내가 해주겠다. 너는 그냥 용서해라.


너를 지금 분노와 증오 속에 울게 만든 그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냥 용서해라.


네가 울고 있는 것, 내가 다 알고 있고, 나도 지금 울고 있다.


나한테 맡겨라. 나만 믿어라.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여라.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2007. 10. 10.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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