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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해 도움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01 조회수1,113 추천수2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생명의 빵인 예수님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요즘 들어 선서(禪書) 「지월록」(指月錄, 명나라 구여직 저술)에 나오는 현상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신문과 방송은 핵심 사안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주변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정확한 근거를 대기보다는 소문을 언급하며 진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씀을 묵상하며 더욱 여실히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 제가 접한 강론은 대개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생명의 빵과 관련된 강론, 빵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를 봉헌한 아이의 행동에 대한 강론, 마지막으로 물질적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강론입니다. 과연 복음서 저자가 요한복음 6장에서 간절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이 이런 것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요한복음서 전반부인 ‘표징의 책(1,19-12,50)’에는 7가지 표징(기적과는 차이가 있음)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라는 복음서 기록 목적의 일부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표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네 번째 표징입니다. 저자는 첫 번째 표징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정결례에 사용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과 성전 정화 사건을 기술합니다. 성전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며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선포합니다(요한 2,1-2,22).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는 두 번째 표징(요한 4, 43-54)에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여줍니다. 왕실관리는 가나의 표징을 체험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소원)으로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며 참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세 번째 표징은 38년간 앓는 병자를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요한 5,1-18). 아마도 환자는 병과 주위의 선입견 때문에 진정한 안식을 체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형식과 내용을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제거하셨습니다. 바로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안식이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삶이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 표징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5-56)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표징을 지켜본 무리는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선언하면서 자신들이 체험한 참 예언자(신명 18,15-22)인 모세나 다윗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예수님을 로마 식민 통치 아래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겪는 불의와 고통을 겪는 이들을 해방시켜줄 예언자로 생각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초월하는 참 예언자이자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임을 선언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표징을 통하여 이적, 신비, 기이한 현상 그리고 작은 기도에 거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바라는 당대 유다인들의 외향 중심주의 신앙생활에 대해 비판을 가하시면서 진실한 생명의 양식은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당신 자신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이 중요시하는 속죄일(정결 예식), 성전, 안식일 규정 등 외적인 것에 근거를 둔 신앙생활에서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로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6월 25일 강론에서 참된 예언자는 “말을 들을 줄 알고, 들어서 자기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의 힘으로 행하는 사람이 진정 참된 예언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인 예수님의 몸과 피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기적과 표징의 차이는 행위와 존재의 차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14년 가해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복음: 요한 6,22-29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MEMLING, Hans 작, (1491)

 


     < 기적과 표징의 차이는 행위와 존재의 차이다 >

 선생님 제가 물위를 걸어 갠지스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수행자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높아진 도력을 자찬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던 라마크리슈나가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을 했는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이보게, 갠지스 강을 건너는 데 뱃삯이 얼마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18루피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라마크리슈나가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이나 수행해서 겨우 18루피를 벌었네.”

 

이 제자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능력이 어떤 일을 행하거나 행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물 위를 걷는다고 해서 어떠한 칭찬도 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셨던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를 수련하는 이들은 진짜 공중부양을 한다고 합니다. 절벽에서 1미터 가량 떠서 설법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국스님은 하버드 대학에서 30센티 공중부양을 보여주고 그것을 보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을 매혹시킨 적도 있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특이한 현상을 이루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큰 기적을 보이면 그 사람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는 기적의 종교가 아니라 표징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찾아온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행위나 이적에 집중하는 이들은 육체적인 이들이고,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양식이란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 우리에게 달라고 하는 양식’,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적은 표징입니다. 그리스도도 기적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표징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아들이고 표징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기적만 보고 어떤 이들은 표징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차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아들이 하시는 일은 표징인 것입니다. 기적을 보는 이들은 육체와 그 감정만을 추구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모두 그분을 버리고 떠나가고 맙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되어지는 믿음은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표징이 된 이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먹였던 만나가 곧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것과 같고 또 그렇게 그런 기적은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이 되어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표징을 읽어낸 사람의 삶은 온통 변화되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아니 무엇이 되어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기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이들의 특성을 이야기하십니다. 기적을 본 이들은 무언가 해서그 기적에 응답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봉사활동을 한다든가, 죄의 행위를 끊어버리는 등의 일을 해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묻는 질문은 항상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런 이들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는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을 바리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를 인정하십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항상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아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오로 사도처럼 고생한 분은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성모님이 바오로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아주 많은 일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일 자체가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는 존재가 변화되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이어야지 억지로 마음에 드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안 됩니다. 행복한 만큼만 행하십시오. 이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이고 자신을 아는 길입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이 되었기에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따뜻한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주위의 우리들이 그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은 우리를 살리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음과 향기를 주는 꽃들도 마찬가지고,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좋은 일을 행했던 이들이 자신들이 한 행위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행위로 당신께 봉사하며 예수님의 발치에서만 있으려는 자신의 동생을 판단하는 언니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발치에 붙어있는 것. 그것만 바라십니다. 그것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만 한다면 저절로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봉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매일 말씀이나 성경을 읽을 시간도 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랑이 원하는 것은 일 잘 하는 가정부가 아닌 순결한 신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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