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마르코복음 10장 46절~52절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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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성근 | 작성일2006-10-18 | 조회수1,007 | 추천수10 | 신고 |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번 째 이야기를 하시는데 큰 제목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간청은 곧 인간의 마음과 육의 마음인 욕망을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있게 해달라는 것인데 이런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또 오른편은 천국이나 왼편은 지옥이므로 그렇게 청하면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리고의 두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그렇게 모르고 청하면 예리고의 두 소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고 육안으로 보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하느님께서 소경으로 보실 수 있으니까,
성서를 잘 볼 수 있도록 즉 사랑으로 볼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묵상하고 기도합시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번 째 예고(마태 20,17~19)
17 예수께서 예루살렘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평화'라는 히브리말입니다.)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에서 말씀하셨다.
18 "보시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인자(인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는 대제관들과 율사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그러고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조롱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는 사흗날에 일으켜질 것입니다.
설명: "일으켜질 것입니다." 라는 말은 헬라말로 '에게이로'인데 이는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걸어가다는 뜻과 일어선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번 째 수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우리들의 의 즉 사람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새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존심 때문에 "속상하다. 마음상하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자존심 상하다."고 말하며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를 내고 싸움을 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아직 자존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마태 20,20~23)
설명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하시니까 세상의 나라인 줄 알고 두 아들 중 하나는 우정승, 하나는 좌정승으로 써달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영의정은 베드로 사도가 있으니까 달라고 하지 못하고 우의정 좌의정을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세울 나라는 하느님 나라 라는 것을 모르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열의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왕직, 섬기는 것 즉 봉사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며 하늘나라에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세상의 왕처럼 권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0 그 때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 절하며 소청이 있다고 했다.
21 "예수께서 무엇을 바랍니까?" 하시니 부인이 말했다. "선생님 나라에서 이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으라고 일러주십시오."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들 있구려. 내가 마시려는 잔 (고난의 잔 즉 죽음을 말합니다.)을 마실 수 있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자
2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과연 내 잔을 마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은 그 일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태 20,20~28)
설명: 우리들은 세례를 받을 때 평신도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받았습니다.
에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겸손하게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존심이 남아 있으면 화가 나서 봉사는 커녕 상처를 주고 싸움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보고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으라는 것인데 이 죽는 것은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평신도 사제직 - 미사에 참례할 때 우리들의 희생과 삶을 가지고 미사에 참례하므로써 우리들도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예언직 -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왕직 - 세상의 왕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러 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남을 섬기는 것이 왕직입니다.
물론 신부님들께서는 성직 사제직, 성직 예언직, 성직 왕직이 있는 것입니다.
24 다른 열 제자가 듣고서 두 형제를 못마땅히 여겼다.
25 예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알다시피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그들 위에 왕 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릅니다.
26 그대들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28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주려 왔습니다.
예리고의 두 소경을 낫게 하시다(마태 20,29~34)
설명: 여기에서 예리고의 소경 둘을 실제로 치유하시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서열 다툼을 하면 너희들이 소경이라고 하시며 치유를 하십니다.
이 예화를 통해서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이 성서를 읽으신 모든 분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이 세상에서 서열 다툼을 하고 있으면 우리들 보고도 소경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들의 이 인간적인 마음을 치유받아야만 하겠습니다.
29 일행이 예리고에서 떠날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30 맹인 두 사람(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킴)이 길가에서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아드님( 메시아라는 뜻임)!" 하고 외쳤다.
31 군중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크게 외쳤다 (부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다윗의 아드님!"
32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불러 "무엇을 바랍니까?" 하시니
33 그들이 "주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설명: 물론 눈을 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보게 되었으며 죄사함을 받고 부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성경를 깨달아서 성서의 내용이 보이는 것이 즉 성경이 열리는 것이 소경이 눈 뜨는 것입니다.
34 예수께서 측은히 여겨 눈을 만져 주셨다. (눈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는 것이 재창조, 새 창조입니다.). 곧 그들은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랐다.
설명: 보는 문제는 요한복음 8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보는 것은 잘 보는 것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으로 보는 것은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이게 되며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육 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보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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