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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묵주기도의 묵상재료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한정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6-12-18 조회수878 추천수0 신고
묵주기도의 묵상재료


환희의 신비


1 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루가 1,26-35]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이 세상에 사람의 육을 취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나자렛의 한 처녀를 택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직접 함께 사시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요 인류의 승화이며, 인류가 참 인간으로서 모습을 가지는 순간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 신비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와의 죄로 인해 버림 받은 인류에게 다시금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제2의 창조를 하십니다. 마리아는 제2창조의 하와입니다. 에와가 인류의 어머니였듯이 마리아도 새로운 어머니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하와를 파멸로 이끄었던 뱀의 머리를 바수는 사명을 받고 인류의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뱀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역할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셨습니다.그래서 교회는 마리아를 인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했습니다. 마리아는 태초부터 성령과 일치하여 계셨고 하느님의 계획아래 선택되신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를 온전히 거룩하신 분, 티끌 만한 죄도 도무지 있어보질 못했던 순결하신 동정녀 그리고 "마리아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을 정식 교리로 선언하고 기념합니다. 원죄 없이 태어나심은 성자의 어머니로 택함을 받은 사람의 필수적 은총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계획 안에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 그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를 원죄없이 태어나신 티없이 깨끗하신(immaculata) 동정녀라 호칭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았을 때 이미 "은총이 가득하신 분"으로 인사를 받았듯이, 마리아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가장 온전히 일치하고, 가장 거룩히 사랑안에 삶을 보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까1,38), 마리아의 "예"(fiat), 이 대답으로 새 시대가 열었고, 새 인간이 등장 했습니다.


20세기 초 파티마 발현에서부터 세기말 그리고 지금까지 메주고레 발현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을 하느님께 활짝 열어드리는 일에 "예"라고 결단을 하라고 촉구하시고 계십니다. 새로운 예수님의 강생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시는 하느님께 우리가 평화의 사도가 되겠다고, "예" 하고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대답은 새로운 세상, 평화와 정의가 흘러넘치는 세상을 보증합니다.


2 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독서: 루가 1, 39-56]


잉태후 처음으로 마리아는 먼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을 하기 위해서 나자렛 으로 부터 100km 떨어진 예루살렘 까지 4-5일을 요셉과 함께 나귀를 타고 또 걷기도 하면서 여행합니다. 거기에서 친척 엘리사벳이 사는 아인카렘 까지는 아직도 서남쪽으로 10km 정도 더 남았습니다. 도성에서 이곳까지의 길에는 경치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멀리 지중해가 수평선 끝까지 프르렀고, 완만한 내리막길 아인카렘 계곡에는 포도밭, 올리브, 상록수들로 가득찬 숲이 보였고 과일 나무마다 싱싱한 열매들이 무르익어 갔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마음속 비밀에 말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가득찬 마리아는 이윽고 그곳엘 도착해서 엘리사벳과 역사적 상봉을 합니다. 석녀로 소문났던 나이 많은 엘리사벳도 이 때 이미 임심 5개월 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샬롬 라흐(Schalom Lach)" 하고 문안을 드리자,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내 뱃속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어놀았다 하며,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루까1:42)  이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 1:43) 하였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 지리라고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 1:45)


성자의 탄생을 준비하는 성령의 제2의 협조자는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가 될 엘리사벳과 남편 즈가리야, 이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사벳과 뱃속의 요한이 성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매우 황홀한 경지에서 벅찬 환희로 마리아와 태중의 주님을 맞이하며, 인류가 구세주를 맞이하는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엘리사벳은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아보고 맞이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바로 엘리사벳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전 인류를, 마리아는 그들에게 구원을 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시대를 바로 읽고 성모께서 촉구하시는 바를 이행하여 그리스도의 제2 탄생을 준비하시는 성모를 협조하여 주님을 엘리사벳 처럼 기쁘게 맞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하느님께 활짝 열어 그 날을 준비합시다.

 

3 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마태 1,18-25]


10개월간 어머니 마리아의 몸에서 준비하셨던 성자께서, 육을 취하신 하느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천지창조입니다. 12월의 추운 밤, 베틀레헴 성문 밖, 들판의 소,양들이 임시로 쉬어갔던 천연동굴 안에 하늘의 천사들과 마음이 단순하고 가난하며 사회계급이 낮은 목동들의 축하를 받으며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세상은 구세주 오심에 눈이 어두었고, 성모의 해산에 따스한 훈기가 감도는 방 한 칸도 제공하질 아니했습니다. 오직 마리아의 "예" 대답 하나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폴랜드의 성탄송가를 바티칸 피정 중에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시메 세력들이 두려워 떠네. 하늘의 주인이 벗은 몸으로 누워 계시니 불꽃은 사그라지고 광채는 어두어 지네. 무한하신 이께서 유한함을 받아드리시네. 멸시를 받으시고 영광을 되 입으시네. 죽음을 아는 이가 되시어 세세대대로 임금 노릇하시네." (반대 받는 표적, 요한바오로2세 묵상,성바오로 출판사 1977)


많은 예언자들이 이미 예고한 메씨아의 탄생, 애타게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은 메씨아가 그들을 강대국의 수탈과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고 많은 나라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를 해왔습니다. 모세보다도 훨씬 출중한 영도자를 기다렸습니다. 육적이고 물질적인 바탕에서 메씨아를 한계 지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느님을 육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서 찾고 있지는 않을까요?  인간들을 그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참 인간되기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를  그러해도 사랑하시고져 성모를 통해 끈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자비를 묵상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합시다.


4 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루가 2,22-40]


당시 율법의 규정대로 맏 아들이 태어난지 40일 만에 부모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 비둘기 새끼 한 쌍을 제물로 봉헌하게 되어, 마리아께서도 아드님을 성전에 살아계신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율법에 예속된 사람으로서 봉헌하시게 됩니다. 이때 성전 안에서 나이 많은 시므온이 라는 예언자와 만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하게 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아찔한 순간의 고통이 성모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30년 앞선 증언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최초로 예언한 시므온의 말대로 이미 성모의 고난 구속의 참여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성모께서 살아 생전 가지고 계셨던 7가지 고통 중 최초의 것입니다. 나자렛으로 돌아오신 이후 아기 예수가 두 살이 채 안되었을 무렵, 에집트로 피신을 가야했던 일이 성모의 두 번째 고통이라 합니다. 이  힘든 고난의 여정도 성모를 아프게 하였게지만,  헤로데의 수많은 어린아기들의 살육으로, 울부짓고 애통해하는 자식 잃은 엄마들의 피 맷힌 고통이 더욱더 성모의 가슴을 한 없이 짓눌러 아프게 하였을 것입니다.


5 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독서: 루가 2,41-52]


에집트에서 3-4년을 보낸후 기쁨에 넘쳐 나자렛으로 돌아온 성가정은 비로서 행복한 시기를 갖게 됩니다. 목수 일을 하는 요셉, 요리와 온갖 집안일 특히 베틀로 옷을 짜 식구들을 즐겁게 하여 주었던 성모의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성가정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 12살 되던해 과월절, 명절을 지내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율법이 명하기를 "너희중의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그가 선택한 장소에 나와야 한다. 누룩없는 빵의 축제 파스카(과월절) 때와 주간 축제(오순절, Pentecost) 초막절이 그때이다.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 한국의 추석 때 처럼,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에 들뜬 민족 대이동이 쉽게 짐작됩니다. 약 3백만명가량이 예루살렘에 모여 축제를 지내는 동안 약 25만 마리의 어린양을 제물로 바친다 합니다. 누룩없는 빵과 더불어 양고기,포도주로 10명에서 20명씩 그룹 지어 식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7일간의 축제가 끝나면 귀향 인파는 입성할 때보다 더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예수를 기다리다 일행들 중에 끼어서 함께 가고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하룻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친척들과 친지들 중에서 찾아보아도 없었기에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룻길은 대략 16km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워낙 많은 인파 속에서 아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밤이 되자 마리아는 사랑하는 아드님을 잃은 괴로움에 더욱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흐느껴 우는 소리에 요셉의 마음도 한층 무거웠을 것입니다. 온 길을 거슬러 인파를 헤집으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가슴을 찌르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독립운동 수령의 자리를 놓고 폭력과 약탈도 있었던 때 인지라 어머니 마리아의 근심은 더욱 짙어 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의 3번째 고통입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마리아와 요셉은 성전에서 여러 학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토론을 하고 있던 아드님 예수를 찾게 됩니다. 메시아 시대의 도래와 그 활동을 예고하는 중대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사흘 만에 아드님을 찾아낸 사건입니다. 


빛의 신비


제1단 :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질문하며 말하기를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푸는 거요?" 하였다. 요한은 대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못합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튿날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이분을 두고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앞서게 되셨으니, 이는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서 알려지도록,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요한: 1/25-31).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레아로부터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그분을 말리며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제게로 오시다니요?"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지금은 이대로 하시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그제서야 요한은 그분의 뜻대로 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즉시 물에서 올라오시니 마침 [당신에게] 하늘이 열리고 또한 그분이 보시니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당신 위에 이르렀다. 이 때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하였다(마태오:3/13-17).


이 일에 대해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영이 어떤 분 위로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그분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고 그래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요한: 1/32-34).


제2단 :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갈릴레아의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그리고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도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마침 포도주가 모자라서 예수의 어머니가 그분에게 말하였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어머니는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유대인들의 정결례를 위해 돌로 만든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그 물독들은 각각 두세 동이씩 담을 만하였다. 예수께서는 시중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우시오"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그들이 독마다 가득히 채웠다. 이윽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제는 떠서 이 잔치의 주관자에게 가져가시오" 하고 이르셨다. 곧 그들은 가져갔다.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았다. 그는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물을 떠 온 시중꾼들은 알고 있었다.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신랑을 불러 말하였다. "누구나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만 못한 것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있었군요." 이렇게 예수께서는 갈릴레아 가나에서 처음으로 표징(이적)을 행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그분을 더욱 믿었다. 그 후에 그분은 당신 어머니와 [당신]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머무시지는 않았다 (요한:2/1-12).


제3단 :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꼬 1/15) 이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떠메고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분 가까이 데려갈 수 없어서, 그분이 계신 처소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달아 내려 보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아들이여,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소"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율사 몇 사람이 거기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이 아니고서야 감히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께서는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얼른 당신의 영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당신들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습니까?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 고 중풍병자에게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혹은 '일어나 그대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들이 알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그분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이릅니다. 일어나 그대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시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에 모두 넋을 잃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그러자 군중도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왔고, 그분은 그들을 가르치셨다(마르꼬:2/3-13).


"그러므로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이 여자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루가:7/47-4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20/22-23)

 

제4단 :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당신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그 옷이 하얗게 번쩍였다. 이 때 마침 두 사람이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바로 (세상을) 떠나가실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서야 예수의 영광을 보았고 또한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이 예수와 헤어지게 되자 베드로는 예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 그들을 감쌌다. 그리고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두려워졌다. 그런데 그 구름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가 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였다. 그 소리가 울렸을 때는 예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 무렵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가:9/28-36)

 

제5단 :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드시고 축복하신 다음 떼시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또한 잔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돌려) 마셨다. 이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마르꼬:14/22-25). 해방절 축제 전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해 오신 그분은 이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고통의 신비


1 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루가 22,39-46]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어머니를 비롯한 다정했던 사람들과 헤어질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던 예수는 마지막으로 이 지상에서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로 빚은 것은 결코 마시지 않겠다는 비장하고도 심원한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루가 22-18)  이 마지막의 식사를 영원히 간직하여 기념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이대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서 훌쩍 떠나실 수는 없으셨고, 그래서 이대로 떠나도 영원히 이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놀라운 대책을 마련하십니다.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 또 잔을 들고서, "이는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약, 몸과 피. 이들을 위해 늘 함께 하실 것과 그러면서 늘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겠다는 말씀인가?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느 스승이 이토록 제자들을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어떤 이 세상의 친구가 이렇게 그 친구들을 위해 엄청난 사랑의 불꽃을 담아 놓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찬 스승 예수는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물로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향하셨습니다. 세 명의 제자만이 갔었는데, 이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시고는 홀로 조금 떨어진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처절한 인간의 고독과 다가올 수난에 대한 공포감. 이것이 게쎄마니의 모습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태 26:39)  얼굴에서 핏땀이 흘러내리는 33세의 이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성과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인성을 가지신 구세주 예수. 인류를 구원하려시는 신적인 사명을 담대하게 완수하시려는 하느님의 성자이셨건만, 이 겟쎄마니에서 보여주신 극도의 인간적 고통을 절규하고 계시는 모습은, 친히 비천한 인간이심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마리아의 아들 인간 예수이심을 극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바탕한 모든 것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물려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를 배제하고는 그 아들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사 축복하시는 장면,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시던 장면,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던 그러한 인간적 가슴어린 정서가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비이자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크신 사랑입니다. 언제나 아들의 주위에 계셨던 어머니 마리아는 그 날 밤,  시므온이 일찍이 예언했던 시기가 다가옴을 예감하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혈육의 모정으로 아들의 고통을 이미 함께 가슴속에 묻으며 흐느끼고 계셨을 것입니다.


2 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 맞으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루가 22,47-53]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마태 27:26) 벗은 몸으로 돌기둥에 묶여 채찍으로 맞는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심장에는 이미 시메온이 예언한 예리한 칼날의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나 성서학자들이 예수께서 매를 맞으시는 이 대목을 좀더 상세히 복원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긴 가죽 끈들로 마디마다에 납 조각들을 꿰어서 만든 이 시대의 긴 채찍은 가히 가공할 상처와 고통을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에 가해지는 고문과 인간이 저지르는 죄를 긴밀하게 결부 시켜주는 가슴 뭉클한 신비입니다.


병사들의 매질로 주님의 몸은 전신에 살점들이 파 헤져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때 미처 날 뛰던 이스라엘 군중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마태 27:25)) 했지요.  과연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엄청난 결과를 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편태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매 맞는 사실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육체적 아픔, 고통은 그 순간들을 지나가면 상처도 아물고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벗 기우고 모욕당하고, 야유하는 군중들이 가하는  정신적 고문은 육체적 고통 그 이상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을 했기에 이들이 이렇게 미쳐 날뛰었습니까?  아픈 이들을 고쳐 주셨고,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셨고, 죽은 이를 살렸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사납게 대들어 침 뱉고 야유하고 십자가에 죽이라고 미쳐 있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모욕감, 그 깊은 고뇌의 모든 순간들을 묵묵히 참아 넘기시는 예수.  한 편에서 바라보셨던 어머니 마리아의 터질 듯한 심장과 쓰러지고도 남을 그 피땀의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의 계획이 아니었다면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뇌입니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까22:20)  훗날 성 요한은 묵시록에서 "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든."(묵시록 7:14)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3 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마태 27,27-31]


발악한 이스라엘 군중은 왕을 조롱할 심산으로 가시 줄기를 엮어 예수의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가시관...이 고문은 참으로 생각만해도 끔찍하고 지독한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매질로 피투성이 되어 휘청거리는 그리고 가시관을 쓴 얼굴에 온통 피 범벅이 된 예수를 군중에게 보이면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며 한 말이 있습니다. "자, 이 사람이다!" (Ecce Homo!)


이 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더 그 뜻의 심오함이 드러나는 역사적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참다운 왕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받는 그 장면.  인간의 왕다운 품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시려고 오신 하느님.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짓밟고 포기하기를 계속하는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자 이 사람이다!"  그 분의 피 흘리심 덕분에 인간은 인간다워 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파괴하는 악과 늘 대치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Ecce Homo의 의미를 깊게 간직하면서.


4 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루가 23, 26-32]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형구를 짊어져야 하는, 그것도 예루살렘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이 육중한 십자가를 지고,  조금 전 까지도 발악으로 야유하던 군중들의 욕 찌 거리와 그들의 경멸 찬 시선 속을 걸어 가야 하는 이 사실이 눈에 선합니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성인은 고백록에서,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르코 8:34) 하셨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짊어져야 했던 것,  사랑의 하느님은 우리를 올리시려고 정화를 시키시고 또 짐을 지우시도 하십니다.


몇 번씩 넘어지시며 육중한 형구를 메고 가시던 예수님.  얼굴에 피가 낭자한 고통의 인간으로서  뭇 사람들에게 짓 밟히고 인간의 증오와 잔학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걸음걸음 마다 조롱하는 무리들의 모욕이 더 하여 집니다.   울고 있던 부인들의 모습에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죄와 자손들을 위해 울어라 하십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 마리아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두 분의 시선속 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과 그리고 고통 속 혈육의 감정이 메어지는 그러한 고통이 모두 함께 있었던 찰나였습니다.  이때의 두 분의 심정을 제대로 상상 하기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인간의 글과 말로 그리고 우리의 정서로는 묘사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자녀들이 아프거나 심한 고통을 보는 부모들의 말을 듣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당했으면..." 과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우리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5 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루가 23, 33-55/요한 19, 25-27/마르 15, 33-39] 


사형장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우선 몸에 옷을 벗기우셨습니다.  이미 온 몸에 상처로 피와 살이 달라 붙어있던 옷을 벗기울 때 살이 다시 일어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눞혀 집니다.  십자가 나무 위에 하늘을 향해 누우십니다.  양손을 병정들에게 내어주시고는 손가락 보다 조금 더 굵은 쇠 못이 망치질로 손바닥을 관통할 때 마다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무릎 관절이 심하게 떨립니다.  이후 곧 두 발등위로 쇠 못이 대어지고 망치질을 병정들이 합니다.  못은 발등의 잔뼈들 사이를 통과해 나무 깊게 내려 박혔습니다.  십자가를 세워야 할 차례입니다. 병정들이 밧줄로 십자가 위를 묶어 천천히 잡아 끌고 십자가는 서서히 땅과 수직으로 세워집니다.


이때 온몸의 무게가  못에 걸린 손과 발을 찟으면서 세워지므로 그 고통이야말로 수난중 가장 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단말마의 고통이 엄습했습니다.  인간의 아들, 하느님의 외 아들, 가장 사랑 받는 아드님 예수!  33세의 젊은 육체를 그 시대 최대 치욕의 사형방법으로 처단되던 그 순간을 그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봅니다.  


"세계사에서 가장 경건한 이 사건 앞에 우리는 오로지 침묵을 지키며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사랑!  자신을 멸시하기에 이르는 하느님의 사랑. 그러니까 말보다 침묵이 훨씬 더 낫습니다."(크라크프의 대주교 Karol Wojtyla 의 바오로6세를 위한 바티칸 피정에서,  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사도 바오로는 이 우주적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유죄판결을 받는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2,15,18-19)


십자가 밑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유언을 새겨 듣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들이 어머니 아들입니다"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 이분이 너희 어머니이시다." 하셨습니다.(요한 19:25-27)  그 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시고 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 수난을 온전히 함께 하셨던 그 어머니의 고통이 계셨기에 우리는 성모님을 예수님과 함께 인류의 공동 구속자라 합니다.   숨을 거두신 아들의 시신을 끌어 안으시고 한 없는 고통으로 우시는 그 분은 다시 한번 참담한 고뇌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시신을 묘지에 안치 하시면서도... 그 모든 일들을 가슴에 묻어두며 심장이 비수에 찔리는 아픔을 인내하셨어야 했습니다.  아들이 된 제자들을 위해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광의 신비


1 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마태 28, 1-10/요한 20, 19-29]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분의 부활은 인류에게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삶의 뚜렷한 방향 제시입니다.  그분의 탄생에서부터 수난 그리고 부활, 이 모든 일들은 예언된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양처럼 길을 헤 메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이사야 53:6)   살아 생전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루가 24:39)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에, 닫혀있는 문을 그냥 통과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으로 내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하셨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토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불 순종으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이 날을 당신의 날로 삼기로 하셨습니다.(1고린 15:54-55).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나의 마음 나의 이 몸이 살아 계신 하느님께 기쁜 소리 지르옵니다."(시편 84:2)


우리가 한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 과연 어떻게 되었을 까요?  그 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든 일들이, 당시 지배 특권 층의 탄압 묵살로 인해 유다인의 역사 속에 그대로 생매장되고 말았을 것이며, 하느님의 아들이 거짓이라고 당당하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제자들은 일생을  "유다인들을 무서워하며"(요한 23:19) 그리고 그들로부터 질시 당하게 되고 그래서 스승 예수를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동양의 석가모니보다도 이름과 그 가르침이 알려지질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기성 민족 종교라는 강한 틀 안에서 그 분의 가르침이 그대로 배척 내지는 무시 당할 수밖에 없는 당시 배경을 볼 때,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하고 가르침을 민중에게 전했던 인도의 상황과는 달리 전혀 복음 전파가 불가능했으리라 짐작 해봅니다.  그 분의 삶이 세상 어떤 성현들보다도 뛰어났고 출중했건만, 부활이 없는 예수는 나무 밑에 앉아 죽음을 맞이했던 인도의 석가보다도 훨씬 못한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40일동안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써 당신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사도 1:3)   제자들은 이렇게 스승께서 죽었다가 살아 나셔서 그들과 함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들과 식사도 하셨고 애틋한 정을 나누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방금 잡아온 물고기 몇 마리를 구워서 빵과 함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정담을 나누셨고, 조반이 끝나자 베드로 에게는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한 21: 15) 이렇게 두 번을 더 똑같은 질문을 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몇 번 당부하십니다.(요한 21:17)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 분의 가르침과 복음의 증거이며 발판입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이고 새 역사의 장을 여는 희망의 쾌거이자 하느님의 끝이 없는 사랑의 결실입니다. 온 세상 크리스챤들의 신앙의 핵심이고 기쁨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2 단: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독서: 마태 28, 16-20/ 사도 1, 3-14]


40일을 이 세상에서 보내신 이후 그 날이 오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사도 1:9)  이제 제자들은 다시는 주님을  볼 수 없는 줄로 여겼던 바, 이에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 방에서 기다립니다.


홀로 서기를 해야 하는 제자들. 어머니 뱃속의 태아가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탯줄을 끊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태아는 독립적인 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태아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늘로 승천하셔서 자기들 곁을 떠나는 예수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것은 마치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던 자신의 탯줄이 끊어져 나가는 체험을 하는 태아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홀로서야 하는 입장, 아주 당혹스럽고 두려운 처지,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도, 결코 그들을 완전히 떠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3 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독서: 사도 2, 1-17/ 2, 32-33/ 2, 36-4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강림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셨던 예수님의 분부대로 이들은 대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순절이 되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 했습니다.   다락방에서 초조해 하던 제자들에게 돌연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들이게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는 데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도 2:2-4)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는 언제나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도 행하시고 말씀도 전하셨는데, 바로 그 성령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어머니이셨던 동정녀 마리아를 중심으로 모였던 이들은  최초의 교회 형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친으로서만 아니라 이 공동체의 모친 즉 교회의 모친이 되신 것입니다.  비오12세에 이어 바오로6세께서도 마리아를 교회 어머니로 선포하셨습니다.(하느님의 백성의 신경, Credo Populi Dei)  이들에게 성 삼위의 영이 내리시어 이들 인간정신과 마음과 몸에 하느님이 자리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사도들의 변화와 함께 오순절에 모여든 많은 군중들을 향한 교회 출발의 선포 즉 복음의 선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순절(Pentecost), 이때를 전 세계는 교회가 탄생한 생일로 지금까지 기념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이후의 시기를 우리는 성령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성령의 은총으로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진리를 세상에 알립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분을 받아 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 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내 버려두질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 오겠다." (요한 14:15-18)


지난 5월25일 메주고레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촉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너희와 함께 기뻐하면서 너희가 이 은총의 시기 동안에 영적으로 거듭날 것을 당부한다.   자녀들이여, 기도하여라, 성령께서 오시어 너희 안에 충만히 머무셔서, 너희가 신앙에서 멀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자녀들이여,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너희 주변 동료들과 사랑의 정신 안에서 더욱 나날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그리고 너희의 모든 어려움들을 지혜와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를  위해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또 너희 각자를 위해 예수님께 중재하고 있단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주어서 고맙다."


4 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 올리심을 묵상합시다.


아드님의 뒤를 따라 이 세상을 하직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친께서는 주의 승천 22년의 해가 조금 흘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모께서 7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일 것입니다. 아들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이르는 모든 구속의 신비에 어느 누구보다도 깊히 또 온전히 참여하셨습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시고부터 이미 승천의 신비가 싹처럼 움트고 있었다고 합니다. 

 

22년간을 아드님과 헤어져, 제자들을 아들 삼아 이들을 뒤를 돌보아 주셨고, 위로하여 주셨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어머니로서 늘어나는 자녀들을 위해 많은 애를 쓰시며 살아가신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분은 지금도 천국에서 지상의 교회자녀들을 위해 초대교회에서 하셨듯이 위로와 사랑을 베푸시고 안타까워 하시기도 하시며 때로는 기뻐하십니다. 많은 발현을 통해 아드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모정의 뜨거움을 우리는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재앙에서, 죄악에서, 마귀의 공격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최선을 다해 우리 영혼 구원을 위해 기꺼이 기적으로 나타나셔서 수 많은 반복된 촉구를 하시고 계십니다.


교황 비오 12세의 교황령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에서 : "2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부들은 동정 마리아를 새 아담과 밀접히 연결되고 그에게 종속된 새 하와로 제시해 주면서 모친과 아드님께서는 지옥의 원수와 투쟁하는 데 언제나 함께 하시고, 또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투쟁에서 사도 바울로가 언제나 연관시키는 "죄와 죽음"을 함께 누르시고 함께 완전한 승리에 도달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이 마지막 승리의 본질적 부분이고 상급이었던 것처럼 복되신 동정녀께서 아드님과 함께 한 그 투쟁도 성모님의 동정 육신이 영광을 받음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이 썩을 몸이 불명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물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원한 같은 예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오묘히 결합되시고 원죄 없이 잉태되시며 천주의 모친 되심에도 동정을 보존하시고 죄와 그 결과 곧 죽음을 완전히 이기신 우리 구속자의 인자로운 동반자가 되신 위대한 천주의 모친께서는 마침내 당신의 모든 특권으로써 죽음의 부패를 피하시고, 당신 아드님처럼 죽음을 이기시어, 영혼과 육신을 지니신 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끌어 올리심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친께서는 그곳에서 세세 대대 영원한 왕이신 당신 아드님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빛나고 계십니다.


숱한 고난의 여정을 끝내고 아드님의 곁으로 가시는 그 기쁨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어머니 참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마련하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5 단: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천지창조 이래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했던 분은 바로 그의 어머니 마리아였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분만큼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함께 협조하고 일치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세주 탄생 전부터 그리고 승천하시고 20년이상을 그 분의 일에 온전히 봉헌하시며 살아오셨고, 한번도  하느님께 순명의 겸덕을 어기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작은 미소한 죄라도 도무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총으로 사시는 동안 어려움이나 고난이 모두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셨습니다. 


시므온의 예언으로 시작, 이집트로 피난 하시던 고난의 시절, 아드님을 잃어 버렸을 때 가졌던 숨 멈출 것 같던 슬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아드님의 피로 얼룩진 사람의 형체를 잃은 그 모습을 길에서 대면했을 때 그 기막힌 고통,  십자가에 메달려 죽어가던 아드님의 모습을 보는 그 고통, 그리고 축 쳐진 아드님의 시신을 안고 터지던 심장의 고통, 더욱이 무덤에 안치하면서 가졌던 혈육의 이별, 그 아픔! 


과연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의 여왕으로서의 자격을 받으실 만 합니다.  마리아께서 영광에 참여하시는 정도는 다른 피조물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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