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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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두석 | 작성일2009-08-07 | 조회수439 | 추천수1 | 신고 | ||||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많은 질문이 그동안 있어 왔고, 심지어 아직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 이단들도 있고 해서, 질문하시는 분이 없음에도 "참다운 안식"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고자 나눔 차원에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위에 게시된 글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대체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그리고 신약의 주일은 모두 우리의 삶에 있어 참다운 안식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안식년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이 있는데, 중요한 내용은 하느님께서 축복으로 공급하시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그저 하느님 말씀대로 안식하라는 말씀(수고하여 농사를 짓지 않아도 축복으로 삼년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환경과 상황을 통해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을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셔도, 우리의 정신분열적이고 죄악된 자아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노력으로 추구하거나 쓸 데 없는 근심 걱정 두려움 등에 휘말림으로 인해, 마음 안에 평화가 깃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우리가 근심하는 것의 99% 이상은 절대 일어나지도 않는 쓸 데 없는 걱정일 뿐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주님께서 안식에 관해 중요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마태오 복음 11장에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면 어찌하여 우리가 그러한 짐을 지고 있는가 하면 주님의 멍에가 아닌 다른 멍에(사탄의 쇠멍에)를 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자아는 사탄및 세상과 결합되어 있어(영적으로 보면 사탄의 멍에를 메고 죄짐을 지고 수고스럽게 고생하고 있는 것임) 우리를 헛된 야심, 욕심, 탐심, 음란, 방탕 등등으로 내몰며 하루 한 순간도 안식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비참한 종살이를 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비참함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바로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은 안식일에만 누리는 것도 아니고 주일에만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일년 365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우리에게 육체적인 고통이나 노동이 있다고 해서 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항구적으로 감사함과 평화,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생수처럼 솟아 올라 외적인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의 내적인간이 장성함으로 누리는 안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을 누리기 위한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1.과거의 죄짐을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의 죄악된 자아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설령 외형적으로 선을 가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고스러운 죄짐일 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죄에 대해 성령의 회개은총으로 남김없이 낱낱이 회개할 때, 과거의 죄짐에서 우리는 해방됩니다. 그리하여 사탄과 세상의 쇠멍에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2. 현재의 삶에 있어 주님이 우리 안에 생명이 되시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과거의 죄는 회개로 정결해졌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죄로 기우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죄를 범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심령에 생명으로 계신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우리의 야심과 정욕에 이끌린 죄악된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세례받은 신자의 양심을 활성화시키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된 삶을 살거나 이웃에 피해를 주는 죄를 범할 때, 즉각적으로 우리의 심령에 평강이 사라지도록 섭리하십니다. 3.우리가 무엇인가 선을 성령의 인도로 행할 때, 행함의 주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세상 끝날까지 율법의 일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심), 율법을 완성하러 오시었는데 어떻게 완성하시는가 하면, 바로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시어 우리를 변화시키심으로써 주님께서 친히 율법이 완성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한다 했을 때, 그러한 선한 행위가 나오로록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행해지는 선은 사람들로 부터 영광과 칭송을 얻고자 하는 죄악된 자아가 추구하는 위장된 선행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행동하는 그 사람 자신의 동기로 유발되는 선행이 아니고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강권하시기도 하고 그 사람 안에 소원을 일으켜서 유발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인 것이며, 이러할 때, 그사람 안에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이외에 다른 동기가 없는 선행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는 그사람에게서 나오지만 머리이신 주님의 음성에 순종함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행이 순전히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인 교만인 "자기의(자신의 의로움으로 선한 행위를 한다는 교만한 생각)" 라는 행위의 저주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감사함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자신의 행위로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주의자 즉 율법주의자가 처하게 되는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저주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야한다는 강박관념 아래에서 감사함이 아닌 수고스러운 노역을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자신의 행위로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할 것 같으면 자신의 힘센 팔뚝을 믿으면 되는 것이지 하느님(그리스도)을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선행을 구원의 근거로 믿음으로서 곤고하고 수고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꾼(삯꾼)다운 발상이고 보상을 얻기 위해 행위를 억지로 지어내는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 할 것 같으면 행위를 일으키는 주체는 자기자신이므로 자기자신이 행위하여 구원을 받는다 할 때, 구원을 가져오는 주체는 바로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며, 자기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는 고달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믿음을 은사로 갖게 될 때, 믿는 이 안에 신비로이 거듭남이 일어나 새생명(그리스도의 부활생명,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며 바로 하느님의 자녀된 생명임)이 살게 됩니다. 이러한 새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아버지로 경배하며 의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참다운 믿음으로 거듭난 생명을 지닌 믿는 이에게서는 자연적으로 선행이 나오게 됩니다. 즉, 믿는 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보시기에 선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에는 선행이 항구적으로 수반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진리를 우리가 알게 되는 데, 첫째로는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구원을 가져오는 참다운 믿음에는 중생(거듭남)이 일어나서 새생명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인도하여(상존은층), 믿는 이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선한 행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선행이 수반되는 살아있는 믿음인 것임). 셋째로는 설령 남보기에 선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사람 안에 믿음이 없이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선행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자기만족적으로 행한다면 그러한 행위는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있을 뿐, 그사람 안에 성화(하느님의 자녀된 성품)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를 쌓는 선행을 행하는 사람에게서는 그사람 안에 안식이나 평화, 기쁨이 없고 교만함과 수고스러움에서 오는 곤고함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스스로를 저주에 처하게 하는 것임. 우리는 값없이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거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로는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이웃을 해치는 거짓과 죄악만을 일삼는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므로 그러한 거짓믿음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입으로만 믿는다고 주장하며 거짓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임하지 않았음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 바로 그사람의 악한 행위가 그사람이 구원받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 그리고 구원에 대해 위에 설명한 내용은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면 안되고 자기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새생명이 임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 안에 그러한 하느님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 스스로가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본글에서 언급되는 구원은 완성된 구원이 아닌 시작되는 구원(구속)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다가(흡사 심령에서 달고 단 생명강수가 솟아 오르는 영적인 체험이 있게됨), 죄악된 마음이나 행위로 기울 때 갑자기 내면의 기쁨과 평화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심령에 쓰디 쓴 썩은 물이 올라오는 영적인 체험이 있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주님 앞에 기도를 드려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되이 기도드리면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보여주시고 우리가 깨달음 안에서 회개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회개가 있었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시어 우리가 주님과 형제 앞에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바로 설 수 있게 하시며,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다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다운 안식이라 말할 때, 이러한 안식은 환경적으로 육체적 노동이 있고 없고와는 관계가 없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함의 상태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죄악된 자아가 야심이나 정욕에 이끌려 대상을 찾아 수고하지 않는 영적인 상태이며, 주님 한 분만으로 우리의 심령이 만족함으로써 범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에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알게 하시어 할 일을 하게 하시며 환경과 상황을 섭리하시어 우리에게 주님(하느님)에 대한 참다운 앎을 허락하십니다(요한복음에서 말하듯이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체험으로 아는 것임). 다음의 히브리서 말씀에서 보시듯이 우리에게 참다운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참다운 안식이 있게 됩니다(히브리서 4장 3절).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참다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 면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고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며 내 안에는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이루신다" 라고 진실되이 믿는다면 나는 수고스러운 행위에서 벗어나 믿음 안에서 참다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영원한 생명)로 향하는 그리스도라는 지상순례선(교회, 방주, 구원의 배)에 승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배를 항해시킬 수 없음은 마치 노아의 방주 안에 배의 방향을 조종할 시설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우리가 배 안에서 어딘가를 향해 아무리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 시간을 단축시키지 못합니다. 그 거리를 단축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짐을 짐칸에 내려놓고 지정된 위치에서 안식하며 믿음으로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우리의 노력에 관계없이 우리가 타고 있는 배(교회)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 안에서는 "아직"이지만 우리의 믿음 안에서는 "이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을 넘어서 우리에게 침입해 들어오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영원함을 넘어서는 영원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인간적인 의지 안에서 노력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안식하지 못하고 다만 부질없이 수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안식할 때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느님께로 향한 찬미가를 부르며 "이미"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여담 : 1.짐을 내려놓지 않는 승객 서울행 새마을호 기차를 탄 사람이 기차 안에서 서울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다고 해서 그사람이 서울에 도착하는 시간이 남보다 빨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사람은 죄짐을 지고 수고스럽게 발품을 팔고 있을 뿐이지요.
2.짐칸에 짐을 내려놓고 지정석에서 안식을 취하는 승객 서울행 새마을호라는 기차가 서울로 가는 것이지 기차 안에서 자기가 짐을 지고 걸어간다고 해서 서울에 가는 것이 아님을 은혜와 믿음으로 알고 있는 승객은 마땅히 짐을 선반 위에 올려 놓고 지정된 좌석에서 편안하게 안식합니다.
이상은 나눔 차원에서 믿음과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 적어 보았습니다. 안식은 오직 참다운 믿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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