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351]성직자의 독신 생활에 대해 - 개신교의 오류를 반박함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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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22 | 조회수2,127 | 추천수6 | 신고 | |
성직자의 독신 생활-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아 닙니다만 성서에 근거한 것으로서 교회법에 따라 지켜오는 가톨릭 교회 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아래 개신교 신자의 글에서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사제의 독신 생활’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프로테스탄트 중 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비판에 상당히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지나 그래도 프로테스탄트인지라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근거를 대기에는 역부족이 군요.
그 누가 1967년도의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을 통해서 비로소 가톨릭 사제들이 독신으로 지낼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입 니까? 아니 2천년의 역사를 통해 사제들의 독신을 지켜온 교회의 규율 이 겨우 30년 전에야 교황께서 회칙으로 정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 해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거야말로 아전인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아 어이가 없군요. 사실 이런 경우를 가톨릭 신자들로서는 한두번 겪게 될 일이 아닌 만큼 너무 민감하게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또 송석진 형제님을 비롯한 가톨릭 신 자 중에서 혹시 그렇게 말하는 개신교 신자의 주장에 의심이 들거나 가 톨릭 신앙이 개신교인들의 말 한마디에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닌가 불안 해 할까봐 이렇게라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안 그래도 개신 교인들이 성직자의 독신 문제는 안 걸고 넘어지나 했는데 역시나였습니 다. 아래 글에서 아주 철저하게 그들 주장의 허위와 오류를 파헤치도록 하겠습니다.
근거 박약, 논리 박약, 정신 박약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개신교인들 의 글인만큼 필자가 경험해 본 바로는 또한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에 의 하면 가톨릭 교리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고 하더라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과의 대화에서 그들에게 가톨릭 신앙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 정연 한 논리를 사용한다는 것이 마치 북한과의 제네바 회담처럼 별 성과가 없 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에서 언성을 높여 가며 행하는 가톨릭 신앙의 변호는 이해와 관용의 결과를 맺기 보다는 상 호 불신과 맹목적 적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 으며 그들이 사회내에서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필자의 글이 의도하는 바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의 확실성을 심어주기 위한 글임을 미리 말해두는 바입니다.
이런 경우에 드리는 저의 설명은 이러한 일을 겪게 되더라도 우리가 확 실하게 우리 가톨릭의 진리의 순수성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말에 굳이 신경쓰지 마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이렇게 생 각하는 개신교인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물론 선의의 개 신교인도 있지만 사람들이란 선의의 선전보다 악의에 찬 비방에 솔깃한 만큼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레지오 마리애 신심 운동의 창 시자인 프랭크 더프의 말처럼 죽 한그릇의 생득권에 가톨릭 신앙을 내팽 개치고 개신교 신앙에 회유되어 참구원의 길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 리 가톨릭 신자들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우에 대한 확고부동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가톨릭은 양비론적인 주장을 펴는 자를 진리의 이름으로 단죄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진리 그 자체이신 하느님에 의하여 언제나 진리는 오류를 물리칠 권한을 부여받았기에 하느님의 유일 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가톨릭에 대한 그 어떤 반대도 진리의 이름으로 반대하며 그 오류를 철저히 검증해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남용도 아니요, 더더욱 광신적인 행위로 오해받을 수도 없 는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가톨릭 신자의 의무인 것입니다.
앞으로 필자가 여건이 되는 대로 개신교측의 국내외 가톨릭 비판 자료 들- 구역질나고 역겨운 삽화들과 온갖 허위로 가득찬 음모설로 가톨릭에 대해 중상모략하는 멍청한 출판물- 에 대해 말씀드리겠지만 사실 가톨릭 에 대한 저들의 중상모략은 그 레퍼토리가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 이유는 속이 들여다 보일 만큼 뻔합니다. 그들 개신교 신앙의 존립 근거를 가톨 릭에서 찾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만일 가톨릭이 쓰러진다면 그들의 성서 제일주의를 기치로 내건 잘난 척 하는 개신교도 같이 넘어지게 된다는 것 을 뜻하는 것입니다.
송석진 형제님께서는 아래 개신교 신자의 얼토당토않은 성서 해석으로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개신교와의 교리 논쟁에서 밀릴 이유가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저들의 유일한 무기 는 성서 66권입니다. 그것도 자기네들 신앙 개조인 루터, 츠빙글리, 멜란 히톤이 지은 것입니까? 엄연히 우리 가톨릭으로부터 가져간 성서 73권 가운데 저들의 주장에 맞지 않는 7권을 무엄하게도 믿지못할 책들이라 일컬어 성서 목록에서 빼어버린 반역자들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경위로 입수한 성서를 자신들의 신앙의 유일한 보호책으로 삼아 가톨릭 의 교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아래 개신교 신자의 글에서는 가톨릭의 교 회법과 교리를 구분 못하고 있는 저들의 무지를 또 한번 드러냈음을 보 며 또한 교황의 회칙이 무슨 새로운 교리의 발명 내지는 교회법으로 오 인하고 있음을 보며 참 개신교인들이란 한글을 가르쳐 줘도 읽을줄 모르 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아울러 우리 가톨릭 신자 중에도 혹시라도 그러 한 생각에 동조하는 이가 있을지 몰라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가톨릭의 교리 중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들이 전해 준 진리 말고 새 롭게 발명되고 추가된 교리는 단 한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 해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 오해의 극단을 달리는 저들 개신교인들의 사고 를 단적으로 보여주기에 다시 한번 교황의 무류성에 관해 명백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발명할 권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계시된 교 리를 오류없이 해석할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20세기 들어 최근 의 교황들이 반포한 훌륭한 학자적 회칙들도 엄격히 말하면 무류성이 없 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앙의 교리를 단정하는 것이 아닌 연고이기 때문 입니다. 어떤 교리가 전체 교회를 위해서 정의되는 경우 이것은 새로 발 견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함축적으로 보존되어 온 신앙 교리를 이제 명현한 말투로 발표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만으로 가톨릭에 대항하나 (그것도 성서 73권 전체가 아닌 66권인 채로 가톨릭 교회에서 빼내어 간 뒤에 루터를 비롯한 개신 교 창시자들이 임의로 성경 구절을 개역, 위역한 것을 감안한다면 도무 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된 지성의 소유자라면 누구라도 능 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은 성서에 덧붙여 사도들이 직접 전해 준 성전과 전례, 사도 전래의 미사경문들과 가톨릭 교회 초대 교부들의 서간과 역사적 증언 자료, 그리고 종파에 관계없는 유명한 역사가들의 증언을 통해 개신교의 그 어떤 반대 주장에 대해서도 그 허구성을 입증 해 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자료가 있음을 가톨릭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내친 김에 한 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대다수 순진한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인들이 성서 구절을 들이대며 성 서에 이러 이러하니 가톨릭은 틀렸다라고 하는 말에 어안이 벙벙함과 동 시에 심한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으나 단언하거니와 사실 그러한 그들의 지적 모두 그들의 자의적 해석에서 나온 말일 뿐 전혀 그 근거를 댈 수 없는 말들입니다.
누가 만든 성서입니까? 누가 무슨 권위로 성경의 정경, 위경 판별의 역 사를 행했습니까? 도대체가 성서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모르고서 허구헌 날 히브리어 성서든 그 어떤 성서든 간에 성서를 우상 숭배하는 그들 프로테스탄트들의 가엾은 신앙관에 대해서 독일 괴팅겐 대학의 고 대 언어학과 역사학 교수이며 또한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 -다른 표 현으로는 종교적 체험이 풍부한 프로테스탄트-로 알려져 있는 바오로 데 라가르데의 공평하고 현명한 다음의 말이 그들을 반성시킬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고 믿습니다.
"한 가지 명확히 한정되고 또한 그 자신 확신있는 교단(敎團)이 제공한 서적의 집성(集成)에 앞선 시대의 교의(敎義)를 완전히 알고자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현재 신약성서가 신약 성서로 (als solches 보통 서적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은 가톨릭 교회의 업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톨릭 교회의 이 작품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 교회를 영속적 지위에 놓이게 하는 이상, 가톨릭 교도권을 다른 모든 점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교회 교리 의 전체를 끌어 낼 수 없는 것은 마치 독일 상법 법전에서 독일에는 형 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서적(신약 성서)에서 모순된 것을 그리스도교적이 라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단지 거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로 그것을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보아서도 안 된다." (Paul de Lagarde, Deutsche Schriften, Gesammtausgabe letzter Hand, 2. Abdruck, Goettingen, 1891, S. 43).
독자는 이 말에 비추어 가톨릭 교회 작품인 신약 성서로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어리석음과 신약 성서 성립의 역사로 미루어 가톨릭적 해석을 채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도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신약 성서 목록이 공식적으로 교도권에 의하여 확립된 것은 기원후 4세 기 교황 다마수스 시대에 위대한 성서학자 성 예로니모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앞서 가톨릭 교회는 이미 질서 정연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 목록 확정까지는 교회 학자들간에 수많은 논쟁이 있었 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시 이미 확정된 신조를 가지고 있던 통일된 교회가 교도권으로 자신의 교회에서 쓰일 책의 목록을 규정 하는 데 있어 자기 입장과 모순되는 것을 채용하였을 것이냐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하여도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제 필자는 그들 프로테스탄트 들에게 경고합니다. 더 이상 성서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고대인은 성서를 연구하지 않았다고.
종교학적으로 구분할 때 이미 개신교는 그 종교 행위와 신앙 양태 등에서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과 다른 별개의 종교로 인지하고 있음을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립니다.
우선 아래 351번 송석진 형제님의 글 가운데 있던 개신교 신자의 말도
안 되는 성서 해석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다음은 정신적으로 박약함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위해 그들의 성서 해석이 왜 엉터리인지 낱낱이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직자의 독신 생활
구원의 진리를 설교하는 사람이자 덕행의 모범자인 성직자는 그 직무를 완전히 수행하기 위해서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는 교회법으로 성직자에게 일생을 독신으로 지낼 것을 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직자가 복음전파와 신자들을 가르칠 직무를 완수 하려면 반드시 동정의 정결을 지켜, 그의 영혼은 물론 육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참조)
성서적 논거
예수께서 몸소 동정의 모범을 보이신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하늘나라를 위해 동정을 지키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 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 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마 태오 복음 11장 11-12절)
즉,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동정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할 만한 사람은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누구나 다 의 무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금욕생 활을 지망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일생동안 동정을 지켰고, 또 그것을 지망하는 사람들에 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무 걱정 없이 지내기를 바랍니다. 결혼을 안하는 남자 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에 들까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 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의 마음에 들까 하고 세상 일을 걱정 합니다. " (고린토 전서 7장 32-33절)
예수께서는 동정을 귀하여 여기셨습니다.자신이 몸소 일생을 동정 으로 지내셨고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로 삼으셨고, 동정인 세례자 요한을 선구자로 정하셨으며, 제자들 가운데서 정결의 덕이 뛰어난 사도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동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옥좌 앞에서,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 었다. 그러나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 도 배울 수 없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이들 이다. 사실 그들은 숫총각들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이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속량되었다" (요한 묵시록 14장 3-4절)
사도들도 베드로 외에는 결혼하였다는 증거가 없으며, 베드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아내와 별거하였습니다. 그가 주께 대한 충성을 말할때,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마태오 복음 19장 27 절)
라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아내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어 떻게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이 말을 한 바로 뒤에, 주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버 리기가 어려운 대상 중에 ’아내’를 포함시키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 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 다."(마태 19,29)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은 아내와도 헤어졌다 는 말입니다.(개신교 측에서 발행한 한국어판 성서에는 ’아내’라는 말이 삭제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대처(帶妻)주의를 변호하려고 한 것이 아 닌가 의심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성서 구절의 첨삭, 위역 개역은 루터 로부터 시작- 필자가 앞서 올린 글 중 ’루터는 진정 어떠한 인물이었나?’ 참조- 된 개신교의 악폐이자 하느님의 영원한 벌로부터 면해있지 못 하리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있던 아내도 주님을 위하여 떠 나 보내기도 하는데, 하물며 성직을 맡으려는 사람으로서야 처음부터 동 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독신을 강요하신 것은 아니지만, 말씀과 행동으로 이를 적극 권 장하셨으므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점차 성문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결혼한 사람도 성직을 맡아 볼 수 있었지만, 한 번 사제직 에 서품된 후에는 별거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2세기의 성 이냐시오, 유스티노, 티치아노, 3세기의 테르툴리 아노와 오리제네스, 4세기의 에우세바노와 치릴로 등의 서간 및 저서에 명 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로니모는 "주교나 신부나 부제는 미혼자나 홀아비 가운데서, 적어도 사 제직에 서품된 뒤부터는 앞으로 계속해서 동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가운 데서 선택되었다" (Ep. ad pammach)라고 하였습니다.
또 요비니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주교 재직 중에 자식을 낳게 되면 계속 주교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을 줄 압니다. 만일 그가 이로써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그는 남편으로 서 존경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간음자로서 단죄를 받을 것입니다" (Adv. Jovin., lib I)
그는 또 덧붙여 말하기를 "여러 동방 교회와 이집트와 로마성좌 아래 있 는 여러 교회에서는 반드시 미혼인 사람 가운데서 성직자를 등용합니다. 기혼자일 경우에는 그 날부터 결혼생활을 중지해야 합니다." (Adv. Vigilantium)라고 말했습니다.
성 에피파니우스도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회의 차부제, 부제, 사제, 주교직에 임명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초창기에는 미혼인 사람 중에 소명이 드물었으므로 기 혼자를 성직에 임명한 일도 있으나, 그들이 서품된 후에는 별거하라는 명 령을 받은 사실을 여러 교회법 조문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에게 이 규정이 어느정도 완화된 것은 사실입 니다. 즉 서품 전에 아내가 있는 사람은 그대로 동거하라고 허락한 것입 니다. 그러나 서품 후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물론 동방 교회에 서도 동정인 성직자가 아내가 있는 성직자보다 더 큰 존경을 받고 있음 은 물론입니다.
교회 역사상 문란한 사회 풍조의 여세가 성직계를 침범한 사실도 있었습 니다. 즉 의지가 약한 몇몇 성직자가 감히 계율을 어긴 생활을 한 때도 있었고, 루터처럼 교회에서 이탈하여 결혼을 한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때 간과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루터가 자신이 몸담고 있 던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난할 때 사제의 축첩 행위를 비난했으나 자신 이 몸소 수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림으로써 그의 비난은 주위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극소수의 일시적 타락 현상으로 교회사 2천 년 동안 정결을 지켜 온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의 독신생활 제도를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 다. 성직자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주 예수의 거룩한 사업을 계 승하여 복음전파와 성사집행, 성체와 성혈축성, 미사집전, 신자들에게 성 체를 분배해 주는 것 등이 성직자의 직무입니다.
지극히 정결하신 하느님이시니 정결한 시종들의 받듦을 받으시려 하지 않 겠습니까? 유다의 사제들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재계근신하여 아내 를 멀리하였는데, 하물며 지극히 거룩하신 어린 양을 매일 제헌하는 신약 의 사제는 일생을 정결히 지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흘 동안 여자를 멀리하지 않고는 거룩한 빵을 받 지 못하였습니다.(1사무 21,4-5 참조)
성체성사의 표상에 불과한 거룩한 빵을 받기 위해서도 그만한 근신과 정 성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산 하느님의 성체를 매일 받아 모시는 신약의 사제들의 영혼과 육신은 과연 얼마나 더 순결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십계를 받기 전에 모두들 사흘 동안이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여자를 멀리하였다면(출애 19장 참 조), 일생동안 하느님의 십계를 강론하고 주님의 복음을 가르치는 성직에 있는 신부는 평생 여자를 멀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개신교 목사 톤다이크(Thorndyke)도 그의 저서에서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과 여러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 는 동시에, 바오로 사도는 비록 부부 사이일지라도 기도를 위하여 한동 안 동침하지 말도록 권하였으니(1고린 7,5 참조), 지극히 거룩한 미사를 날마다 거행하는 사제들은 일생을 동정으로 지냄으로써 정결한 생활을 하 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Just Weights and Measures, p.239)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마르 8,34 참조) 즉 극기고행을 하여야 한다는 말 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1고린 9,27)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욕정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극기고 행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신의 지조가 고결하여지고 의지가 강해지며 이웃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솟아나는 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도 자기 희생을 요구하셨는데, 주님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띠 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성직자에게야 얼마나 더 높은 정도의 희생이 요구되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부르짖는 성직자로서, 부부간의 향락과 단란한 가정생활의 감미로움을 즐겨가면서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자기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말에나 행실에나 사랑에나 믿음에나 순결에 있어서 신도들의 모범이 되 시오"(1디모 4,12)
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실현하여 신도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일의 업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가정이 있는 교역자는 가족부 양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교회를 위하여 온 힘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번거러움이 없는 가톨릭교회의 독신 성직자들은 모든 시간과 온 힘을 오직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바칠 수 있습니다. 성 토마스는 "결혼 생활은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는 데 장애가 된다. 그 이유는 부부생활에서 오는 쾌락과 처자식에 대한 걱정과 집안 관리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직자 뿐 아니라 가톨릭의 남녀 수 도자들도 하느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냅니다.
또 경제적인 측면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가정이 있는 교역자의 생활비가 독신자보다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밖의 자녀 교육비 등 모든 생활비를 합해 보면 독신자의 생활비보다 몇 배나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 한 어떤 교역자들은 장사 등으로 생활비를 보태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는 가톨릭 성직자는 돈에 대한 번뇌가 있을 리 없습니다. 오직 청빈한 생활로 일생을 보냅니다. 한 사람의 교역자도 이러한 데 교회 전체를 비교 통산한다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교역자들 의 생활비는 결국 신도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 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모든 인간적인 향락을 다 버리 고 청빈으로 온 생애를 희생하기로 맹세하고 오로지 성무에 전진하는 독 신 사제의 생활상과, 결혼 생활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며 언제나 퇴직할 수 있는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직업의식이 짙은 개신교 목사의 생활상을 눈에 그리며,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자기 희생과 성화의 정도와, 인 류에 대한 봉사 실적 등을 냉정히 대조하여 비판하여 보십시오.
어느 것이 과연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는 바른 길 의 실천인가를. 목사들은 베드로 사도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 랐다고 할 수 있는 용기와 열성을 가지려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결혼 생활 을 변호하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만일 개신교 교회 당국 에서 모든 교역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처럼 독신 생활을 요구한 다면 자진하여 여기에 쾌히 응할 목사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교직을 버릴망정 그토록 애착하는 결혼 생활을 떠나려 하 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일생을 미혼으로 지낼 사람 외에는 신학교에 입학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의 신학교는 대부분 폐교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 뿐 아니라 100만에 이르는 남녀 수도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성화 만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한 폐병원, 시료원, 요양원, 양로원, 고아 원, 감화원 등엔 물론, 각종 교육, 문화, 전도, 구제 사업에 엄격한 수도 규칙을 지켜가며 일생 독신 생활로 봉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신교 계열에서 이런 복음 사업을 위한 단 하나의 수도 원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영국 儀禮派 성공회에 극소수의 수 도원이 있을 뿐임.)
이는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정통교리를 멀리 떠나 가장 중요한 7성사의 대부분(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을 폐기한 만큼, 은혜의 원천이 고갈되 어 수정(守貞) 생활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할 원동력이 나올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마태7,2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됩니다.
독신 성직자들의 위대한 공훈
가톨릭 교회가 가는 곳 마다 맹렬한 반대와 박해를 당하면서도,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기적적인 성과를 거둔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문제야 말로 흥미를 끄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 조직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 당국자들의 달관 적인 예지(叡智)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 교회가 이 정도의 강대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성직자의 독신 생활 덕분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독신 생활로 시종 일관하는 가톨릭 성직 자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다른 사물에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전 생애를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신자들을 위하여 아무 거리낌없이 바치고 헌신적으로 착한 목자의 직분을 다하기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멀리 사도 시대로부터 영웅적인 기개로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전세계에 주님의 복음을 선포한 대표적인 선교사는 모두 독신 성직자입니다. 동방 교회의 중견이던 콘스탄티노플의 크리소스토모, 이집트 히포의 주교 아우 구스티노, 이탈리아 밀라노의 대주교 암브로시오, 프랑스의 영계(靈界)를 개척한 레미지오, 독일의 사도 보니파시오, 아일랜드의 성조(聖祖) 패트릭 이 모두 독신 성직자들이었습니다.
동방의 사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만일 처자를 거느린 몸이었다면, 수 만 리 망망 대해에 일엽편주를 저어 가는 고통과 외로움을 겪어 가며 칠 석 같은 신앙과 불길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도, 중국, 일본의 수십 만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국에 처음 들 어온 중국의 周文謨 신부와 그 뒤 들어온 프랑스 신부들도 결혼한 몸이 었다면 목숨을 걸고 한국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들어왔다 해도 사경을 헤메는 고난을 겪어가며 전교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중국에 출전하였던 여러 일본 장교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이 진격했던 지역의 여러 교회당의 개신교 목사들은 다 피난하였지만 오직 가톨릭 신부들만 은 의연히 성당을 사수하며 신자들과 생사를 같이할 각오로 끝까지 버티 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가는 곳마다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몸 바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독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신자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과 신임을 받게 되는 것도 그들의 정덕(貞德)이 그 주요 원인의 하나입니다.
반대설에 대한 반박
어떤 사람들은 고린토 전서 9장 5절 -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 을 들어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무모하게도 반대하려 듭 니다. 개신교 측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서에는 ’아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는 불가타 라틴어 성서 원문의 ’자매인 여인(sororem mulierem)’이라 는 단어를 그들이 일부러 아내라는 말로 잘못 옮겨 적은 것입니다.
(※주의:이 구절에 대해서는 독자들께서 지금 현재 가톨릭 측에서 사용하 는 공동번역 성서를 참조하더라도 원문의 ’자매인 여인’이 아닌 ’아내’ 가 그대로 나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느냐고 의아해 하실 독자들에게 정확한 사연을 말씀드리면 가톨릭과 개신 교에서 공동 번역을 할때 라틴어 성서 원문에서 옮겨 정확하게 번역하기 로 합의한 원칙을 개신교측에서 깨고 자신들의 개신교에 절대적으로 유리 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아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러한 개신교측의 의도적인 오역과 위역이 가톨릭과 함께 만든 공동번역 성서 안에 상상외로 아주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 한 것들 모두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 자체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이것 이 바로 그들 개신교의 참모습입니다. 과거 그들의 신앙 개조 루터가 저 질렀던 만행을 가톨릭과 함께 사용하기로 약속했던 성서에까지 가하는 것 이 바로 저들입니다. 걸핏하면 성서를 들먹이며 성서에 나와 있는 하느님 의 말씀이니 하면서 떠드는 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지는 못 할망정 도리어 무엄하게도 하느님의 말씀까지 개신교의 헛된 교리에 맞도 록 뜯어고치고 그리고도 모자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멋대로 해석하려 들 어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
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 버리
실 것입니다"(묵시 22,18-19)
라는 성서 말씀도 개의치 않는 태도에는 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고린토 전서의 라틴어 성서 원문에 대해 궁금해 하실 독자도 있을 것 같아 참고 삼아 가톨릭 성서 정경인 불가타 라틴어 성서의 원문 구절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다음은 불가타 라틴어 성서 원문입니다.
ad corinthios I 9:5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첫번째 서한 중 9장 5절)
"numquid non habemas potestatem
sororem mulierem circumducendi sicut
et ceteri apostoli et fratres Domini
et Cephas"
("우리들이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자매인 여인을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아내가 없는 독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해석은 결혼을 허용하는 그들의 의도적인 곡해일 뿐 아니라 모순까지 범한 것입니다. 없는 아내를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여인이란, 사도들이 전교하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따라 다니는 신앙이 열렬한 부인 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감독(주교)은 ... 한 여자만을 아내로 가져야 하고 ..."(1디모 3,2)
라는 말씀을 들어, 주교는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이 주교로서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사실 만 보아도 그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뜻은 재혼한 사람은 주교에 서임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때는 교직이 부족하여 독신자 중에서 뿐만 아니라 결혼한 사람 가운데서도 주교를 선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혼한 사람에게는 그런 자격을 주지 않았 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반대하는 근거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기도 합니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괸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 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교설은 거짓말쟁이들의 위선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 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못 먹게 합니다"(1디모 4,1-3).
그러나 이 말씀은 혼인을 죄악시하는 에비온파, 그노시스파, 마니교파들 의 이설(異說)에 대한 말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성서적 배경을 무시한 자의적 해석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파들의 출현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말을 가톨릭 교회의 해석처럼 인정한다면 가 톨릭의 사도들로부터 전승된 성전을 인정해야 하고 그것에 덧붙여 이러 한 이단파들의 부류에서 저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에 그렇습니다. 결국 가톨릭 교회의 해석을 따라오지 않는 저들은 자신들 의 존재 근거가 부정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성서 구절이 너무나 많기에 그저 추측과 억지로 아전인수, 견강부회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혼인을 정당하다고 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성사(聖事) 의 지위에 올려놓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성덕(聖德)의 최고봉에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욕이란 인간의 본능 중 가장 강한 것으로서, 이를 억제 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독신생활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 을 하는 개신교인들은 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이 참되고 새롭다고 할지 모 르나 이 주장은 루터가 개신교를 창시할 때 가톨릭을 비난하며 자신이 수 녀와 결혼한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동정 허원은 마귀의 악령이 씌운 교 황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고 한 것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은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교의 성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말입 니다. 따라서 소위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이런 말을 했다면 이것은 자기 본 위의 말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 독신 생활을 실천하셨고 또 권장하셨으며, 그 후계자인 수백만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2천년 동안이나 끊임 없이 실천하여 온 이 엄연한 사실을 누가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불가능한 일 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권장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사도 시대 이래 무 수한 실천자를 낳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사람의 힘 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극기 고행과 끊임없는 기도와 성사로 하느님의 초 자연적인 은총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신앙, 성사, 은총 등 심오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저의 이러한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독신생활을 강요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가톨릭교회 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결코 이것을 강요하지 않습니 다. 각자 자유 의사에 맡길 뿐입니다.
다만 사제직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를 필수 또는 선결 조건으 로 요구합니다. 독신생활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 으면 됩니다. 신학교에서는 신앙과 성품에 대한 소속 본당 주임 신부의 추천을 받은 자에게만 입학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신학생에 대해서는 엄 정한 선발을 거친 뒤에도 양보다 질에 치중합니다. 성직에 부적격한 자라 고 인정될 때는 언제든지 그를 퇴학시킵니다. 이것은 오직 신학교 당국자 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신학생 역시 소년기든 청년기든 언제든지 자유의 사로 중도 퇴학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입학 후에는 중등과정 이상의 예비교육과 철학, 신학을 비롯하여 성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엄격하고 신성한 제 도 아래서 성덕을 수련하고 나서도, 성직 생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만 비로소 자진해서 동정 서원을 할 수 있는 결정 단계에 이를 수 있게 됩니 다. 결코 동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 문제가 강압으로 이루어질 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직자와 독신생활은 자손을 낳아 번성시키라고 하신(창세 1,20 참조)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지, 그 후의 억만인에게 일일이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 예수께서 사제의 동정 생활에 대해 말씀하셨을리 없고, 따라서 바오로 사도도 오류를 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톨릭 성직자 외에도 노총각 노처녀로 일생을 지내 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다고 누가 이들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죄인이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적 견지에서 볼 때, 독신 제도가 인구 증가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 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마치 몇 개의 음악학교나 미술학교를 세우는 것을 보고 이 때문에 농업과 공업이 부진한 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헛된 걱정을 하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신부의 수는 인구비례로 볼 때,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또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향락을 희생하는 사제 성직을 지망하 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도 없으며, 교회에서는 필요 이상의 성직자를 양성하여 지나친 짐을 질 리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국가의 융성에 이 바지하는 신부들의 숨은 공적을 눈이 있는 사람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는 하느님의 진리로 국민을 가르쳐 국법의 권위에 복종할 줄 알게 하고, 신부 자신은 성직 수행을 위하여 독신생활을 일관하지만 일반 신자 들에게는 결혼 생활의 신성성을 가르치며, 부부의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동시에 이혼, 산아제한, 낙태 등 큰 죄악을 엄금합니다. 그러므로 가톨 릭 교회의 교화를 깊이 입은 지역일수록 모범 국민이 많으며 인구 증가율 이 높은 것은 각종 사회 통계 자료가 입증해 주는 엄연한 전세계적 사실 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진심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가톨릭 형제 자매들에게 16세기 종교 분열의 분수령이 되었던 보름스 제국회의 때 개신교의 창립 자라고 할 수 있는 루터와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 칼 5세의 말 을 인용하는 것으로 저의 두서없는 글을 이만 줄일까 합니다.
루터는 의연하고 잘 준비된 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그의 저서의 어떠한 철회도 거부하였습니다.
루터:"만일 성서의 증거나 또는 명백한 논법으로 반박되지 않는 이상 나는 나를 인도한 성경귀절에 승복되어 있으며, 나의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였고, 스스로 모순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명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르친 것 중에서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 고 또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러 행하는 것은 확실 할 수도 없고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아멘."
연설은 의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칼 5세도 그에 못 지 않게 훌륭한, 스스로 작성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공식 석상에 서 발표한 그 자신의 최초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제국의 젊은 통치자인 칼 5세 역시 이 세계사적인 순간에 자신의 시간을 인지하였습니다. 두 인간과 두 세계가 대치되려는 순간입니다. 칼 5세는 독일의 제국 의회 의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칼 5세:"아시는 바와 같이 본인은 고귀한 독일국가의 가장 그리스도교 적인 황제들, 스페인의 가톨릭 국왕들, 오스트리아의 대공들, 부르군드 의 공작들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모두 죽기까지 로마 가톨릭의 충실한 아들이었고 가톨릭 신앙, 거룩한 관습, 교령, 전례의 수호자였으며, 이 모든 것을 그들의 유산으로 나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나는 늘 그들의 모범을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콘스탄트 공의회 이래 일어난 모든 것을 고수하기로 결심하였습 니다.
왜냐하면 한 형제가 전체 그리스도교계의 견해에 대항할 때에는 오류 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계가 천년간 혹은 그 이상 오류를 범해 온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또한 나의 왕국과 주권, 친구, 몸과 피, 목숨과 정신을 다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시대에 우리의 태만으 로 인해 비록 하나의 이단 같은 것이나 그리스도교의 침해일지라도 그것 이 인간의 마음속에 스며든다면 그것은 나와 고귀한 독일 국가의 일원인 여러분에게 치욕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제 루터의 연설을 들은 후 그를 처리하는 데 오래 주저한 것 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다시는 듣지 않겠습니다.
그에게는 호송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금후 나는 그를 공공연한 이단자 로 간주할 것이고, 여러분도 가톨릭 신자로서 여러분의 의무를 다해 주 기 바랍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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