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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스카의 의미와 가르침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한정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4-17 조회수3,690 추천수0 신고
파스카(Pascha)의 의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자기 집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집트 땅의 맏아들이 살해되는 재앙을 면하게 되고 마침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출애 12,1-14 참조). 하느님의 천사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이스라엘의 집은 지나가고 이집트의 맏아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때부터 파스카(Pascha: 지나가다, 통과하다, 건너뛰다라는 뜻)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이날을 과월절(過越節)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어린양과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요한 1,29.36 참조)은 과월절 오후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참된 해방, 즉 파스카로서 죄 많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서’입니다


자료: 천주교 교리문답



파스카(Pascha)란?


이는 오순절(五旬節: 파스카 후 50일), 초막절(草幕節: 밀 추수 감사)과 함께 이스라엘의 의무적인 순례 대축제이다. 원래 근동의 유목민들은 봄에 어린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며 가축 번성을 기원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도 이집트 탈출 전부터 이 민족적인 축제를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를 탈출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극적인 민족 해방을 기념하는 해방절(또는 무교절)을 바로 이 민족의 고유한 축일에 지내기 시작하였다(출애 12장). 따라서 해방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다의 가장 크고 기쁨에 넘치는 장엄 축일이 된 것이다.


파스카란 ‘거르고 지나간다’는 뜻으로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출애급)할 때, 일어난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후 히브리인들은 이를 ‘해방절’이라고 불렀으며, 교회에서는 이 해방절을 부활절의 뜻으로 ‘파스카’라 하였다. 예수님 시대부터 해방절이 부활절에 흡수 통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 천주교 용어사전



파스카의 용어 (빠스카, 과월절)

 

한자  過越祭 

라틴어  Pascha 

영어  passover 

히랍어  Pesah 

 

과월제, 유월제(逾越祭), 혹은 빠스카라고 한다. 과월제는 유태인들의 3절기(節氣) 중 봄의 철기[春節]인 과월절에 지내는 축제, 혹은 제사를 말한다. 과월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Pesah는 '통과하다'(보고도 그냥 지나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처음에는 가축의 맏새끼를 잡아서 바치던 유목민족의 축제였는데, 여기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축제 풍습인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는 관습이 결합하였다는 것이 출애급 이전의 과월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여기에 다시 출애급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부과된다. 즉 야훼가 이집트민족의 모든 장자(長子)들을 멸하실 때 이스라엘 민족의 집을 통과했다는 역사적 의의가 첨가되면서 이집트에서 해방된 출애급을 기념하는 중요한 축제로 되었다. 니산(nisan, 정월)의 10일에 그 해 태어난 흠 없는 양을 고르고 14일에는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引枋)에 바른다. 고기는 수족(手足)과 내장까지 모두 구워서 누룩 없는 빵, 쓴 나물과 함께 먹는다. 그리고 식탁에 앉은 사람은 모두 허리띠를 두르고, 신을 신은 채, 지팡이를 가지고 급히 음식을 먹는다. 아침이 될 때까지 집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 식사 도중 지명된 아들이 의식상 질문을 한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밤과 구별되는가”라는 물음에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이야기와 현재의 로마 지배하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기도형식으로 대답한다. 즉 과월제는 하느님의 구속사업에 대한 거룩한 축하행사다. 또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해방을 염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과월제를 지키고, 이날에 성찬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마르 14:10-16). 이와 함께 과월제 양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나타내는 전조(前兆)로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성취되고, 성체제정(聖體制定)의 만찬과 과월제는 결합(요한 19:36)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진실한 과월제의 고양(羔羊)이 되었다(1고린 5:7).

 

자료: 가톨릭 대사전



파스카와 미사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너희를 위하여 바칠 몸, …흘릴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고 하심으로써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봉헌하는 미사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같은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미사는 “파스카 양”(1고린 5,7)이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아버지께 바치고 그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기념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당신 자신을 제물로 하느님께 드리는 유일한 제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을 흠숭하고 감사드리며 속죄하고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빠스카에 대한 이해 (빠스카는 그전 용어)


빠스카란 원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가장 성대하게 지내던 명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마다 춘분 뒤 만월 직후의 첫 삽밭날에 조상들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이 빠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번 빠스카 축제 때만 이집트 탈출을 기념한 것이 아니라, 연중 매일 성전에서 저녁제사를 드릴 때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했고, 아침 제사를 드릴 때는 시나이 계약을 기념했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 이미 연중 한번의 성대한 빠스카 축제와 매일 드리는 빠스카 기념 예식(제사)이 있었던 것이다. 구약시대 후기에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빠스카 신학을 정립하여,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또한 그 개개인을 빠스카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교리를 체계화하고 유대인들의 영성생활의 원리로 삼았다. 하느님은 항상 고난의 길을 통해 당신 백성을 영광으로 이끌어 가시며, 고난은 영광을 기약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겪은 고난은 그후 모든 세대가 당하는 갖가지 고통의 예형으로 해석되고, 이집트의 파라오와 그의 군대는 하느님의 백성을 압박하는 악한 세속 권세를 상징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서 약속된 땅에 이른 것이 곧 영광의 전형으로 되새겨져졌다. 고난 없이 영광도 있을 수 없고 또한 영광에의 희망이 엿보이지 않는 고난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신학에 입각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분의 부활이 바로 빠스카 신비의 원천적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가리켜 "주님의 빠스카"라 일컫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시의 빠스카 축제에 앞서 마련하신 만찬식을 가리켜 "우리의 빠스카" 또는 "신약의 빠스카"라 불렀다.


오늘날 우리도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처럼, 해마다 봄이 되면 "주님의 빠스카"를 성대히 경축할 뿐 아니라, 또한 매일의 미사성제에서도 그것을 기념하고 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빠스카 희생에 한몫 참여하게 되는 그 성스러운 잔치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에 의해 사람과 단 한번 영원히 맺어진 새로운 계약을 재현하고 믿음과 희망으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전하면서 장차 성부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종말의 잔치를 미리 상징하며 맛보는 것이다." 특히 일요일은 "사도시대의 전통에 따라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빠스카 신비를 경축하는 날이다." 그러나 빠스카 신비는 단지 전례행사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례력 빠스카도 중요하지만 우리 일상생활의 실천적 빠스카도 중요하다. 우리가 전례를 통해 역사적인 '주님의 빠스카'에 성사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곧 전례적 빠스카다. 실천적인 빠스카란 우리의 나날이 생활이나 우리의 일생, 그리고 각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역사 그 자체를 가리킨다.


칠성사가 다 빠스카 신비와 관련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는 바로 빠스카 신비를 전례상으로 재헌한다. 로마서 6,4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성바울로는 빠스카 신비를 성세와 관련시켜서 이렇게 설명했지만, 미사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이런 성사들을 통해 빠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목적은 일상생활의 실천적 빠스카를 위해 필요한 영적 힘을 얻는 데에 있다.


마태 16,24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요한 12,24에서도 예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밀알 하나가 당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이 성서말씀들은 우리 생활 빠스카의 요체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 당시 목숨을 바쳐 죽음에서 부활의 영광으로 넘어가셨듯이, 우리도 날마다 자기 희생적인 생활을 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실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당시의 막강한 문명 대국인 이집트를 떠나 사막의 그 쓰라린 고초를 겪음으로써 새로운 백성이 되었고 그들의 역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 모든 개인에게 빠스카의 길을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발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의식주에는 걱정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억압을 당했다는 것은 깊이 묵상해 볼 만하다.


오늘날 우리도 과학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에서 여러모로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는 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가지 제약을 느끼며 괴로움을 당할 때가 많다. 그럴수록 우리는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고 보다 나은 세계를 동경하며 그 세계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홍해를 건너고 사막을 넘는 길이니,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 마침내 도달하게 될 부활과 영원한 생명도 미리 신비스럽게 체험하고 있다. 어둡고 과로운 길을 가면서도 그 신비로운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빠스카의 신비다. 낮추어짐과 들어높여짐, 버리는 것과 얻는 것, 질병과 치유, 고난과 평안, 죽음과 부활, 이렇게 빠스카 신비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포괄하고 있다.


우리는 이 빠스카 신비를 자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은 하느님이 계시하신 빠스카 신비의 예형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도 이 신비와 관련해서 자연현상의 예를 한 가지 들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땅에 뿌려진 씨앗도 죽어야 만은 열매를 맺고 부활의 풍요를 누린다. 그렇게 보면, 가을과 겨울은 빠스카 신비의 어두운 면을 가리키고 봄과 여름은 그 밝은 면을 가리킨다.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소생하는 봄철에 빠스카절을 지내는 것은 참으로 뜻이 깊다고 하겠다.


한 해의 절기뿐 아니라 하루의 밤과 낮도 빠스카 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은 묻히는 것에 비기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에 비길 때 밤은 죽음을 상징하고 낮은 생명을 상징하지 않는가. 그렇게 보면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은 바로 "건너감의 시간", 즉 빠스카의 시간이다. 따라서 이때 빠스카 잔치인 미사를 드리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일생도 빠스카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출생할 때 어둠 속에서 밝은 데로 나온다. 그리고 영원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빛 속에서 얼마동안 산다. 어린 시절은 인생의 아침이며 봄이라 할 수 있다. 이윽고 청년기가 되고 뒤이어 장년기로 접어든다. 하루해가 가면 어김없이 저녁이 오고 밤이 되듯, 인생도 저물 때가 오며 마침내는 어둠 속에 묻히고 만다. 그러나 밤이 가고 아침이 되면 우리가 잠에서 일어나듯이, 인생의 마지막 밤인 죽음 다음에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요컨대, 우리는 나날의 빠스카에서 해마다의 빠스카로, 그리고 일생의 빠스카로 삶의 노정을 더듬어 나가야 한다. 그러면 죽음은 우리의 마지막 빠스카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차 있을 부활을 거듭거듭 증거해 주시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킴으로써 그를 부활의 첫열매로 삼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흐르는 세월도 부활의 뚜렷한 표지입니다. 밤이 잠들면 낮은 일어납니다. 낮이 지나면 밤이 뒤따라 옵니다. 곡식을 실례로 들어봅시다. 씨앗이란 무엇입니까? 또 그것은 어떻게 싹틉니까? 씨뿌리는 사람이 나아가 온갖 시앗을 뿌리면 땅에 떨어진 마른 맨 씨앗은 부패합니다. 그 다음 하느님 자비의 힘이 그 큰 부패에서 그를 일으키시어 한 알맹이에서 여러 알맹이가 생기게 하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교황 성클레멘스 1세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료: 성 바오로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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