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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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4,998 | 추천수0 | |
파일첨부 느헤미야서와_에즈라서입문.hwp [922] | ||||
느헤미야서와 에즈라서 입문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기원후 15세기까지 이 둘은 히브리 말 성서에서 한 작품으로 나타나다가, 라틴 말 번역본인 대중라틴말성서의 영향으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로 나뉜다. 유다인들은 기원전 587년 국가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이어진 유배라는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된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유다인들이 기원전 538년에 바빌론 포로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뒤, 한 세기가 넘는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이 두 책이 없었다면, 유배 이후 유다 종교와 사회의 복구를 알려 주는 사건들을 알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1. 두 책의 내용
이 두 책의 서로 다른 부분들은 별 어려움 없이 구분해 낼 수 있다. 에즈라서는 먼저(1-6장)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샤 임금 고레스의 칙령으로(기원전 538년) 예루살렘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유배자들의 첫 귀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야기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점령지 관리들과 유다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큰 난관을 이겨 내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전에, 먼저 폐허가 된 옛 자리에 제단을 다시 쌓는다. 우선 그 동안 중단되었던 경신례만이라도 거행하기 위해서이다. 성전 자체는 20여 년이 지난 뒤 다리우스 임금 치세, 하깨와 즈가리야 시대에 와서야 완전히 재건된다(5,1-2).
7-10장에 따르면, 첫 귀향이 있고 나서 수십년이 지난 뒤, 아르닥사싸 임금에게서 공적 임무를 부여받은 사제이며 율법 학자인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그는 특히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혼인으로 유다교 전통에 어긋나는 여러 상황이 벌어졌음을 보고 몹시 슬퍼한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고, 이방인들을 유다 지방 경계 밖으로 내보낸다. 물론 당시 유다는 조그마한 지방으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추방된 이들은 멀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전반부(1-7장)는, 아르닥사싸 임금의 고위 관리인 느헤미야가 고국에서 온 동포들에게서 고향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진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애향심에 불타는 느헤미야는 유다 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을 시찰하고, 그 도시를 성벽부터 재건하는 허락과 권한을 임금에게서 부여받는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은 느헤미야의 지휘 아래 오십이일 만에 복구된다.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성벽 복구를 반대하고 나서는 유다의 적들과 싸우면서, 동시에 온 주민의 용기를 북돋우고 규율 준수를 촉구한 느헤미야의 열성 덕분이었다.
8-9장에서는 에즈라가 다시 전면에 나서서, 바빌론에서 가지고 온 모세의 율법에 상응하는 경신례와 축일 거행을 복원시킨다.
그리하여 느헤미야서는 백성의 서약과 여러 가지 명단, 그리고 성벽 봉헌과 관련된 몇 개의 단락에 이어, 십여 년 뒤에 예루살렘에 두 번째로 머무르게 된 느헤미야가 수행한 일련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10-13장).
이렇게 해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에즈라서
1장:바빌론 유배의 끝 2장:돌아온 유배자들의 명단 3장:경신례의 복구와 성전 건립의 시작 4,1-5:유다의 적들에 의한 성전 건축의 방해 4,6-24:성전 건축 방해자들과 두 임금 사이의 서신 교환 5장:성전 건축의 재개 6,1-12:고레스 칙령의 발견과 성전 건축 재개에 관한 다리우스의 명령 6,13-22:성전 준공과 봉헌 및 과월절의 거행 7,1-10:율법 학자 에즈라 7,11-28:아르닥사싸 임금의 칙령과 에즈라의 찬양 기도 8,1-14:에즈라와 함께 돌아온 이들의 명단 8,15-23:성전 일꾼들의 모집과 에즈라의 청원 기도 8,24-30:성전을 위한 예물 8,31-36:에즈라의 예루살렘 도착 9,1-15: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혼인과 에즈라의 참회 기도 10,1-17:백성의 맹세와 이방 아내들의 축출 10,18-44:이방 여자와 혼인한 자들의 명단
느헤미야서
1장:고향의 슬픈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기도 2장:느헤미야의 예루살렘 도착과 성벽 시찰 및 성벽 복구 결정 3,1-32:작업 책임자들의 명단 3,33-4,17:방해를 무릅쓴 작업의 계속 5장:사회 불의에 대한 느헤미야의 개입과 사욕 없는 느헤미야 6장:느헤미야에 대한 음모와 성벽 공사의 완료 7,1-72ㄱ:예루살렘의 경비 조직과 귀환자들의 명단 및 수 7,72ㄴ-8,18:율법의 봉독과 초막절의 거행 9장:참회 예절 10장:맹약 체결 및 그 규정 11장:예루살렘과 지방 주민의 분할 12,1-26: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여러 가지 명단 12,27-43:예루살렘 성벽의 봉헌 12,44-47:성직자들에 대한 백성의 후원 13장:이방인들의 분리와 느헤미야의 여러 개혁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이렇게 비교적 간단한 구조를 지녔지만, 그 문학적 형성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구약성서의 그리스 말 옛 번역본에는, 이 두 책이 하나로 묶여 번역될 뿐만 아니라 히브리 말 성서의 에즈라서와는 상당히 다른 또 하나의 에즈라서가 들어 있다. 이 그리스 말 에즈라서는 가끔 제1에즈라서라 불리고, 히브리 말의 에즈라-느헤미야서가 번역된 책은 제2에즈라서라 불린다. 그리스 말 에즈라서에는 역대기와 에즈라서의 몇몇 구절, 예컨대 다리우스의 세 시동의 이야기와 같은 외경적인 설화들도 들어 있다. 더 나아가서 라틴 말 전통에는 네 개의 에즈라서가 알려져 있다. 제1서는 히브리 말 에즈라서, 제2서는 히브리 말 느헤미야서, 제3서는 그리스 말 에즈라서에 해당되는 책이다(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그리스 말 에즈라서가 때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1에즈라서로, 때로는 제3에즈라서로 표기되는데, 우리는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끝으로 제4서는 에즈라를 저자로 내세우면서도 구약성서의 에즈라-느헤미야서와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후대의 묵시록이다. 대부분의 현대 성서 번역본에는 히브리 말로 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만 포함되고, 경전에 든 적이 없는 그리스 말 에즈라서와 ‘에즈라의 묵시록’은 제외된다.
2. 문학적 문제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대기 상하권, 그리고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역사의 종합은 한 저자에 의해서 편집되고 구성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견해를 밑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역대기 하권의 마지막 두 절(36,22-23)과 에즈라서의 첫 세 절(1,1-3)이 같다는 사실로서, 이는 한 이야기가 계속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책에서는 서로 다른 몇 가지 구성 방법을 볼 수 있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저자는 오래된 여러 문헌을 자료로 이용한다. 그는 이 자료들을 직접 인용하면서 서로 관련지어 편성한다.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합쳐져 한 작품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옛 문헌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히브리 말로 된 공식 문서와(에즈 2; 느헤 7; 10,3-30; 11,3-36; 12,1-26과 같은 명단과 통계 등) 아람 말로 된 공식 문서(에즈 4,9-6,18; 7,12-26과 같은 행정 서신과 공식 명령서).
(2) 에즈라의 회고록(에즈 7-10; 느헤 8-9). 여기에는 에즈 7,27-9,15와 같이 1인칭으로 쓰인 부분과 에즈 7,1-10; 10장; 느헤 8 - 9장처럼 3인칭으로 쓰인 부분이 있다.
(3) 느헤미야의 회고록(느헤 1-7; 12,27-13,31).
에즈라서의 대부분은 히브리 말로 쓰여 있지만, 어떤 부분은 아람 말로 쓰인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에즈 4,8-6,18과 7,12-26). 다니엘서에서도 볼 수 있는(2,4-7,28) 이러한 언어의 이중성도 이 책에서 여러 가지 문헌이 이용되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문헌들에서 시작되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편집 과정은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의 명단이 에즈라서 2장에도 나오고 느헤미야서 7장에도 나온다. 똑같은 명단이 매우 다른 두 역사적 상황에 쓰인 것이다. 첫째 경우(에즈 2)에는 이 명단이 기원전 538년 고레스의 칙령에 이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오만 명 이상 되는 유배자들의 첫 무리에 적용된다. 둘째 경우(느헤 7)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 곧 기원전 445년경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된 뒤에 느헤미야 시대에 실행된 인구 조사에 해당된다. 이렇게 두 곳에서 인용된 이 명단은 원래 귀환 직후에도, 느헤미야 시대에도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간의 어느 시기, 곧 명단 첫머리에 나오는 즈루빠벨과 예수아 시대의 상황을 드러내는 명단일 수 있다. 그래서 귀향이 이루어지고 이십여 년이 지난 뒤, 적어도 두 번째 성전 건축(기원전 520-515년) 이후에 수행된 귀환자들의 인구 조사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 두 책의 편집 연도는 역대기-에즈라서-느헤미야서 작품 전체를 함께 헤아려야 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 큰 작품의 내용, 그 안에 표현된 종교적 생각, 저자의 출신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이 방대한 역사 작품은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3세기 중엽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두 책의 최종 편집에만 해당될 뿐, 거기에 사용된 문헌 사료들은 분명히 그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역사적 문제
에즈라-느헤미야서를 분석해 보면 역사적 사건들 자체와 관련되는 또 다른 문제들이 제기된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중요한데, 이 두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제시되지만, 어떤 것도 확실한 해결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첫째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의 중단에 관한 것이다(에즈 4). 성서 본문에 따르면, 유다인들에게 반대하는 그 지방 이방민들이 불평함으로써 페르샤 임금 아르닥사싸가(기원전 465-424년) 명령을 내려 작업이 중단된다(에즈 4,6-24). 그러나 이 사건은 연대적으로 가능하지가 않다. 실제로 성전 재건축이 속개된 것은 기원전 520년 다리우스 제2년이고(에즈 4,24; 하깨 1,15), 완료된 것은 같은 임금 제6년, 곧 기원전 515년경이다(에즈 6,15). 이로써 작업의 중단과 속개-완료의 시대순이 거꾸로 된다. 에즈 4,6-23이 말하는 아르닥사싸 임금 시대의 일들, 곧 성전 재건축의 중단은 성전의 완공에서 적어도 50 내지 60년 뒤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에즈 4,6-23에 들어 있는 문서들을 성전 건축이 아닌 다른 작업의 중단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아르닥사싸 시대에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시도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아르닥사싸 치하에서 느헤미야가 이 작업을 재개하고 끝내려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잘 설명된다(느헤 1-4; 6). 에즈 4,6-23에 나오는 행정 서신의 내용 자체도 분명히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읍과 성벽의 복구에 대해서 말한다(12절, 13절, 16절). 그렇다면 이 문서가 어떻게 해서 훨씬 이전 시대의 성전과 관련된 이야기 중간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모른다. 같은 페르샤 임금의 명령으로 중단된 작업이기 때문에, 에즈라-느헤미야서가 편집될 때에 다리우스 시대의 성전 건축 작업과 아르닥사싸 시대의 성벽 건축 작업을 혼동하였을 수도 있다.
둘째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각각 언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느냐는 문제이다. 현재의 본문이 말하는 연대순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제7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에즈 7,7) 개혁 활동을 한다(에즈 8-10). 그 뒤 아르닥사싸 제20년에 느헤미야가 와서(느헤 2,1) 예루살렘 성벽 건축 활동을 수행한다(느헤 1-7). 그런데 느헤 8장에 따르면, 그 이전 느헤 1-7장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던 에즈라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 백성 앞에서 율법을 장엄하게 봉독한다(느헤 8-9). 끝으로 느헤미야는 바빌론으로 돌아갔다가, 아르닥사싸 제32년에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와서 다시 활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느헤 13,6).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같은 기간에 예루살렘에 살면서 서로 관련 없이, 서로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일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둘 다 같은 아르닥사싸 임금에게서 공적인 사명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에즈 7,11; 느헤 2,7-8).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에즈라가 아주 잠깐 동안만 그 곳에 머무르고서는 곧바로 페르샤 임금에게 돌아갔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인 임무 교대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해야 한다. 느헤 8-9장에 따라 에즈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고, 느헤미야는 페르샤 궁궐로 돌아갔다가, 십여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다는 것이다(느헤 13,6).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 밖에 느헤미야가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동안에 에즈라가 귀향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한다. 이렇게 하면 두 인물이 동시에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느헤 8,9도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에즈 7,8에 나오는 연대가 수정되어야 한다. 곧 아르닥사싸 제7년이 아니라, 제27년 또는 제37년(곧 기원전 438년 또는 428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설 역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끝으로 느헤미야의 활동 전체를 에즈라의 활동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이 제시되는데,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설일 수 있다. 느헤 1-7장과 10-13장이 바로 느헤미야의 재건축과 개혁 활동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 후 상당 기간이 지난 뒤, 아르닥사싸 일세가 아니라 이세 제7년, 곧 기원전 398-397년경에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에즈 7,7) 개혁을 수행하고(에즈 7-10), 율법의 장엄 봉독에 이어 경신례를 복구하였다는 것이다(느헤 8-9). 그러나 이 가설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에즈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에 느헤미야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느헤 8,9). 그러나 이것은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말하고자 했던 마지막 편집자에게서 나왔을 수 있다. 이 편집자는 두 인물의 체류 기간과 개혁 연대를 계산에 넣지 않은 채, 무엇보다도 평신도인 느헤미야보다 사제-율법 학자인 에즈라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신학적 동기가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연대들을 흐트러트려 놓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의 가설일 뿐, 완전히 만족할 만한 해결책은 아니다.
4. 종교적 전망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자주 읽히는 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많은 성서 봉독자들이 이 두 책을 잘 알지 못할뿐더러, 성서 역사와 관련해서는 흥미롭지만 오늘날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문서 몇 가지만을 그 안에서 보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정확하지 못한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이 두 책을 종교적 내용이 훨씬 더 풍부하게 담겨 있는 시편이나 욥기 또는 예언서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성서 전체에서 이 두 책이 지니는 종교적 중요성과 항구한 가치를 찾지 않는다면, 이 두 책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관현악단에서 모든 악기가 같은 자리에 있거나 같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교향악이 완전하게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중요하든 덜 중요하든 제 소리를 내는 갖가지 악기가 다 필요한 것이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엄격한 의미의 신학적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서술하는 매우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서 그 주인공들을 이끄는 주된 신학적 사상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두 책에서 분명하게 돋보이는 관심의 중심이 셋 있다. 곧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이다.
성전의 재건축은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의 첫 과제이다. 그뿐만 아니라 에즈 1장과 2장에 따르면, 고레스 임금이 칙령에서 명령한 이 성소의 재건축이 바로 귀향의 목적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집은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징표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을 이어 주는 경신례가 거행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제직(에즈 2,26-39), 레위인과 그 밖에 성소에 소속된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에즈 2,40-63), 경신례 기구들과 제물들(에즈 1,9-11; 2,68-69), 특히 새 성전이 건축되기 이전에 우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복원된 제단과(에즈 3,1-7) 접촉하는 모든 것, 한마디로 선택된 백성의 근본인 종교의 중심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느님의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저마다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성전의 재건축이 늦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이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적들의 적대감 때문이다(에즈 4). 하깨 예언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1,2-5), 그 어느 곳에서도 이 과업에 대해서 유다인들이 태만하거나 무관심하였다거나, 또는 의기 소침하였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성전 재건에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자기들의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에즈 6장이 말하듯, 성전이 완공되어 봉헌식을 거행할 때, 그들은 그것이 인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하면서(22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젖는다.
성전의 현존은 예루살렘 성읍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현재와 미래의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바빌론 궁궐의 고위 관리로 편안한 삶을 누리던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이 유다인의 도성으로 가서 그것을 복구하고 그 중요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윤허를 아르닥사싸 임금에게서 받아 낸다(느헤 1-2).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이러한 노력은, 온 백성의 협력 아래, 부서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자 힘쓴 그의 애국심과 종교적 열성을 설명해 준다(느헤 2-6). 예루살렘 성읍의 복구는 하느님께서 느헤미야에게 부여하신 사명이며,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분쟁이 있지만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 백성을 위해 싸워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완수해 나가야 하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사명이었다. 많은 이가 버리고 떠나 버린 이 성읍의 인구를 다시 늘리려고(느헤 11), 또는 안식일을 존중하도록 하려고 그가 취한 조치들은(느헤 13,15-22),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읍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파괴와 백성의 유배로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하느님 백성의 유구한 역사를 속개하는 것, 곧 인간의 잘못으로 훼손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역사를 회복해서 다시 예전처럼 속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은 그 안에 사는 이들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에게만 실제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유배로 말미암아 그 뿌리부터 뒤흔들린 이 공동체가 복구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 공동체의 참 바탕, 곧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룬 업적의 중요성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유다 백성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자주 국가를 복원할 가능성도 희망도 없다. 이 백성은 이제 종교 공동체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집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종교 전통을 현 상황의 요구에 결부시키는 복구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구 작업은 여러 영역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그 첫째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가시화하고 촉진시키는 경신례이다. 에즈라는 초막절을 지내기 전에, 모세의 율법을 엄숙하게 봉독하고 그 내용을 백성에게 설명해 준다(느헤 8). 지금까지 경신례는 주로 축일과 제사의 거행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제 유배 이후라는 변화된 여건에 따라 율법이 경신례 안으로 들어와서 그 의미를 확대할 뿐만 아니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에즈라가 시작한 율법 봉독과 해설은 후대에 가서,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예컨대 루가 4,16-22) 유다교 회당에서 거행되는 전례의 주요 요소들이 된다. 율법은 이렇게 유다교 생활의 근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백성이 다시 축일과 안식일을 준수하고, 예물 및 경신례와 사제직을 위한 십일조와 관련된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려고(느헤 10; 12; 13,1-22), 그리고 이방 여자들과의 혼인으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려고(에즈 10; 느헤 13,23-29) 때로는 가혹한 조치들을 취한다. 이 역시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려는 열성에서 나온 것이다. 유배 이후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다에서는 경제력의 차이와 불평등 관계 때문에,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에 구분이 생긴다. 여기에서부터 생겨난 백성의 분열과 불화를 느헤미야는 자기의 언행과 표양으로 해결하는데, 이 역시 율법에 대한 그의 충실성 덕분이었다(느헤 5).
이렇게 율법이 중시되는 시대 상황에서도,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추구하는 종교에서 우리는 흔히 종교의 전망을 축소시키고 그 본질을 왜곡시키는 옹색한 율법주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에게 율법은 항상,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 진실된 경신례와 자발적 기도로써 찾을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율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글로 고정된 율법에만 매달리지 않고, 조언과 도움과 보호를 청하기 위하여, 또는 기쁜 감사의 정을 드러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다(에즈 3,11; 6,21-22; 7,27-28; 느헤 1,4-11; 4,4-5; 5,19 등). 특히 이들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음은 그들이 직접 하거나 주관한 긴 기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에즈 9; 느헤 9). 이 두 기도 안에는 이후 유다교의 경신례를 이루는 주요 전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참회, 죄의 고백, 하느님께 드리는 용서의 간청, 백성의 지난 역사와 그 속에서 드러난 불충의 회상,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 등). 이 기도문들은 어떻게 유배 이전 예언자들의 설교가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으며, 백성을 겸손된 참회와 용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었는지 잘 보여 준다.
이 밖에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의 일부로서,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고려할 만한 가치를 지니는 한 가지 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 생활을 너무 약하고 예사롭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대 논쟁이다. 경계를 분명히 긋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결국 이민족들의 여러 종교와 타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종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 여자들과 한 혼인에 대해서 느헤미야가 혹독하기까지 한 조처들을 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혼인이 바로 큰 죄악의 씨앗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죄를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이 아니오? 수많은 민족 가운데에 그만한 임금이 없었소. 그는 자기의 하느님께 사랑을 받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셨소. 그러한 그를 이방 여자들이 죄짓게 한 것이오”(느헤 13,26). 솔로몬이 이럴 정도이면, 느헤미야 당시의 유다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관계를 가차없이 근절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생각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 협조하겠다고 나서면서도 사실은 유다인들에게 적대적이던 그 지방 이민족들과는 어떠한 형태로도 손을 잡지 않겠다는 그의 단호한 자세에서도 잘 드러난다(느헤 2,19-20; 4; 6 등). 여기에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의 징조를 보게 된다. 이른바 사마리아인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 721년) 이후 유배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이 섞여서 형성된 백성이다. 자연히 이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이방 종교들이 뒤섞인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혼혈로서 혼합 종교 생활을 하는 사마리아인들과 종교 및 혈통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유다인들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말엽에 이 두 백성은 완전히 분열하게 된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무엇보다도 민족과 종교 생활의 복구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같은 원의에 가득 찬 두 인물을 드러내 보여 준다. 사제이며 율법 학자인 에즈라는 경신례의 부흥에 영감과 힘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고, 이방 민족들과 타협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와 혈통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엄격주의자이다. 그리고 평신도 느헤미야는 정열적이며 꺾이지 않는 용기의 소유자로서, 사심 없는 인간의 본보기이며 기도와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나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어떠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든 간에, 인물이 업적에 앞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한 사람들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들이 수행한 다른 일들은 어떠하였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으며, 또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물이 아니라 활동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 수행 이전과 이후는 그냥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 또한 당시 유다교 종교 생활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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