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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간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816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간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의 선조 할머니 가운데 바쎄바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다윗 임금에게 솔로몬을 낳아준 이 여인은, 마태오 복음에서 "우리야의 아내"로만 불린다(1,7). 다윗은 어떻게 해서 남의 아내에게서 저 유명한 솔로몬을 얻었는가? 그 배경에는 다윗의 간음과 그것에 이어지는 간접 살인이라는 추악하고 음흉한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무엘서 하권 11-12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두 번 놀라게 된다. 다윗은 ’성왕(聖王)’으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심이 깊을 뿐더러, 결국에 가서는 메시아(구세주)의 원형으로 추앙받게 되는 그가 어떻게 그처럼 가증스러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놀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무엘서가 그러한 다윗의 죄악을 은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이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여름은 무척 덥다. 그래서 보통 한낮에는 집 안이나 그늘에서 쉰다. 다윗 임금도 시원한 방에서 낮잠을 자고 나서, 선들바람이 부는 늦은 오후에 궁전 옥상에서 산책을 한다. 그러다가 근처의 한 집에서 어떤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목격한다. 사람을 시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 다음, 다윗은 그 여인을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스라엘의 집은 지붕이 평평하다. 그래서 옥상에서 남의 집 안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더군다나 왕궁은 높기 때문에 주변의 집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원정을 나간 군대의 장교 우리야라는 사람의 아내 바쎄바, 틀림없이 아름다웠을 이 여인 역시 그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었을 터인데도, 마당에서 몸을 씻는다.

 

생각이 모자란 것인지, 어떤 끼를 발산하는 계산된 교태의 몸짓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생각없이 궁궐로 불려갔는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낌새를 채고서도 어명이기에 하는 수 없이 끌려갔는지, 아니면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치장을 하고서는 들뜬 기분으로 따라갔는지, 거기에 대해서도 성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바쎄바는 장차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에서 많은 왕자들을 물리치고,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임금으로 내세운다. 그는 미모만이 아니라 지능까지 갖춘 여인인 것이다.

 

다윗은 이 바쎄바를 궁으로 끌어들여 그와 정을 통한다. 간음 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간음은 어떤 죄인가? 십계명에서 여섯번째 계명이다(탈출 20,14; 신명 5,18). 간음은 다섯번째 계명의 살인과 일곱번째 계명의 도둑질처럼 이웃을 해치는 행위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웃’은 누구인가?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다. 그 옛날에는 여자가 혼인 전에는 아버지에게, 혼인 뒤에는 남편에게 속한 일종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간음은 남편의 권리, 그리고 혼인 계약에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히는 행위가 된다. 가정의 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이러한 중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레위 20,10; 신명 22,22). 간통한 유부남과 유부녀에게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다(신명 22,24; 요한 8,5). 더 옛날에는 화형에 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창세 38,24).

 

이스라엘에서는 약혼이 혼인과 똑같은 법적 효력을 지녔다. 그래서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혼인한 여자와 동일한 규정이 적용된다.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는 성 안에서 이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여자가 원하였으면 소리를 질러 도움을 받았으리라는 전제 아래, 남자와 여자가 간음에 해당하는 사형을 받는다. 그러나 들에서 사건이 터졌을 경우에는, 여자가 외쳤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리라는 전제 아래, 남자만 강간에 해당하는 사형을 받는다.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강간하였을 경우에는, 남자가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입힌 손실을 보상하는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원할 경우에 그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는데, 평생 그 여자를 집에서 쫓아내지 못한다(신명 23,25-29). 이러한 규정으로 해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도 그 당시의 법대로 처리되셨다면, 돌에 맞아 죽는 사형에 처해지실 수도 있었다.

 

간음한 여자를 반드시 이 법규대로만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간음은 사적 범죄이다. 그래서 이 죄가 저질러졌을 때에 살인이나 절도처럼 자동적으로 공권력이 개입되지는 않는다. 권리와 명예가 훼손당한 남편이 주도적으로 일을 수습한다. 사실을 알려서 규정대로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 남녀를 사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내를 용서하여 계속 함께 살거나, 또는 집에서 내쫓아 수치를 당하게 할 수도 있다(호세 2,5.11-12; 에제 16,37-38; 23,29 참조). 그렇다고 간통이 개인적인 일만은 아니다. 종교적 결과도 가져온다. 간음한 남자는 부정하게 되어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레위 18,20). 그리고 간통은 하느님께 벌을 받는 중죄이다(창세 20,1-13; 26,7-11; 1사무 11,27; 12,1-15).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는 어떠하였는가? 다윗에게는 여자의 몸을 훔쳐본 남자의 정염을 태우는 한때의 외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수태가 잘되는 때에 정을 통한다. 다윗은 그것을 몰랐지만 바쎄바는 잘 알고 있었다. 임신한 바쎄바는 임금에게 사실을 알린다. 임금이라고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윗은 난감한 처지에 빠진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우리야를 귀국시킨다. 아내와 함께 밤을 지내게 하여, 뒤에 아기가 태어나면 친생자라고 둘러대게 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우리야에게 궁중 음식을 딸려보내기도 하고, 자기 앞에 앉혀서 술을 먹이기까지 하면서 두 번이나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우리야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이틀밤을 다른 군사들과 함께 궁궐 문간에서 잔다. 전쟁할 때에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정에 진정으로 충실한 것인지(1사무 21,6), 정말 고생하는 동지들을 놓아두고 혼자만 호강할 수 없다는 전우애의 발로인지, 아니면 눈치를 챘으면서도 물증이 없어서, 또는 상대가 지금까지 존경해 마지않던 다윗, 그리고 절대적 권력을 지닌 임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삭이며 나름대로의 명분 아래 반항한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처신이 우리야를 불행에 빠뜨린다. 다윗은 계교를 꾸며 우리야가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다른 부하들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한때의 정욕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 간음으로, 간음은 또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윗은 그의 교활한 일처리로 민법상의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는’ 범죄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그에게 통렬한 비판을 가하신다. 다윗은 드디어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한다. 그는 벌도 받는다. 불륜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가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며칠 만에 죽고 만다. 그리고 뒤에, 반란을 일으킨 아들에게 아내들을 빼앗기는 엄청난 모욕을 당한다(2사무 12,11-12; 16,22).

 

그러나 우리야의 죽음으로 바쎄바는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는다. 하느님께서는 이 부부를 받아들이시고 또 솔로몬에게 사랑을 베푸신다(2,사무 12,24-25).

 

이렇게 볼 때에 간음과 관계된 이스라엘의 법규와 관습은, 일반적으로 남성에게 관대하고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고대의 다른 민족들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특이한 사항은 간통이 단순히 민법 차원의 범법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2사무 12,14). 간음은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악’인 것이다(신명 22,22).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는 언뜻 볼 때에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신다. 그분께서는 간음을 엄격히 단죄하신다(마태 5,28; 마르 10,11-12). 그러면서도 간음하다가 현행범으로 들킨 여자에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 용서는 하느님의 고유 권리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전권을 부여받으신 분으로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죄인을 타이르신다(요한 8,11).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자세는 결국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고(요한 1,29),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려는 구세주의 한 가지 간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마르 2,17).

 

[경향잡지, 1998년 5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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