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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새번역 성경: 하느님의 이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06 조회수6,260 추천수1

새 번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 하느님의 이름

 

 

새로 발행될 “성경”의 번역문이 공동 번역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야훼’를 ‘주, 주님,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야훼’를 옮긴 ‘주, 주님, 하느님’은 굵은 글씨로 적었다. 주교회의 성서위원회는 1990년 2월 19일 회의에서 번역의 원칙과 절차를 논의하고, “YHWH는 ‘주님’으로 번역한다.”고 결정하였다. 다만 예외로,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는 장면(탈출 3,15; 6,2-3)과, ‘야훼’라는 이름과 합쳐진 이름들, 곧 “야훼 이레”(창세 22,14), “야훼 니시”(탈출 17,15), “야훼 삼마”(에제 48,35) 등은 그대로 음역하였다.

 

 

음역을 하자는 의견

 

성서위원회의 이러한 결정에 대한 반대 논리를 먼저 살펴보겠다. 성서를 번역하면서 YHWH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결정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고려되는 가능성은 음역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이유들을 들어 이것이 올바른 방안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1) YHWH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번역에서도 역시 고유명사로 취급해야 한다. 2) 일반적으로 고유명사들을 번역해서는 안 된다. 3)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YHWH의 명백한 의미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본디 지녔던 어원적 의미보다는 그것의 함축적 의미가 훨씬 중요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 YHWH가 음역되지 않으면, 다른 많은 이름들에 쓰인 어근 YH와의 연관성이 상실된다. 6) 출애굽기 6,3은 YHWH라는 실제적인 이름을 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리고 지난해 열린 새 번역 성서 공청회에서 광주가톨릭대학교 김혜윤 수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번역위원회는, ‘야훼’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필요했던 자리가 구약성서에서, 다신론적 신관에서 유일신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이었고, 유일신관이 보편화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정황에서 굳이 ‘야훼’라는 고유명사가 명기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야훼는 ‘주님’으로 번역함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계시 전달’의 차원에서 본 성서 번역의 본래적 기능은, 본문이 언급하는 내용을 최대한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옮겨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 따라, 고유명사는 일반적으로 ‘음역’되고 있고, 따라서 히브리 본문의 ‘야훼’ 표기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정상적 질서이다. 

 

현재 우리 신자들의 사정에 맞는 표현을 선별하려는 노력은,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 이루어진 이후, 그 다음 단계에서 고려되어야 할 미덕이지, 인간 측의 상태와 현상들이 우선적으로 본문에 ‘주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순서가 도치될 때, 본문은 그 본래적 독자성을 잃고 윤색되거나 손상될 위험에 놓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일신 개념이 아직 조직적으로 체화되지 않은 비신자들에게도 성서가 개방되어 있음을 주지한다면, 유일신관이 보편화되고 무장된 정황을 견해 전반에 전제하였던 번역위원회의 논지는 비교적 설득력을 잃는다고 본다.

 

번역위원회의 결정처럼, 히브리어 '야훼'를 ‘주님’이라고 일괄적으로 옮겼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다음의 두 가지 경우로 제시하려 한다.

 

1) '야훼'와, 사전적 의미로서 ‘주인’ · ‘주님’을 뜻하는 '아돈'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 야훼를 주님으로 번역한다면 ‘주님’이라는 의미가 ‘중첩’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시편 8,2의 경우, '야훼'는 '아도네누'와 합성되어 있는데, 야훼를 ‘주님’으로 옮긴다면, ‘아도네누’가 의미하는 ‘우리의 주님’과 함께 결합되면서, ‘주님’이 반복되는 번역, 곧 “주님, 우리의 주님”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새 번역은 이를 “주 저희의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러한 번역은 중복이 주는 어색함을 드러내고, 심지어는 ‘주님’을 강조하려고 같은 말을 반복한 듯한, 본래의 히브리 구문과는 전혀 다른 구문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또한 서로 구별되는 두 단어를 선별하여 조합해 둔, 성서 편저자의 ‘꼼꼼하고 세심한’ 의도를 일절 무시하는 ‘무심한’ 번역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 

 

2) 구약성서에서 수십 번에 걸쳐 등장하는 친숙한 표현인 “야훼 엘로힘”도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관용적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임을 명시한다. 그리하여 공동 번역은 이 표현을 “야훼 하느님”이라고 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야훼를 무조건적으로 ‘주님’이라고 번역한다면 “주님 하느님”이라는 불편한 번역이 나오게 되고, 하느님의 이름을 마치 ‘주님’으로 제시하는 듯한 엉뚱한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참고로 구약성서 본문에서는 “주 하느님”으로 직역될 수 있는 표현으로, ‘아돈’과 ‘엘로힘’이 함께 결합된 표현이 존재함을 밝혀둔다(시편 86,12; 90,17; 다니 9,9.15).

 

개인적으로 평자는, '야훼'를 무조건적으로 ‘주(님)’으로 옮긴다거나, 반대로, 무조건 ‘음역’한다는, 다소 ‘폐쇄적’이고 ‘일괄적’인 규제는 배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야훼'를 ‘(나의) 주님’(아도나이)이라고 읽어온 히브리적 전통과 ‘야훼’를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서양의 여러 번역 본문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앞에서 제시된 문제점들을 외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 해법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준거는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문맥’만이 야훼를 음역해야 할지, 주님이라고 번역해야 할지 최종적으로 결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자는, 일반적으로 '야훼'를 ‘음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되, ‘문맥적 상황’에서 그것이 부적절할 경우,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유연한 원칙을 제안하고 싶다.

 

(김혜윤, “새 번역 성서 번역 원칙에 관한 개괄적 점검”, 「새 번역 성서 공청회 자료집」,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2004년, 47-48면 참조)

 

 

주님으로 옮겨야 하는 이유 

 

고 임승필 신부가 정리하여 소개한 번역위원회의 결정과 관련하여, 가톨릭대학교 김영남 신부는 이 공청회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필자도 임승필 신부의 주장처럼,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가 아니라 ‘주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그 반대의 주장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이유 가운데서 가장 큰 이유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그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YHWH 네 글자를 ‘아도나이’라든가 ‘엘로힘’으로 바꾸어 불렀다는 오랜 전통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이 오랜 전통이 이미 『70인 역 성경(LXX)』을 비롯한 고대의 다른 번역본들에도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야훼’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빠질 때 오는 문제점들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야훼’라는 이름이 모두 ‘주님’으로 대체될 경우에 생기는 가장 큰 문제점(단점)은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YHWH(야훼)라는 이름 자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역사적 의미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YHWH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계시되는 탈출기 3,13-15의 대목을 탈출기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야훼라는 이름은 단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다른 신들과 구별지어 부르려고 계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파라오의 폭정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그들의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인도해 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었다.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Exodus’의 구원사를 배경에 둔 이름이 성경에서 아예 없어진다는 것은 특히 구약성서의 경우 엄청난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하느님을 ‘주님’이라는 뜻의 낱말로 부른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는 유다인들의 경우와 다른 언어권 사람들의 경우는 무척 다르다고 생각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아도나이’(주님)라고 읽거나 들을 때, 그들의 눈이나 마음으로 YHWH라는 글자를 보거나 상상할 수 있다. 곧 그들은 ‘야훼’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주님)라고 읽으면서도 YHWH라는 글자를 매개로 하여 ‘구원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주님’으로만 되어있을 경우에, 그 이름을 매개로 ‘야훼’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한편,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를 때의 장점은, 그 이름이 갖고 있는 ‘보편성’이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께서 유다(히브리)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특정 인종과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서, 온 인류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장점은 그것이 삼위일체 교리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도 ‘주님’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번역위원회의 결정대로, 교회 공용(전례용)으로 사용될 새 번역 성서를 위해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어 네 글자 YHWH를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이라는 번역은 유다인들의 오랜 전통을 존중할 뿐 아니라,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우리말의 예법에도 맞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이라고 번역하더라도 ‘주님’이라는 이름 뒤에는 본디 ‘야훼’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과 ‘야훼’라는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자 하느님’, ‘자애로우신 하느님’, ‘고통 중에 있던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키던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공용 성서에서는 ‘야훼’ 대신 ‘주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성서를 비교적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야훼님’이라는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성서가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김영남, “새 번역 성서의 특성과 번역과 관련된 몇 가지 쟁점”, 「새 번역 성서 공청회 자료집」,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2004년, 24-26면 참조)

 

 

고 임승필 신부가 정리한 번역위원회의 논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가 6,000번 이상 나온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이 이름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가 항상 난제로 대두된다. 물론 있는 그대로 ‘야훼’로 음역하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은 번역상의 과제만이 아니다. 성서를 봉독하고 듣는 이들의 신학 그리고 신심과 영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이 문제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서가 형성되던 바로 그 시대에도 ‘야훼’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였음을 구약성서 자체 안에서 보게 된다. 이렇게 이 문제는 구약성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명쾌한 해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최선의 유일한 해답은 없고 차선의 여러 방안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어떠한 방안을 채택하더라도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더 나은 해결책을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안은 무엇인가? 곧 음역하는 방안과 ‘주님’으로 번역하는 방안 중에서 택일하여야 한다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으리라 본다.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대부분의 경우 ‘주님’으로 번역하고, 이름 자체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몇몇 경우에만 ‘야훼’로 음역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원칙적으로는 ‘주님’으로 번역하고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야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으로 번역하는 경우, 이 예외를 두느냐, 두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주님’으로 번역하는 가능성 역시 최선책이 아니라 차선책으로서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 모자란 점을 예외 사항으로 보충한다는 근본적인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 예외를 인정하는 방안, 곧 ‘주님’으로 옮기되 중요한 몇몇 경우에는 ‘야훼’로 음역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예외의 경우는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거나, 이 이름이 고유명사의 일부를 이루는 때이다.

 

이 방안을 선택하게 한 데에는 세계성서공회연합의 연구 모임이 밝힌 여러 가지 논거들 외에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게 된 동기는 당신의 신원을 분명하게 밝히셔야 했던 필요성에 있었다. 이집트로 가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오라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을 때, 모세는 이렇게 아뢴다. “제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탈출 3,13) 당시는 민족이나 종족마다, 심지어 가문마다 자기들만의 신 또는 하느님을 모시던 때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들 또는 하느님들 사이에서 당신이 ‘야훼’라는 ‘하느님’임을 밝히셔야만 했던 것이다(탈출 3,15). 다신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던 때에는 ‘야훼’가 말 그대로 이름의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론이 적어도 이스라엘에서는 당연시되던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는 ‘야훼’가 더 이상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단순히 한 분이신 하느님의 칭호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만의 고유한 이름으로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 하느님’이라 했을 때,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사정을 전혀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사전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분이 자기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하느님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인상을 받기가 쉽다. 더군다나 동양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도 계속 ‘서양 종교’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야훼 하느님’은 으레 ‘서양인들의 하느님’으로 여겨지기가 쉽다. 여기에서 조금 발전하여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야훼 하느님’으로 불리시는 분과 이땅에서 알려져 오신 하느님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경우 성직자와 수도자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에서 개인적인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리라 여긴다. 일반적으로 ‘야훼 하느님’은 그저 ‘주님’이며 ‘하느님’인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에서는 예의상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물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의 이름까지 알려주신 하느님, 인간과 더욱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러한 면만을 강조할 때, 인간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분,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Deus revelatus)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감추어계신 하느님(Deus absconditus)의 모습을 일그러트릴 위험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두려움 또는 경외심임을 구약성서는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의 다른 면을 망각하고 그분 사랑의 면만을 인간식으로 강조할 때, 우리는 그분을 편할 대로, 더 나아가서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은 존재, 결국 인간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우상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도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언어 관습상 많은 경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책이나 칭호만 부른다. 같은 직책이나 칭호를 가진 여러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 직책이나 칭호를 가진 사람이 한 명뿐인데도 그 앞에 이름을 덧붙여 부르게 되면, 오히려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때로는 실례가 되기도 한다.

 

다른 주요 번역본들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알아보자. 우리나라의 『공동 번역 성서』와 La Bible de Jeusalem 등만이 ‘야훼’로 음역하였을 뿐이다. 교황청의 표준 성서인 Nova Vulgata Bibliorum Sacrorum, 미국 가톨릭 교회의 공용 번역본인 The New American Bible 등 가톨릭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번역본들도 모두 YHWH를 음역하지 않고 ‘주님’으로 옮기는 것이 절대적인 대세이다. 다만 ‘주님’으로 옮기면서 예외를 두는 것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몇몇 구절들에서만큼은 ‘야훼’로 음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하느님의 이름인 YHWH를 우리말로 옮길 때, 여느 고유명사처럼 음역하는 것이 우선이요 가장 논리적인 방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YHWH라는 글자를 옮길 것인지, 아니면 성서를 우리에게 전승해 준 유다인들의 발음을 옮길 것인지, 또 애초의 소리를 옮길 것인지, 아니면 구약성서의 본문들이 경전으로 확정될 당시의 소리를 옮길 것인지, 또 이 이름의 원뜻은 무엇이며 원발음은 어떠했는지 등등 음역과 관련된 문제들이 간단하지 않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할 때, 특정한 몇 번의 예외와 함께 ‘주님’으로 옮김이 비록 최선의 방도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차선책들 가운데 가장 낫다고 여겨진다. 

 

(임승필,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사목』 204호(1996. 1.) 참조)

 

 

마지막으로, 새로 발행될 성경은 공식 전례에서도 쓰일 공용 성경이므로, 가톨릭의 전례 전통에 따라야 한다. 교회는 이천 년 동안 하느님의 이름을 “주님”으로 옮겨 불러왔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령 “성서의 보고”(Scripturarum thesaurus, 1979년 4월 24일)는 모든 전례에서 새로운 대중 라틴말 성서(Nova Vulgata)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노바 불가타 성서는 오랜 전통에 따라 YHWH를 “주님”으로 옮겼다.

 

[사목, 2005년 5월호, 강대인(새 번역 성서 합본 실무반 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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