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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기원전 7세기 후반기의 소예언서들 - 스바니야, 나훔, 하바꾹(하바쿡)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3,391 추천수0

[성서의 세계] 예언자 스바니야 · 나훔 · 하바꾹

- 기원전 7세기 후반기의 소(小)예언서들 - 스바니야 · 나훔 · 하바꾹

 

 

기원전 7세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강대국들이 벌이던 세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후(기원전 722년) 홀로 남게 된 남왕국 유다는 내부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강제로 유입된 강대국들의 종교들로 인해 혼합종교주의가 심화되어 갔으며, 나아가 그들 삶의 중심이요 토대가 되었던 하느님께 대한 신앙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참된 삶의 길에서 벗어나 세상적인 풍요로움으로 유혹하는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했던 일군의 예언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스바니야, 나훔, 하바꾹 예언자가 바로 그들이다. 성서학자들은 기원전 8세기 남북왕국 시대에 활동하였던 아모스, 호세아, 제1이사야(1-39장), 미가 예언자에 이어 이들 예언자들을 문서예언서(예언자의 선포말씀이 기록되어 독립된 책으로 전해진 예언서)의 두 번째 세대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세 권의 예언서들은 각각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분량이 적은 책들인 까닭에 소예언서(小豫言書)에 속한다.

 

 

1. 겸손의 예언자 스바니야

 

1) 시대적 상황

 

머리글(1,1)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스바니야는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 시대인 기원전 630년경에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요시야 임금은 재위 18년째인 기원전 622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그의 치세 초기 이스라엘에는 선대(先代) 므나쎄 임금(기원전 687-642년) 때의 혼란했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므나쎄는 부왕(父王) 히즈키야 임금(기원전 716-687년)의 종교개혁과 자주적 독립을 위한 시도들을 계승하지 못하고 외세의 위협에 굴복하여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강대국의 종교를 받아들여 예루살렘 성전 안에 아시리아의 신들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스스로 경배하는 잘못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이은 아몬 임금(기원전 642-640년)이 재위 2년만에 친 이집트파 신하들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국정은 더욱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스바니야는 요시야 임금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이전의 혼란했던 상황 안에서 예언자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2)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과 하느님의 심판 선포

 

스바니야는 먼저 당시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 야훼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했던 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생활을 고발한다. 그들은 바알신앙을 숭배하고, 하늘의 군대(아시리아의 별신들)를 경배하며, 밀곰신(암몬의 신)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에게서 돌아섰으며, 그분을 찾지도, 그분께 문의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1,4-6 참조) 이처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저버린 그들의 삶은 부정과 불의로 점철된 사회생활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돌보아야 할 백성들을 오히려 먹이로 삼아 착취하는 제후와 판관들을 고발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해야 할 예언자들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제멋대로 이야기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섬겨야 할 사제들이 오히려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고 있음을 질책하였던 것이다.(3,3-4)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은 선을 베풀지도 않고 악을 내리지도 않으신다.”(1,12)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으며,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음을 예언자는 지적하고 있다.(3,1-2)

 

스바니야는 이러한 백성들을 향해 ‘주님의 날’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 날은 남왕국 유다와 함께 ‘온 세상’과 ‘온 땅’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이며, 하느님의 정의가 결정적으로 구현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님의 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징벌과 멸망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정화와 새롭게 거듭 태어남에 있음을 예언자는 밝히고 있다.

 

3) 참된 하느님 백성의 길

 

이와 함께 스바니야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모든 겸손한 이들아! 정의를 찾아라. 겸손을 찾아라.”(2,3) 예언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이란 무엇보다 그 자신을 생명의 참된 주인이시오, 삶의 진정한 의미이신 하느님께 고개를 돌려 그분을 찾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충실한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특히 예언자는 삶의 근본적인 규범으로써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들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겸손한 자들, 곧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구현될 것이며, 마침내 ‘민족들’도 주님의 이름을 불러 섬기게 되리라(3,9-10 참조)고 선포함으로써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와 구원으로 나아가는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2.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선포한 예언자 나훔

 

‘위로 받은 이’를 뜻하는 ‘나훔’ 예언자는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함락(기원전 612년)되기 직전 격동의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된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선포함으로써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예언자는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고 있는데(1,2-8), 이 부분은 예언서 전체의 신학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 하느님은 자연의 제반 현상들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당신께 맞서는 자들은 반드시 그 잘못을 가려 징벌하시지만,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은 알아주시며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선하신 분이시다.

 

이어 예언서는 아직은 분명히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적대자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그들의 멸망이 멍에와 사슬에 묶여 있던 야곱(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주게 되리라는 신탁을 전한다.(1,9-2,3)

 

그리고 예언서의 중심을 이루는 마지막 부분(2,4-3,19)에 이르러 마침내 적대자 ‘니느웨의 멸망’이 본격적으로 선포된다. 지금까지 고대 근동의 패자로서 다른 민족들을 잔인하게 멸망시키고 억압과 폭정을 일삼던 ‘피의 성읍’ 니느웨가 결국 멸망하게 된 사건 안에서 인간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자연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예언자는 보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나훔은 오로지 야훼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선포함으로써 고난의 시기를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위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

 

 

3. 하느님 정의와 성실함의 예언자 하바꾹

 

하바꾹은 바빌론 제국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하고 고대 근동지방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했던 시기의 여호야킴 임금(기원전 609-598년)때에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그는 하느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하느님 백성이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써 ‘성실함’을 선포하였다.

 

예언서의 첫 부분은 두 차례에 걸친 탄원과 응답을 전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정의’가 핵심주제이다. 먼저 예언자는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던 이들을 대신하여 당시 법과 공정이 상실되고, 불의와 폭정이 판을 치던 사회의 왜곡된 현실을 하느님께 하소연하고 있다.(1,2-4) 여기서 탄원의 초점은 “법은 스러지고 공정은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1,4)는 말 안에 집약되고 있다.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남왕국 유다의 ‘제 힘을 하느님으로 여겨 죄를 지은 자들’을 새롭게 일어난 민족인 ‘갈대아인들’을 통해 징벌하실 것이라 응답하신다.(1,5-11)

 

두 번째 탄원은 하느님께서 당신 심판의 도구로 내세우셨던 갈대아의 만행을 고발하며 다시 하느님의 정의를 문제삼는다.(1,12-17) 즉 갈대아가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민족들을 닥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살상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보다 의로운 이들까지도 박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초조하게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파수꾼인 예언자에게 당신의 정의를 구현하실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말씀하신다.(2,2-4) 그리고 그 때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게는 ‘성실함’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2,4) 여기서 ‘성실함’을 나타내는 말은 히브리어로 ‘믿다’란 말과 같은 어근 아만(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따라서 의인에게 요구되는 성실함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하고 항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어 현실적인 삶 안에서 부정과 불의를 자행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악인들에 대한 다섯 차례의 불행선언이 선포된다.(2,6-20) 그리고 예언서의 마지막 부분(3장)에서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는 찬미가가 울려 퍼지는데, 나훔 예언자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 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나의 힘, 그분께서는 내 발을 사슴 같게 하시어 내가 높은 곳을 치닫게 해 주신다.”(3,18-19)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자의 확신에 찬 고백은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겪게 될 어려움에 좌절해서는 안되며,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하겠다.

 

[월간 빛, 2002년 8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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