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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첫 번째 복음서: 마태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4,081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첫 번째  복음서 : 마태오

 

 

설교와 교리

 

선교지역이 번성하고 있다는 열광적인 보고를 들으면 우리는 교회의 성공과 복음의 포용력 있는 힘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한 보고에 따라서 많은 젊은이들이 이상적인 선교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든 늙든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들과 첫 번째 선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에 사로잡힌 우리가 비범하고 감동적인 일에 의해서 혹은 어떠한 솔직함에 의해서도 흔히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의 가톨릭 공동체가 한 사제의 헌신 덕분에 몇 세기 뒤 계속해서 그 신앙을 순수하게 고백하고 그것을 확신을 갖고 실천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마찬가지로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지 않는가? 그러한 경우에도 그 공동체 신자들의 열정을 경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이중의 행위 - 신앙을 전파하고 간직하는 - 는 “설교와 교리”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설교는 교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진리를 제안한다. 차이는 단지 그 방법에 있다.

 

설교는 내용을 모르는 청중을 대상으로 한다. 듣는 이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듣고 거기에 경탄한다. 이러한 경탄에 바로 설교가 펼쳐진다. 즉 설교는 결과를 낳고 본질적이고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게 한다.

 

교리는 선포된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였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교리는 결코 내적 충격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결코 그럴 의향도 없다. 즉 회개를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고 다만 신앙을 간직하고 깊게 해주기를 바랄뿐이다.

 

설교에서는 옛것과 새것 사이의 대조를 강조한다. 옛것은 끝나고 새로운 것에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통 옛것은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제안되고, 새것은 훌륭하거나 배타적으로 좋은 것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조명하고 극복해야 할 적절한 명암법이 행해지게 된다. 그리고 새것은 보통 감동을 주는 것이다.

 

교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옛것을 지키고, 그 영향력을 간직하고 확장하려고 애써야 한다. 단지 비교적 덜 중요한일에 대해서만 이런저런 쇄신을 생각할 수 있다. 기껏해야 교리를 제안하는 방식 정도가 새로운 요청에 적용될 수 있다.

 

예수의 출현은 엄밀하게 그분이 천상의, 전적으로 새로운 메시지를 가져오셨다는 사실로부터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디서든지 설교자로 소개되신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4,l7) 그분은 말씀의 씨를 뿌리는 분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다”(마태 l3,37).

 

그분의 가르침은, 산상의 담화에서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21. 27. 31. 33. 38. 43)와 같이 일정한 방식을 되풀이 부각하듯이, 옛것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마태 5,22. 28. 32. 38. 44)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예수의 새로운 선언이 놓인다.

 

예수께서 하신 수많은 비유들은 그분의 가르침의 일부로서 분명히 청중들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마태 13,44)과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마태 13, 45-46)은 평온한 장면을 그림으로써 목표에 다다르고자 한다. 불충한 청지기의 이야기(루가 16,1-13)는 같은 개념을 전개하나, 청지기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는 불의한 방식으로 새로운 생활조건을 찾기 위하여 이전의 일을 포기한다.

 

부수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예수의 설명 전체는 유일한 목표에 쏠려 있었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그것은 옛 이상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향해 방향 잡는 것이다.

 

한 세대 뒤, 예수의 메시지가 기록으로 정착되었을 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에 의해 채택된 기준들을 따랐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비신자들을 위해 쓰지 않고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썼기 때문에(루가 l,4;요한 20,3l) 그들의 목적은 신앙의 전파가 아니라 신앙에 대한 반성과 그 탐구에 있었다. 그들은 초기에 “설교”의 취지나 요망사항으로 삼았던 용어와 말들을 사용함으로써 “교리”를 가르치거나 전하였다. 그것은 어려움과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 “설교”의 어떤 상세한 부분들은 목적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다른 것들은 적응이나 변화를 요구했다. 복음서 여기저기서 지금도 이러한 변화를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인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인 “너희는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가 12,31)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로 바뀌었다. 가난에 대한 축복인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20)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로 되었다. 회개는 더욱 확장되고 깊어진 혁신적인 실천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복음서를 읽을 때 현대의 우리는 당시 청중들이 가졌던 감동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경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정신 안에서 옛 자료를 생생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생활로 매우 진지하고 깊이 있게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써야 한다.

 

 

다섯 개의 담화로 이루어진 마태오 복음

 

복음서들을 읽을 때 계속되는 많은 에피소드를 연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놀라게 된다. 그렇듯 생생하게 피부에 닿는 사건들은 실제로 쓰여진 대로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전체로 간주되는, 네 복음서 가운데 하나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자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순서대로 한데 모아질 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구분들을 설명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들은 이야기된 사실들에 달려 있다. 다른 경우에는 지리학적 자료들이 기준으로 채택된다. 그것은 성인전 작가로 하여금 다른 장소에서의 예수의 현존을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를 구분하도록 한다. 따라서 갈릴래아 시기와 유다 시기를 나눈다. 오늘날의 해석학은 오히려 성서 각 권의 문학 유형에 관심을 갖고 아마도 저자 자신이 자료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영향을 받았을 기준을 따로따로 고려하려고 애쓴다. 그런 경우에 주요 관심은 문학 구조와 눈에 띄는 문구에 돌려진다.

 

그러한 평가에는 특히 마태오 복음이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복음서 저자가 예수의 말씀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이 강한 인상을 준다. 다른 저자들보다도 더 그는 스승의 경구(警句)와 주장을 기억한다. 그의 묘사에선 다른 저자들에게서보다도 더 예수께서 공들이신 담화들이 두드러진다. 그가 이러한 담화들에 아주 특별하게 주의를 환기한다는 것은 복음서 안에서 후렴의 방식으로 다섯 차례 반복되는 마지막 문구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산상 담화인 첫번째 설교 - 3개의 장을 차지한다(마태 5-7장) - 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마태 7,28)라는 말로 끝난다. 사도들이 선교사로 지명되는(마태 10,5-42) 선교 담화 뒤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분부하시고 나서”(마태 11,1)라는 거의 같은 결론이 나온다. 매혹적인 비유의 담화(마태 13장)는 마태오에 의해 “예수께서 이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마태 13,53)라고 끝난다. 사도들에게 두 번째로 따로 돌려진 네 번째 담화(마태 18장) 뒤에 또다시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마태 19,1)라는 말이 따라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믿지 못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가장 긴 담화 뒤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모두 마치시고”(마태 26,1)라는 후렴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마지막 문구는 연설자로서의 예수의 현현(顯現)에 마지막을 장식한다. 곧바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와 함께 슬픈 에필로그가 뒤따른다.

 

다섯 차례 반복된 이러한 짜임새로 복음서 저자는 그의 작품 구조, 즉 그 주위에 사건들을 자리잡는 다섯 개의 핵심을 부각시킨다. 첫 번째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는 빼어난 선생이시다. 그것은 새로운 왕국과 새로운 법에 대한 장엄한 선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새로운 왕국에 대한 탐구와 전파를 기억시킨다. 여기에서 12명을 지명하고 사명을 부여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그들은 사도라는 이름을 받는다. 한편 예수의 현현의 성과는 예수에게 간계를 꾸미고 백성들을 그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얘쓰는 - 이것이 그들의 성공이다 -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마태 12장).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백성들에게 단지 비유로만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중에 사도들에게 따로 설명된다. 그것은 예수의 공생활에서 변화를 나타낸다. 그분은 사도들에게서 따로 떨어지고, 그들은 끝에서 두 번째 담화에서 예수가 그의 작은 무리에 대해 지니고 계신 계획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마지막 담화에서 그들은 히브리 백성과 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의향을 이해한다.

 

다섯 개의 담화를 통하여 마태오는 예수의 공생활에서 상승하고 하강하는 하나의 노선을 드러낸다. 하강하는 노선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성공을 나타내고,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담화에서 반복되는 여덟 번의 “비난” - 첫 번째 담화의 여덟 번의 축복과 대립된다. - 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에게 돌려진다.

 

비록 예수의 생애가 실제로 상승과 그 뒤 그분의 죽음으로 하강했다 하더라도 다섯 개의 담화의 전반적 구조와 각 담화의 고유한 구조는 복음서 저자가 예수께 대한 현대적인 의미의 전기와 심지어 아름답고 순서대로 된 사실과 사건들에 대한 전망을 주고자 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승의 교리에 대한 평론과 개요를 주고자 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새로운 스승 그리스도

 

마태오 복음이 다섯 개의 담화의 복음서라고 불릴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복음서의 주인공인 그리스도께서 연설자로 나타나신다는 점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미 암시했듯이, 각 복음서 저자는 기쁜 소식에 대한 기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개인적인 고유한 시각을 부각시켰다. 루가는 예수를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온 은인으로, 그리고 사방으로 가서 육체와 영혼을 고쳐 주는 분으로 본다. 반면에 마태오는 그분을 우선적으로 스승으로, 직업적인 “라삐”로 드러낸다.

 

예수의 주위에 모여든 첫 번째 큰 무리의 백성에게 마태오는 산 위에 앉아 계신 스승을 소개한다. 그분 가까이에는 신뢰의 정상이 있고, 저 아래 경사진 곳에 그리고 호수가까지 온 갈릴래아에서 온 수많은 청중들이 있다. 참된 스승으로서 예수께서는 앉아서 가르치신다. 그분의 설교단은 갈릴래아 산악 지역의 최정상 가운데 하나다.

 

생애의 마지막에 그분이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 그리고 마지못해 하는 예루살렘에 대해 마지막 담화를 선포하실 때, 새로이 산 위에, 올리브 산 위에 앉아 계신다(마태 24,3). 그 발치에는 성전의 위엄 있는 건물과 함께 거룩한 도시가 내려다 보인다.

 

모든 “라삐”는 작은 신자 집단을 자기 주위에 모으는 데 익숙해 있었다. 스승의 마음속에 다른 이들보다 더 침투해 있는 자들은 받아들인 교리를 간직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양성되었다. 따라서 “산상 담화” 중에 제자들 집단이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담화에서 그들은 예루살렘과 세상에 대한 스승의 주장에 말없는 증인이 된다. 오로지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담화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장차의 성공과 박해의 날에 필요한 인내를 대비시킨다. 비유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담화 뒤에 예수는 “집 안에서”(마태 13,36) - 아마도 마태오 자신의 집이리라 - 당신의 제자들에게 배타적으로 그들에게 지정된 설명을 해주신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마태 13,11).

 

예수의 모습에 대한 이 중요한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마태오의 본문(23,8)이 그리스도에 관한 마태오 자신의 시각을 요약한 것으로 이해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이 유일한 스승, 새로운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스승을 구약의 다른 위대한 스승인 모세 앞에 자리잡는 모험을 시도해 본 것일까? 마태오는 아마도 이런 비교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구약의 율법은 모세의 이름으로 된 다섯 권의 책에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왕국의 법은 예수의 다섯 개의 담화 속에 마태오에 의해 요약된다.

 

“산상의 담화”에서, 놀라운 강조와 함께 새로운 교리가 옛법에 대치된다. “옛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2l.27.31.33.38.43)는 표현에 곧 이어 실제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다른 표현을 마주치게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정식은 옛법을 폐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키고, 거기에 더욱 깊은 내용, 더욱 내면화된 실천을 주고자 한다. “나는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모세의 업적에 새로운 법률상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향은 아니었다. 그분은 오히려 율법을 해결하고 있는 궤변에 대해 욕하였다.“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분의 새로운 법률에는 곧 바로 생생한 예가 뒤따른다. 그와 함께 설천을 위한 실제적인 규범이 제안된다. 새로운 왕국에서 쇄신된 삶, 그것이 바로 스승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담화 뒤에, 옛법과 대조하는 방식은 사라진다. 계속되는 담화에서 제자들은 사도적 규범을 받는다. 또한 여기서도 법률상의 색조는 나타나지 않고, 그들이 왕국 때문에 성공이든 낙담이든 심판받고 박해받아야 할 근간으로서의 실천적 규범이 나타난다. 비유의 담화에서 새로운 왕국의 가치와 성장은 화려한 언어로 묘사되는 반면에 마지막 심판에 관한 담화는 왕국의 완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첫 번째 복음서에서 새로운 왕국에 대해 언급된 것을 읽을 때 어디에서 우리가 이 왕국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그런데 우리는 왕국에 관한 바로 이 복음서가 그리고 그것만이 “교회”(마태 16,18; 18,17)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놀라운 발견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이 세상에서 스승의 새로운 왕국으로서 본다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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