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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44: 위태로운 동거 -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20 조회수4,46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44) 위태로운 동거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

 

 

유대인과 그리스인은 당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철저히 로마에 순명했지만, 유대인은 로마의 관용 아래서 독특한 자신들만의 신앙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진은 기도서를 정독하고 있는 유대인 랍비.

 

 

편견은 ‘어설픈 앎’에서 출발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조금 알 때, 그 작은 앎을 감추기 위해 자칫 완고해지기 쉽고, 그 결과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서기 1세기 로마와 유대인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강대한 로마가 유대인들을 억압적으로 통치했고, 그래서 나약하고 불쌍한 유대인들이 어쩔 수 없이 로마에 항거했다는 식의 인식이 그것이다. 틀렸다.

 

로마는 관대한 지배자였다. 가능한한 유대인들을 달래서 함께 살려고 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그들만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유대 공동체 안에서 사형 이 외의 법집행을 할 수 있도록 사법적 자치도 허용했다. 또한 다른 민족과 달리 병역을 비롯한 국가의 공직도 면제했다. 게다가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그리스 등 다른 민족들은 가질 수 없었던 특권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처음에는 로마와 별탈없이 잘 지냈다. ‘유대의 플라톤’이라 불렸던 당시 유대인 지식인 필로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땅과 바다는 로마 제국의 이름아래 조화로운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개인 규모든 제국 규모든 부에서도 권력에서도 번영의 기반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문을 열고 그 행복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왜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로마에 저항했을까. 그 원인은 유대인의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특별하다”“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신교가 주류를 이뤘던 고대 사회에서 일신교를 따랐던 유대 민족은 유별난 민족이었다. 그렇다 해도 유대인들이 산간벽지에 흩어져 사는 고립된 소수 부족이었다면 별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인구가 많았고 특히 금융업이나 장사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기에 도시에서 살았다. 재물은 도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오늘날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전 세계에 주요 도시에 퍼져 있었다. 문제는 이 큰 민족이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종교와 신앙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로마는 이러한 유대인의 일신교까지 끌어안는 관용을 보였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유대인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로마가 아니었다. 그리스인이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은 당시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이해가 대립되었다. 그리스인은 과거 유대인을 지배했지만 이제는 로마의 피지배자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는 입장이었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한군데 묶어 두면 사고가 생긴다. 이집트에서 기어코 일이 생겼다. 당시 이집트의 최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에는 40만 명의 유대인, 50만 명의 그리스인이 살고 있었다. 인구에서도 경제에서도, 정치에서도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민족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스인들은 철저히 로마에 순명했지만, 유대인은 로마의 관용 아래서 독특한 자신들만의 신앙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공언한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제물까지 바치며 쾌유를 빌었지만 신의 지위까지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유대인들을 모함할 좋은 기회였다. 다신교를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신 중에서 황제라는 신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곧바로 유대인들이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칼리굴라 황제를 핑계삼아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폭발시켰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유대인 소유의 배가 모두 불탔다. 유대인들의 거주지도 파괴됐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살해 됐다. 그리스인들은 유대교 예배당까지 칼리굴라 황제의 상(像)을 가지고 들어가 모독했다.

 

마찰을 중재해야할 이집트 장관도 그리스 편을 들고 나섰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인정해 주는 규정을 폐지했고, 유대인 거주지역을 제한했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공장들도 폐쇄되었고, 장사도 전면 금지됐다. 36명의 제사장이 그리스인들 앞에 끌려가 채찍질을 당하는 등 모욕을 당했다.

 

유대인들은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유대인 전체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 필로를 비롯한 대표단이 칼리굴라 황제를 면담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서기 38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황제를 만난 대표단은 “황제에게 충성하고 로마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저희 유대인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이에 칼리굴라 황제가 말했다.

 

“너희는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것만큼 악질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리석은 민족임은 확실하다. 내가 신의 본질을 상속한 것을 믿지 않는다니 말이다.”

 

칼리굴라는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마땅찮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존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리스파였던 알렉산드리아 장관을 해임하고 새로운 장관을 임명했다. 새 장관은 친 유대인 성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평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더 이상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횡포부리는 것을 금지했다.

 

한동안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마 황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장소는 알렉산드리아였다.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10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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