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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60: 학살2 - 광기에 사로잡힌 유대인 학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7 조회수6,72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60) 학살 II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유대인 학살

 

 

유럽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나치의 통제 아래 있었던 유대인은 약 900만 명이었다. 나치는 이들 가운데 600여만 명을 학살했다. 사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 내부.

 

 

독일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질주하는 기관차였다. 유대인 학대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어차피 독일 스스로가 파열시킨 브레이크였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죽을 때까지 일해야 했다. 당시 독일 점령지역에는 1634개의 집단 수용소와 900개의 강제 노동수용소가 있었는데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으로 죽어갔다.

 

‘강제 노동 수용소 = 죽음의 수용소’였다. 노동의 강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강제 노동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수용 이후 평균 수명이 3개월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사고나 자살, 체벌에 의한 죽음을 제외한 수치다.

 

1941년에는 이주 금지령도 내려졌다. 다행히 그전에 독일과 폴란드를 빠져나가 목숨을 구한 행운아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 1965),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1980),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 등 철학자들과 이론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28만여 명에 불과하다.

 

도망치지 못한 유대인들은 꼼짝없이 앉은 자리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광기(狂氣, insanity)였다. 독일은 이제 단순히 강제 노동을 통해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아예 민족 전체를 학살하는 작전에 나선 것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폴 존슨(Paul johnson)은 저서 「유대인의 역사」에서 “히틀러는 전쟁을 유대민족의 근절을 위한 면허장으로 간주했다”고 말했다.

 

학살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가 군인들에 의한 유대인 살인소탕작전이다. 유대인 말살만 전담으로 하는 부대가 별도로 창설됐다. 이 부대들은 전선에서 싸우지 않는 이상한 부대였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유대인 학살, 하나였다. 자료에 따라서 5개 부대였다는 기록도 있고, 10여 개 부대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부대들은 독일의 소련 침공과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소련 통치하에는 50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1941년 10월 중순에서 12월 초까지 이뤄졌던 첫 번째 유대인 소탕작전에서 이들 부대들은 3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이후에도 네 번 혹은 다섯 번에 걸쳐 더 이뤄진 이 작전을 통해 총 9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희생됐다.

 

이들은 잔혹했다. 심지어 한 명의 장교와 21명의 사병이 현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에서 1만 600명의 유대인을 사살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키예브(Kiev)에서는 2개 소대가 3만 명 이상을 죽였다.

 

하지만 가혹한 노동이나 총과 수류탄, 칼로 죽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독일은 더 빨리, 더 많이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별도의 대량 학살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나치 친위대는 일산화탄소와 청산가리로 만든 살충제 등 수많은 가스를 만들었고,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실험대상은 물론 전쟁 포로와 유대인들이었다. 그 결과 일산화탄소가 가장 유용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학살 수용소가 속속 건설됐다. 최초의 학살 수용소는 헬므노 였다. 이어 아우슈비츠, 벨제트, 마이다네크, 소비보르, 트레블랑카가 지어졌다. 이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순전히 학살을 위해 매일 6000명씩 유대인을 선발해 이동시키는 수용소행 열차가 운행됐다.

 

가스실은 ‘샤워실’로 불렸다. 유대인들이 샤워를 한다는 말을 듣고 가스실로 향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도착하면 독일인 의사들이 가스를 주입했다. 아우슈비츠에는 5개의 가스실이 있었다. 하루에 6만 명을 살해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만 그렇게 200만 명 이상 살해됐다.

 

이렇게 노동 수용소와 살인, 가스 등을 통해 죽은 사람이 모두 593만여 명이다. 당시 유럽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나치의 통제 아래 있었던 유대인은 약 886만여 명이었다. 나치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던, 죽일 수 있었던 유대인의 67%를 죽였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뻔히 보면서도 유럽 사회는 침묵했다. 가톨릭교회도 침묵했다.

 

당시 바티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다. 1943년 9월부터 1944년 6월까지 독일이 로마를 점령하는 기간 동안, 독일은 교황이 보는 앞에서 약 2000명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으로 실어갔다. 이들 중 10여 명만 제외하고 모두 살해됐다. 물론 교황이 바티칸에 477명의 유대인을 대피시키긴 했지만, 이는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였다.

 

반면 핀란드는 독일의 동맹국이었음에도 2000여 명의 지역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겨주지 않았다. 덴마크 또한 자국내 유대인 5000명을 모두 스웨덴으로 대피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폴란드 유대인의 90% 이상이 살해됐다. 벨기에선 6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4만 명이 죽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총파업까지 있었지만 70%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우크라이나,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노르웨이에서는 거주 유대인의 50% 이상이 죽었다. 그리스에서는 6만 유대인 중 5만4000명이 살해돼, 고대로부터 이어온 그리스 유대인 사회가 붕괴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2006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신과 인간에 대한 범죄입니다. 전례가 없는 대량학살 범죄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촛불을 켠다.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며 매일매일 공포에 떨었을 안네 프랑크와 그 가족들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다. 아우슈비츠에서 한줌의 재로 변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묵상하며 옷깃을 여민다. 살인소탕작전으로 스러져간 90만 유대인들을 위해 나 자신의 고통을 봉헌한다. 가스실 벽을 손톱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긁으며 죽어간 수백만의 이름 모를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16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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