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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묵상: 마태 5,43-6,15, 하느님의 사랑만이 기준입니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4 조회수3,431 추천수1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5,43-6,15, 하느님의 사랑만이 기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48)

 

원수가 누구일까요? 처음부터 “내가 원수다!” 하고 선언할 사람은 없기에 그 대상을 정의하는 것도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원수’는 나를 학대하고 못살게 구는 개인적인 어떤 사람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인 차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공동체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방인들과 늘 긴장관계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배려를 명령하시지만(레위 19,33; 신명 10,18.19) 실제 상황에서는 좀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절부터 이스라엘은 타민족으로부터 위협받고, 때로는 인접국가의 침략으로 나라의 존폐가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방인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부정적인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포에 대해서는 연대의식으로 더욱 결속되고 타민족에게는 배타적인 분위기가 더 커졌습니다.

 

따라서 ‘원수’라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동적으로 타민족을 떠올리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동족끼리는 끈끈한 이웃의 의미가 있고, 타민족에게는 원수라는 뜻이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것이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편 가르기 하지 말고 하느님 사랑으로 포용하고 잘해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의인이나 선인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공정성을 그 근거로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출발이 불완전하고 제한된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완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닮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여기에서 ‘완전하다’라는 단어는 철학 용어인 ‘완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텔로스’에서 나온 말인데, 결함이나 흠이 없고 갈린 것이 아닌 ‘온전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보편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한한 것이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을 바탕으로 한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가능한데 여기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에게도 가능하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자선과 봉사(마태 6,1-4)

 

이어서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자격으로 진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선자들’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오히 휘포크리타이’라고 하며, 무대에서 대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배우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배우는 자신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진실하게 살라는 의미인 것이죠. 특히 자선을 베풀 때에 겉꾸미거나 나팔을 불듯이 요란을 떨지 말고 겸손하고 조용하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남발하는 말 가운데 ‘봉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쓰이는 말이 ‘봉사자’입니다. 특히 교회 기관의 사회복지 계통에서 직업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이 칭호를 붙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대가가 있다면 엄밀하게 말해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성당에서 반주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큰 영광이고 자부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봉사의 정신에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우리 본당에 공석이 된 반주자를 구하려는데 무척 어려웠습니다. 자본주의의 영향일까요? 한창 고민하고 있는데 사목위원 몇 분이 유급 반주자를 구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멈칫했습니다. 전례에서까지 ‘봉사’라는 명목이 ‘유급’으로 된다면 그것은 우리 교회가 자본주의의 틀에 들어가겠다는 뜻도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신부들은 봉사라는 명목으로 신자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며 ‘유급봉사’를 권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갈등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하고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교회는 그 속에서 고민을 해야하나 봅니다.

 

 

올바른 기도(마태 6,5-8)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조심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자면 내적인 기도의 모습보다는 외적으로 흐르는 십자가를 더욱 생각나게 합니다.

 

미사 중에 “매일미사”에 있는 보편지향기도 기도문을 그대로 낭독하기에 전례부장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되지 않도록 본당 수준에 맞는 기도를 해주세요.” 하면 신자들은 난색을 표합니다. 성경 읽는 것을 등한시하는 것 같아 “매일미사” 책보다는 성경을 가져오라고 해도 이제는 습관이 깊게 들어서인지 요지부동이고, 본당에서 판매하지 않으면 다른 본당에서 사 오는 진풍경이 연출됩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미사를 철칙으로 삼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부부는 서두르면서 아이들에게 저녁을 자장면을 시켜 먹든지 라면을 끓여 먹든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미사 간다고 애들 정신 빼놓고, 또 따뜻한 밥도 아니고 인스턴트 식품을 주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천주교 신부님 맞으세요?” 하며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부부야 과시하기 위한 신심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만족’의 신앙이나 자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외형적 신심 같아서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미 고정된 모습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마태 6,9-15)

 

세상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용서할 권리나 능력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겠어요? ‘당신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연애시절의 마음은 어디 가고 몇 십 년 맺어왔던 관계를 끊고,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부부의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는 불화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등을 두드리며 “웬만하면 용서하고 이해하라구.”라는 멋진 말을 던질 수는 있어도 사실 나에게 상처를 준 이웃을 용서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청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더디 치유되는 상처가 남는 법입니다. 용서하고 유혹을 이기고 악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이웃을 용서하는 것, 유혹을 이기는 것, 악의 세력을 벗어나는 것, 이 모두가 사람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예가 맞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김치를 먹다가 옷에 흘리면 붉은 고춧물이 듭니다. 처음에는 그 얼룩을 지우는 방법을 몰라 비누로 열심히 빨아보지만 잘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어른들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냥 둬. 햇빛에 두면 자연히 없어져.”

 

인간이 용서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하고 그 해법을 찾지만 결국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잘못에 대하여 먼저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구약의 십계명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에 관한 것과 인간관계에서 연결되는 것들을 해결해 주시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식에 얽매인 빈말을 되풀이하거나 길게 꾸미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께 단순하고도 간절히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시기를 청하고 아울러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일의 양식을 구하며 용서와 유혹과 악의 세력에서 구해주시기를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기도는 우리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섭리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5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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