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강론에 대하여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서채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22 조회수1,980 추천수0 신고

찬미 예수님.

 

강론에 대한 저의 생각의 단편들을 열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언다어실(言多語失)이라고, 말 실수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1. 미사

신앙은 철저한 믿음과 따름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과 혼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하고, 말씀에 따라 의롭게 

살아가려 노력할 때 그분께서 함께 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미사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만나는 가장 거룩한 장소요, 시간입니다. 

미사 시간 내내 그분과 회중은 하나되어 그분께서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지려 하고,

그분께서 완전하시니 우리도 완전해지려 하는 간절함으로 미사의 매 순간을 맞아야 맞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니까요. 

태산을 쌓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도 완성되지 못한 것 입니다. 내 구원에 지금 

사소하게 흘려보낸 미사 시간 때문에 마지막 날에 구원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사의 무게는 그걸 측량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2. 미사의 두축

주지하다시피, 미사는 크게 말씀과 성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요도는 동일합니다. 미사 도중 주님의 영은 말씀 속에, 주례 사제의 영에, 성체에 임재해 

계시는 것 입니다. 

강론은 말씀의 한 부분으로서 그날의 말씀 즉 일용할 양식 중 메인 디쉬(main dlsh)에 대한 사제의 

생각이나 묵상 등을 신자들과 나누는(sharing) 것 입니다. 따라서 강론의 내용이 맞고 틀리고가 없습니다.

단지 사제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한 단면을 보여 주신 것 입니다.

말씀을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주님께는 목이 뻣뻣하고, 역겨운 짓인지도 모를 일 입니다. 대지는 여우(大智如愚)라고

하였습니다. 불가의 염화시중의 이심전심의 묘법을 헤아려 볼 일입니다. 창조주 절대자 주님 앞에 "나"는 아는 

것 없는 초라한 미물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제의 강론이 기폭제가 되어 엠마오의 두 제자들처럼 가슴이 뜨겁게 타 올라 볼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 알량한 믿음을 차라리 뱉아 버리고 싶다고도 하셨습니다. 

성령의 불꽃이 내 안에서 타오르는 것은 나 자신의 신앙심의 문제일 뿐, 그 누구도 대신하여 주지 못합니다. 

 

3. 성경의 맛

신자는 미사 전, 그날의 말씀들에 대해 미리 읽고, 묵상해 볼 일입니다. 기실 미사 중간에 독서자나 주례 사제가 

말씀을 선포할 때는 경청을 해야지, 매일 미사 책을 펼쳐들고 함께 읽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말씀을 들으며, 그날 주어지는 말씀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고 하나로 관통이 되는지, 주제가 무엇인지,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던지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나는 또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지 등을 생각하다 보면 미사 시간 일분 일초가

아깝고, 참으로 소중한 것이 됩니다. 미사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제3자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혹은 자기 관념대로 뭔가

가슴을 찌르는, 아니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함이나 기대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미사는 감동이나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미사에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희열을 느끼려면 우선 본인이 말씀에 맛들여 있어야 하는 것이 선결 요건 같습니다.

말씀의 깊이를 조금 더 쉽게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인터넷에서 'the word among us"를 구독하여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미사의 구성원들

주일 미사. 모든 봉사자들과 주례 사제는 오직 "나"를 위해 그날의 수고를 한다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 모든 이들이 수고하고, 짐지고 있는데 정작 나는 거기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면

보시기에 아름다운 신앙 여정의 반려자는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강론은 화려한 말씀의 잔치가 아닙니다. 엘리야는 조용한 바람결에 주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날 사제가 툭 던져 놓는 간단한 말씀 한 마디에서도 듣기에 따라, 사정에 따라 내 안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세리같은 죄인의 기도가 더 값지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해 볼 일입니다. 

주례 사제의 강론에서 뭔가를 얻기를 기대하지 말고, 미사 전체를 아울러 자신이 오늘 주님꼐 받아갈 은총을 더 많이

생각할 일 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어쩌면 마지막 미사일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많은 부를 축적해 놓고 나눔에 인색한 부자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너에게서 네 영혼이 떠난다" 하셨습니다. 

신앙은 이처럼 말씀과 주님의 무서운 줄을 아는 것을 "경외심"이라 합니다. 

동양의 성자 공자께서는 자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다 하셨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인 것

같습니다. 미사를 냉혹한 비판이 아닌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받아 들일 떄, 이제까지와는 달리 미사가

주는 풍성한 은총에 어쩌면 자신도 깜짝 놀랄지도 모를 일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느님이나 소위 천국 등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오히려 신앙을 버렸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존재하지 않는 다 할 수 없는 신비. 나의 존재를 감싸고 있는 그 신비를 통해 우린 절대자 주님을 

오늘 이렇게 흠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사는 이렇듯 소중하고, 귀한 것인데 한 눈 팔 새가 없습니다. 미사에 벌어지는 어떤 것에도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겸손한 마음. 나를 비우는 마음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태도"라고 한다면 저만의 억측이겠습니까?

성경의 마지막 "요한묵시록"의 말미에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오소서, 주님!(마라난타?)"

이 말씀 외에 주님께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화두 삼아 이 고약한 팬데믹이 끝나고, 주님 집 대문이 활짝 열리면, 기쁜 마음으로 주님 집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아멘"

 

위의 글은 극히 저 개인적인 생각들이니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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