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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3 조회수7,178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Erwägungen am Ostermontag)

 

 

사회학자들과 사회공학도들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경향들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1990년대 이래로 우리 사회는 ‘재미 사회’가 되었습니다. 소비에 따른 재미와 만족 추구를 가장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최신 경향

 

하지만 그사이, 같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놀랍게도 그 경향은 이미 정점을 지나 말하자면 ‘재미 사회의 종언’에 도달했거나 다다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최첨단 경향은 ‘건강’이라고 말합니다. 젊게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웰빙well being, 적절한 신체 감각, 적절한 자극, 자기 자신과의 내적 일치, 건강을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130년을 잘 살고 건강하게 죽는 것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주된 경향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문가들은 그에 따른 우리 미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는 어쩌면 풍자의 한 단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건강에 대한 관심이 그처럼 중요한 가치를 차지한 시대도 없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건강을 축원하는 인사를 받는지 모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핑크 신부님, 모든 일이 잘 되고,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지요.”

 

 

예수님에게는 무엇이 중요했나?

 

정말로 그럴까요? 정말로 건강이 최고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경향에는 뒤처지신 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쁘게 말하면, 그분은 삶의 계획을 잘못 세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는 결코 올라가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그분에게는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의중은, 당신의 건강을 신경 쓰고 당신 몸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현대사회의 경향을 따라 사셨다고 한번 가정해봅시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사셨다면, 이 세상은 한없이 가련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무 희망도 없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게 우리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나쁩니다.

 

첫 부활절에 예루살렘을 떠나 서쪽 엠마오라는 작은 마을로 가고 있던 두 제자는 본래 무슨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있었던 것일까요?(루카 24,13-35 참조) 그들이 이야기하던 바는 건강도, 직장 내 괴롭힘mobbing도, 최근의 스포츠 경기 결과들도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온갖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 하나의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들을 사로잡고, 들뜨게 하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그분에게 자신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분이 삶의 기쁨이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들에게 예수님이 일종의 ‘마약’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전혀 다릅니다. 도중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에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하느님 백성의 구원이 중요합니다. 온 세상의 구원이 먼저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구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먼저 하느님 백성이 본래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근본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우리에게도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교회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에 따라 살지 않고, 사회적 경향을 뒤쫓는 데에만 끝내 급급해한다면, 세상 역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 역시 건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호르몬 빵이나 사우나 성전으로는 분명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오랜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어느 날엔가는 기존의 오랜 질병들이 종식될지도 모릅니다. 말라리아, 결핵, 다발성 경화증, 관절통, 노인성 치매 같은 병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바라건대 뇌는 제외하고, 바꿀 수 있을지 모릅니다. 뇌는 해마다 업데이트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아마도 우리는 모두 실제로 130해를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옛 질병들 대신에 분명 새것들이 출현할 것입니다. 바이러스는 살아남습니다. 끊임없이 변이하며 새로운 숙주를 찾아냅니다. 어쩌면 그저 지루함과 좌절에서 오는 질병들이 곳곳에 만연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참으로 구원일까요?

 

 

놀라운 역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흥미를 일으키는 놀라운 역사와 만납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참된 구원의 역사입니다. 진부함과 지루함, 환상과 속임수, 폭력과 죄, 비참에서 구원받은 역사입니다. 그들이 온통 좌절했던 이유는, 그 역사가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다만 잠시 번쩍이고 끝난 희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이제 끝장난 것 같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비슷한 일이 닥칩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찬탄과 매혹, 열광적인 지지가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협조와 쇄신의 원대한 기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기획이 끝장납니다. 외견상의 실패와 좌절, “그 모든 게 다 옳았던 것일까?”라는 끔찍한 질문만이 남습니다. 결국은 수많은 이들의 체념으로 끝납니다. 어떻게든 엠마오 이야기가 원망스럽게도 현실이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슬픔이 우리 자신의 슬픔에서도 반복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엠마오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해 체험했던 일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희망차게 출발했던 역사와 작별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나자렛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자신들의 열망과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마음과 또 그렇게 내려놓지 못하는 희망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을 이제 부활하신 분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분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하지만 이 은총이 그들에게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도 그들의 열망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대한 복음에는 또 다른 진실도 숨어 있습니다. 곧 두 제자의 ‘열망’만이 여기서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구원을 갈망하며 온전히 다른 분을 찾으려는 우리의 열망도 함께 숨어 있습니다.

 

이 복음에서 그 두 제자가 부활하신 분과 ‘만나고’ 그분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분과의 이 식사를 우리도 모두 함께합니다. 성체성사 때마다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이때는 엠마오의 두 제자보다 우리가 못할 게 없습니다. 그들도 점차적으로 알아들었고, 그들도 먼저 믿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

 

결정적인 것은, 그들은 그 순간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로, 사도들 주변에 함께 모여 있던 다른 이들에게로 돌아갑니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가 이제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젊은 공동체로 합류합니다. 이것이 바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의 최종 의미이자 결론이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부활절은 돌아감, 곧 회심으로 이끕니다. 회심이 없다면, 아직 부활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회심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외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회심은 교회가 늘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곳, 공동체가 모든 좌절과 모든 희망 상실에 맞서 다시 태어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부활절의 회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것을 위해 수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례없이 가장 위대하고도 가장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그러한 회심은 건강까지도 선물로 줍니다. 물론 이는 매번 무조건 육체의 건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치유와 해방을 줍니다. 질병으로 앓고 있으면서도 치유와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질병, 심지어 구원받은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부활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봄의 축제가 아니라 우리 구원의 축제로 경축하기 때문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신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로핑크 신부님은 책 집필 외에 유일하게 『생활성서』 독자들에게 매월 글을 보내며 한국 신자들과의 소통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20년 4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저, 김혁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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