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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민수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11 조회수2,308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민수기 

 

 

사제들을 통한 하느님의 축복

 

민수기는 히브리 말로 ‘광야에’를 뜻하는 ‘버미드바르’인데, 그리스 말 역자들은 이 책을 그 첫머리에서 인구 조사를 다룬다는 이유로 ‘수(數)들’이라 칭하였고,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민수기’(民數記)라 부르고 있습니다. ‘광야에’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민수기의 배경은 광야인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는 중에 거듭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이끌어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민수기가 그리고 있는 거룩한 백성, 곧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통치되는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광야의 여정에서 하느님에 대한 경신례에 헌신하는 백성으로 거듭나는 백성입니다. 이 여정 중에 친히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화려한 성전에 계시지 않고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은 천막 안에 거처하십니다. 이는 그분의 현존은 어떤 성전에 국한되지 않고 백성 한가운데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백성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니 죄인들의 공동체가 늘 징벌의 위험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가운데 사제와 레위인들의 제도가 나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들처럼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진노를 쏟아내게 하는 원인이 되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를 얻어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 사제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어야 한다고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민수기 6장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특별히 서원하는 ‘나지르인’에 관한 법을, 이어 후반부에서는 ‘사제의 축복’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는 하느님의 말씀을 덧붙여 끝맺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사람이고, 사제가 그렇게 축복의 기도를 하면 당신께서는 축복하시리라는 말씀이지요.

 

“준성사의 거행은 세례로 받은 보편 사제직에 속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이 ‘복’이 되어야 하며 남을 축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집전할 수 있는 축복 예식들도 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669항] 하느님의 축복은 사제들만이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 사이에서도, 특히 가족 안에서도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약속의 땅을 두고 생겨난 갈등

 

가나안 땅에 가까이 이르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들을 보내 당신이 주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라 분부하셨습니다. “그 땅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그곳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 살펴보아라.”(민수 13,18-20) 그리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들이 40일에 걸쳐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와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체로 되어 있습니다.”(민수 13,27-28) 그들의 보고가 어떠했나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과연 좋았다는 것, 하지만 그 땅엔 힘센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그대로 보고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중립적인 사실의 보고 이후, 그럼 이제 그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견으로 돌아섰습니다. 앞의 보고에 덧붙여 유다 지파의 칼렙은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민수 13,30) 하면서 긍정적으로 말한 반면,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다른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민수 13,31) 하면서 정찰하고 온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지요. 심지어 그들은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민수 13,32-33) 하면서 온갖 과장으로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라고는 조금도 없는, 온갖 부정적인 소문에만 흔들렸던 백성에 의해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데, 희망적인 의견은 목숨의 위험 앞에서 멀리하고, 안정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의견에 대부분의 사람이 동조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종살이에서 놀라운 기적으로 자신들을 구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망각하고, 그 종살이가 차라리 좋았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죽음의 위험과 다가올 모험과 어려움 앞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보다 차라리 배부른 돼지가 좋겠다고 한 셈이지요.

 

 

하느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재

 

이러한 백성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게 될 하느님의 징벌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자세로 보입니다. 그러자 칼렙이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저 땅은 정말 무척이나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걷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수 14,7-9)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약속하신 복된 땅이 저 앞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거역하지만 않으면 된다!” 칼렙은 하느님의 예언자처럼 메시지를 전했지만 온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세와 아론에게까지 돌을 던져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언제까지 나를 업신여길 것인가?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일으킨 그 모든 표징을 보고도, 이자들은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을 것인가? 내가 이제 이들을 흑사병으로 치고 쫓아내 버린 다음, 너를 이들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으로 만들겠다.”(민수 14,11-1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모세에게서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이러한 말씀에 전혀 흔들림이 없이 백성을 위해 하느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이 백성을 사람 하나 죽이듯 죽여 버리시면,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은 민족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저 백성에게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능력이 없어서, 그들을 광야에서 몰살시켜 버렸다.’ 그러니 주님,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발 당신의 힘을 크게 펼치시기 바랍니다. … 이집트에서 여기에 올 때까지 이 백성을 용서하셨듯이, 이제 당신의 그 크신 자애에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민수 14,15-19) 모세는 백성들을 약속의 땅까지 이끌어가는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의무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으시고 백성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는 계속 잘못을 범한 사람들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저 땅을 정찰한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민수 14,34) 하느님께서는 (공동체 전체에 대해) 용서를 베푸시더라도,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에 대해 보상해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일찍이 하느님께서 자신 앞을 지나가시며 선포하신 말씀(탈출 34,6-7)을 다시 반복하는 고백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민수 14,18) 민수기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주님의 벌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외면해 버린 이와 더 이상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내려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너희가 주님 뒤를 따르지 않고 돌아선 탓으로,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민수 14,43) 주님과 함께 하면 승리와 축복과 구원이 있을 것이지만,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패배와 벌과 파멸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화를 탐하지 않고 백성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구약의 모세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치욕과 수난을 마다하지 않고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죽기까지 충실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힘쓰신 그분의 투신에 감사의 응답을 드립시다!

 

모세의 중재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려던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를 베푸셨지만 잘못을 범한 백성이 받아야 할 벌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보속과 잠벌에 대한 교회의 교리를 상기시킵니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 주지는 못한다.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부른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59항)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맺는 친교를 회복하면 죄의 영벌은 면제되지만 잠벌은 남아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73항)

 

죄에 대한 용서로 남아 있게 되는 ‘잠벌’(暫罰)을 갚는 것이 보속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속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갖가지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이 견디고, 때가 되면 죽음을 차분한 마음으로 맞음으로써 죄의 잠벌들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자선의 행위와 더불어 기도와 여러 속죄 행위로 ‘묵은 인간’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갈아입도록 힘써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73항) 즉 우리가 삶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잘 견디어내는 것, 죽음을 잘 준비하고 맞는 것, 사랑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 기도하는 것, 속죄하는 모든 행위가 잠벌을 갚는 보속이 됩니다.

 

내 자신이 행하는 보속이 부족하면 어떻게 될까요? 고맙게도 우리 교회는 보속하는 신자를 도와주기 위해 은혜로운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벌을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에게 하느님 앞에서 면제해 주는 ‘대사’(大赦)가 그것입니다. 대사의 기회를 고맙게 받아들이십시오!

 

 

구리 뱀 이야기

 

민수기 21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모세에게 또다시 불평하는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시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다시금 간청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민수 21,8) 그러자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 과연 뱀에게 물렸지만 모세가 매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에게 물린 백성들에게 왜 다시 뱀의 형상을 쳐다보라고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에게 뱀은 영생을 상징하는 존재였으니 살기 위해 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당위성을 갖춘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뱀이라면 쳐다보는 것부터 끔찍한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요.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뱀처럼 생긴 것을 쳐다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다시 쳐다보는 행위는,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구리 뱀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베푸셨음을 상징하는 이야기 아닐까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죄인이 받아야 할 극형의 상징이었지만, 그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달리셨던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지는 사람에게 구원은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 위에 달리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구원을 향해 나아갑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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