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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마태오 복음서 20장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3-07 조회수2,265 추천수0 신고

참고하세요.

 

 

성경 바로알기  20.09.29 06:51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마태복음 20:1-19)

1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5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도중에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 18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 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19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 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십자가로 결론이 난다는 것을 아세요? 십자가로 결론이 나고 있죠?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 앞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 또 마태복음 19장! 이런 것들이 이렇게 내러티브로 연결이 되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잘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설명하시는데, 하느님나라! ‘천국은 주인과 같다.’ 그래요. 천국은 주인이다! 천국은 어떤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는 그런 말예요. 영생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이야기를 좀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은, 예수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 안에 ‘아가페’가 담겨 있었단 말예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게 ‘이는 내 아가페의 내 아들이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아가페가 아들 안에 들어가 있었던 거예요. 그 하느님의 아가페, 마음, 뜻을 아는 게 아들을 아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주인의 마음을 아는 이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라는 그런 말이에요. 천국은, 예수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그걸 누리고 찬송하는 상태란 말이에요. ‘아! 이런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거야? 이런 분이 나를 품어 안고 있는 거야? 절대 안 놓는단 말이야?’ 이렇게요.

 

그러면 그 주인이 어떤 주인인지 알아보자고요. 그래야 천국을 알고, 영생을 알고, 구원이 뭔지 알거 아녜요? 그 주인은, 자기의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내기 위해, 일을 시키기 위해라고 쓰여 있지 않아요.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라고 이야기를 해요.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나가는 그런 주인이에요. 천국이 나가는 거예요. 사람들을 찾아내러 가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 안으로, 포도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여러분이 죽어서 가는 어떤 공간적인, 장소적인 그런 곳이 아니라, 천국은 여러분에게 침노(侵擄)해 들어오는 거예요. 천국은 누구? 예수란 말예요. 예수가 어떻게 우리에게 침노해 들어오는지, 그걸 배우는 거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주인이 무엇을 하러 이른 아침에 나갔는지를 잘 보세요. ‘포도원에 품꾼들을 들여보내기 위해’라고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단순히 일을 시켜먹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念頭)에 두어야 된다 말예요.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을 부르러 나가요. 그 주인은 천국이에요. 지금 사람을 부르러 나가는 거예요. 천국이!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른 아침, 즉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새벽 6시였어요. 그걸 히브리 사람들은 0시라 그래요. 우리 시간과 6시간 차이가 나는 거예요. 새벽 6시에, 하루의 먹거리를 위해,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찾아가서, 포도원 주인이, 자비를, 한 데나리온을 선물로 주는 거예요.

 

고대 시대 때 사람들은, 잘 사는 중산층이 두 끼를 먹었고, 대부분이 한 끼 정도를 먹었어요. 우리도 세 끼 먹은 지가 얼마 안 돼요. 그래서 점심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없는 거예요. 점심은, 나중에 우리가 세 끼 정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중국에서 빌려다 쓴 거란 말예요. 그래서 아침, 저녁은 우리말인데, 점심만 중국말이에요. 그만큼 살기가 힘들었단 말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연명하는 그런 삶을 살았어요.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만일 하루 일을 공치면, 온 가족이 굶게 되는 거예요. 그게 품꾼의 삶이거든요. 종의 삶이에요. 그것이! 따라서 일을 구하기 위해 나와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인의 부름을 받는 일은 정말 절박한 거죠. 그게 생명이란 말이에요. 부름을 받아야 사는 거예요.

주인이 당시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요. 그들은 쾌재를 부르면서 포도원으로 들어갔겠죠? 이제 가족들이 굶지 않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주인의 자비로, 자기들이 산거예요. 그들에게 있어서 한 데나리온은 생명이에요. 그걸로 먹거리를 살 수 있는 거니까! 생명이란 말예요. 한 데나리온은! 주인이 지금 그들에게, 죽어야 할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있는 그런 형국인 거예요.

 

주인이 3시에 또 나갑니다. 왜죠? ‘일 시키려고’가 아녜요.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예요. 거기에 보면, 일꾼이 더 필요해서라 이야기하지 않고, ‘가다보니 노는 이들이 있어서’예요. 일손이 더 필요해서가 아니라니까요. ㅏ비가 필요한 자를 천국이 찾아다니는 거요. 주인이 찾아가는 거예요. 주인의 목적은, 굶어 죽어야 하는 자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서, 그들이 음식을 살 수 있는,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함이에요. 죽을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3시는,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예요. 이미 세 시간 넘게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시간이나 지난 후에, 또 다른 품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가는 거요. 그들도 역시 쾌재를 불렀겠죠? 그들도 그 한 데나리온이 생명이거든요. ‘아, 이제 우리는 살았어. 난 굶지 않아도 돼! 이제 양식을 살 수 있어!’ 세 시간 전에 포도원에 들어갔던 이들에게 부어졌던, 동일한 은혜가 부어지는 거예요.

 

주인이 6시와 9시에도 나왔고, 11시에도 나와서 품꾼을 불러왔다 그래요. 11시는 저녁 5시예요. 여섯 시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죠. 7절에 보면 품꾼들이 놀고 있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건 재미있게 장난하면서 놀았다는 뜻이 아니라, 허탈하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그냥 허망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주인이 ‘왜 놀고 있어?’ 그랬더니, ‘아무도 우리를 불러가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자들이었다는 뜻이에요.

 

홈 디포 앞에 가면 수많은 멕시칸들이, 그냥 누가 나를 불러서 일 안 시켜주나? 우글우글하죠. 그런데 대낮에 가보면, 비리비리하거나, 술 취한 사람들만 남아 있죠? 쓸모없는 자들! 뭔가 기술이 있거나, 기운이 좋거나 이런 사람들은 다 뽑아 간다 말예요. 그런데 저녁 5시가 되었는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주인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닌 거예요.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렇게 쓸모없는 자들을 불러가는 건, 효율성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거란 말예요. 일손이 필요한 게 아니란 말예요. 그들을 살려내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11시에 가서 그들을 불러내요. 그리고는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들에게도 역시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이 약속이 돼요. 그들은 정말 횡재한 거죠. ‘이제 다 틀렸다’고, ‘이제 나는 굶을 수밖에 없다’고, 빈손으로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너, 이리와! 내가 너와 네 가족의 생명! 한 데나리온 줄게!’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한 시간 밍기적 거렸더니 그걸 주는 거예요. 진짜로! 누가 가장 주인에게 감사했을까요? 요 사람들이에요. 쓸모없는 요 사람들!

 

이렇게 아침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6시에 온 사람, 9시에 온 사람, 11시에 온 사람, 모두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행복하게 일을 했어요. 그렇죠? 이른 아침에 온 사람도 행복하게 일을 했어요. 왜? 그게 하루의 일당이었거든요. 그게 가족들을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아니면 자기는 하루 종일 공칠 뻔 했는데, 불러줬으니까. 행복하게 일을 했어요. 9시에 온 사람 마찬가지, 6시에 온 사람 마찬가지예요. 11시에 온 사람! 더 행복했죠? 이 사람은요! ‘어! 이게 웬 떡이야?’ 한 시간만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준다니, 다 행복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임금을 계산할 때 발생합니다. 주인이 11시에 온 사람부터 임금을 주는데, 애초에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된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었어요. 그건 그가 그 가족들이 생명의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므로 모두에게 흡족하고, 합당한 임금이에요. 그거면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11시에 와서 1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거예요. 그걸 보자, 그보다 먼저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이, 우매한 기대를 하기 시작해요. 갑자기 행복이 깨지기 시작하는 거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자격 없는 자기들의 처음 자리, 주인이 불러 주지 않았으면 굶는 거예요. 불러줘서 행복하게 일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처음 자리를 잊어버려요. 내가 무얼 했는가, 얼마만큼 일을 했는가를 계산하면서 부터, 그게 깨져요. 내가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죠? 처음에는 자기들의 일용 할 양식을 마련할 수 있게 해 준 주인이, 그저 고맙기만 했어요. 그런데 자신이 한 일의 양과 다른 사람의 것을 비교하면서 부터, 은혜가 망각되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요. 내가 더 많이 일했고, 많이 일 한 거는 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가치로 환산되 거든요.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인데, 왜 쟤랑 나를 차등 있게 대우 안 해주느냐는 거요. 왜 나에게 상을 안 주느냐는 거예요. 나에게! 왜 똑같이 고용한 은혜로만 대하느냐는 거예요.

 

이런 거예요. 부름을 입은 자는 많은데, 택함을 입은 자가 별로 없는 거예요. 불러들이기는 했는데, 그 은혜를 진짜 이해하는 자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걸 지금 설명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자기는 더 많이 일했고, 더 열심히 일했으므로 상을 더 달라는 거요. 이게 율법주의 아래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이죠. 실존이란 말입니다.

 

그 때 주인이 뭐라 그래요? ‘왜 불평하니? 애초에 내가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고 너희를 데려오지 않았니? 그래서 그렇게 주고 있는데 왜 불평해? 다른 이들이 나의 은혜를 받는 게 그렇게도 배가 아프냐?’ 바리새인들이 그랬죠? ‘저 세리와 창녀들이 우리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나는 그런 천국 안가.’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게 배가 아픈 거예요. 왜? 나는 뭐 했거든요. 근사하게. 난 치장을 해놓았는데, 왜 어디서 되지도 않은, 11시에 와서 한 시간 민기적 거린 자를, 왜 나와 동일하게 취급하느냐는 거죠. 이들이 은혜를 못 받아들인다 말입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게 돼요.

 

주인이 그러는 거요. ‘그게 그렇게 배가 아파? 그렇다면 만일 내가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면, 너희는 어떻게 됐을까? 너희들도 죽는 거야.’ 제가 조금 의역을 했습니다만 주인이 이 얘기하신 거예요. ‘내가 너희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루 종일 굶는 거예요. 그걸 아는 자들은, 누가 한 시간을 일하고, 무얼 받든 관심이 없어요. 나는 살았어요. 하느님의 은혜로! 주인의 은혜로! 그것만 찬송하는 건데, 율법주의 안에 갇혀서, 내 것을 계산하고, 나의 됨됨이나 성숙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차등이 생기고, 차등상급론을 주장하게 되어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성도는 효용(效用) 가치나, 자격(資格)이나, 능력을 가지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어요. 모든 인간이 다,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로 태어난다니까요. 다 죽은 거요. 그건요. 그들 각자의 외양(外樣)과 스펙이 다 달라요. 소유하고 있는 포지션(possession), 스펙, 외양이 다 다르단 말예요. 그래도 다 죽은 거예요. 그냥 다 놔두면, 죽음의 못으로 들어갈 이들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었고, 하느님의 원수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생명책에 적힌 명단(名單)을 받아들고,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그리고는 그들의 외양과 스펙과 상관없이, 그 생명책에 적혀 있는 자들의 이름을 불러서, 당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으신 게, 구원이라 말이에요. 그러한 예수님의 품 안에서 누가 더 성숙하고, 누가 더 덜 성숙하며, 누가 더 헌신(獻身)했고, 누가 더 착한 모양으로 살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게 중요하다고 우긴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일찍 와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온 자들을 시기(猜忌)하고 질투(嫉妬)하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주의는, 반드시 인간의 행함과 공로와 업적을 계산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계산이 되기 시작하면, 인본주의적 공평(公平)을 생각하게 되고, 그 인본주의적 공평에 의해서 차등 있는 상급을 주장하게 돼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리켜서, ‘너희는 천국 못 들어간다.’ 그래요.

 

(마태복음 20:16)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첫째가 된 자가 누구예요? 자기들이 일을 많이 했으니까, 차등 있는 보상을 해 달라고 우겼던, 일찍 온 자들이에요. 누구죠?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왔으니까, 우리가 선민이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해서,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단식하고, 이렇게 사는데, 저 세리와 창녀들이 우리와 같은 대접을 받아? 그건 안 돼!’ 그래서 그들을 공정(公正)하게 대우하겠다는 예수를 죽여 버린 거거든요. 일찍 온 자들이요! 율법주의예요. 인본주의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인정할 수 없어요. 왜?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공평하게 거저 주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자기들은 자격을 쌓았다고 착각하고 있단 말예요. ‘나는 자격이 있는데, 왜 자격 없는 자와 공평하게 대접하느냐’는 거예요. 많이 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은혜가 감사거리가 되지 않아요.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이루어낸 업적들을, 그 소유(possession)를 계산하는 순간, 은혜가 감사거리가 되지 않아요. 그들이 꼴찌가 된다. 그러죠? 꼴찌가 된다는 건 일등, 이등의 차서를 바꾸겠다는 뜻이 아니라, 꼴찌!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그들은 끝장이다.

 

그러면 꼴찌가 된 자들은 누구예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누구도 품꾼으로 데려가지 않은, 불가능하고, 무기력한 자! 세리와 창녀 같은 그런 부류겠죠? 그들은 벌써 지옥이에요. 세상에서도 인정 못 받고, 여기서도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살아요. 이미 지옥이죠? 꼴찌 된 자예요. 

들을 부를 때, 하느님이 찬송을 받으신다 말예요. 그들이 첫째가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주인이 은혜와 자비로 덮어서, 그렇게 무기력하고, 불가능하고, 쓸모없는 자들을 포도원을 불러들여서, 한 데나리온, 생명을 주는 거예요. 그들은 면목(面目)이 없어요. 고개도 못 들죠. 고맙고 고마워서, 고개도 못 들어요. 그걸 성도(聖徒)라 그래요. 거기가 하느님나라인 거예요.

자기들은 한 데나리온 받을 자격이 없어요. 누가 봐도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주인을 사랑할 수 있어요. 자기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인간의 처음 자리가 거기란 말예요. 그런데 아닌 척하고 사는 거거든요. 성도는 그 처음자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서! ‘난 아무 쓸모없는 자였구나. 한 시간 밍기적 거리다가, 한 데나리온을 받은, 그런 면목 없는 자구나!’ 이걸 알게 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원하는 건, 주인이 누군지를 알라는 거예요. 주인의 자비와 주인의 사랑과, 주인의 배려와, 주인의 그 능력을 알라는 거예요. 그걸 아는 자들이, 그 주인과 그 어디에 있든 안전함과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이런 존재임에도 나를 이토록 사랑해주신 그 분! 그리고 그렇게 큰 능력이 있는 그 분! 포도원을 갖고 있는 재력 있는 분! 그 분이 내 편이다.’ 그러니까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가 다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과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게 영생이며, 천국인 거예요. 우리는 그걸 알자는 거예요.

 

여기에서 뭘 하자. 그래서 스펙을 쌓고, 훌륭한 됨됨이를 갖추어, 바리새인이 되자. 여러분 그거 개혁주의 아녜요. 개혁주의는 원래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말씀과 믿음과 성경으로 돌아가자!’예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솔라 피데(Sola Fide), 솔라 그라시아(Sola Gratia). 은혜, 믿음, 말씀으로만 돌아가자! 이게 개혁주의잖아요? 지금 그러냐고요. 우리는! 은혜, 믿음, 말씀으로 돌아가자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품꾼을 부르는 주인이다’라고 이야기한 거요. 그 주인을 알라는 거예요. 그 주인을 아는 게 영생이고요. 그 주인의 마음,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하느님과 연합이 되어, 아들이 되는 거요. 하느님과 연합이 되어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건, ‘행위doing’의 문제가 아녜요. ‘존재being’의 문제인 거예요. 무엇을 했느냐를 근거 삼아서, 구원해서, 무엇을 시키려고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전혀 쓸모없고 무기력한 자, 이게 혼돈과 공허, 죽은 흙이잖아요? 그들을 ‘있음’이라는 존재! ‘being!’ 존재를 바꿔버리는 거예요. 굶어 죽어야 할 각양(各樣)의 인간들을, 포도원으로 그냥 불러들이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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