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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시리아 참고자료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22 조회수1,835 추천수0 신고

 

 

요약 아시리아의 영토는 이라크 북부에서부터 남쪽으로 티그리스 강과 소자브 강의 합류점 부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티그리스 강 중·상류와 그 지류의 유역을 중심으로 역3각형을 이루었다. 동쪽으로 비옥한 골짜기가 있어서 농경에 적합했다.
BC 1000년대의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아시리아는 필레세르 3세 이후 6명의 왕이 통치한 약 140년 동안에 걸쳐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지중해에 이르러 이란·소아시아·아르메니아·이집트의 일부를 포함하는 세계제국을 실현했다. 아시리아는 BC 609년 멸망하였고 뒤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대리석 등의 석재 외에는 자원이 빈약해 일찍부터 원거리무역이 발달했다. 아시리아 문화는 바빌로니아 문화에서 영향받은 것이 많지만 아시리아의 민족적 전통의 유지·발현의 측면도 발견된다.

아시리아
아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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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아시리아의 영토는 이라크 북부 북위 37° 부근에서부터 남쪽으로 티그리스 강과 소자브 강의 합류점 부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광막한 평야로 연결되는 티그리스 강 중·상류와 그 지류의 유역을 중심으로 역3각형을 이루었다.

동쪽으로 비옥한 골짜기가 있어서 농경에 적합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초기

북부인 샤니다르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이 발견되어 구석기시대 이래 인류가 거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정주농경생활도 남부의 바빌로니아 지방보다 일러 BC 6000년대에는 관개에 의해 형성된 촌락이 출현했다. BC 5000년대에는 하스나·하라파·사마라의 세 문화권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BC 3000년대에는 교착어를 사용했으며 균질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후르리(후리)인과 혈연관계가 있는 정착원주민 수바르인 외에 동셈계 유목민이 가세했다. 이때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발전을 선도했던 수메르 문화의 영향하에 도시 아슈르가 건설되었다.

아카드 왕국시대에는 사르곤 왕들에 의해 정복되어 마니수투시 왕이 니네베에 신전을 세웠다. 아카드 미술의 걸작인 사르곤 왕을 그린 청동 두상도 니네베에서 출토되었다. 수메르의 우르 제3왕조 직전 아시리아에서 처음으로 아카드어로 씌어진 기록이 있고 우르 제3왕조시대에는 아슈르가 총독소재지로 되었다.

당시 아시리아는 수메르어로 수비르, 아카드어로 스바르투라고 불렸다.

BC 2000년대

이때부터 아시리아에도 아무르인이 침입했지만 BC 2000년대초 무렵의 고대 아시리아 시대에 쓰인 아시리아어는 같은 아카드어 계열의 주요방언인 바빌로니아어와 전혀 달랐다.

주요도시로서는 아슈르 외에 니네베·우르비름(후의 알베라)이 있었다. 아시리아에는 대리석 등의 석재 외에는 자원이 빈약해 일찍부터 원거리무역이 발달했다. BC 19세기에 소아시아에 아시리아인의 상업식민지 카니슈와 하투사가 건설되었고 이 도시들이 중심도시 아슈르와 느슨하게 결합되어 활발한 교역활동을 행했다는 것이 3대에 걸친 식민지 상인의 기록에 의해 밝혀졌다.

아시리아를 처음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북방의 강국을 건설한 사람은 BC 19세기말에 나타난 아무르인 출신의 샤마시 아다드 1세(BC 1813~1781 재위)이다. 그는 마리를 정복하여 북메소포타미아의 거의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의 시대에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후 후르리인의 침입을 받고, 나아가 BC 15세기에는 미탄니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 시기에도 아슈르에서는 아시리아인의 왕조가 존속하고 왕명표가 이어졌다.

오랜 침체기 이후 BC 14세기 중엽 아슈르 우발리트 1세(BC 1365~1330 재위)가 등장해 히타이트 왕과 손잡고 BC 1350년 이후 미탄니를 공격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회복, 다시 부강한 왕국을 건설했다. 은 스바르투라고 불리던 아시리아를 '아슈르의 땅'이라 이름짓고 스스로 대왕이라 칭했으며 이집트와 대등한 관계에서 교섭하고 바빌로니아의 정치에도 개입했다.

후세의 아시리아인은 이 왕을 아시리아 제국의 진정한 건설자로 보고 있다.

이 왕의 사후에도 우수한 지배자가 왕위를 계승하고 6명의 왕이 158년 간에 걸쳐 통치하는 동안 국력이 발전해 이집트·바빌로니아·히타이트와 함께 강국이 되었다. BC 13세기말에는 투굴티니누르타 1세(BC 1244~1208 재위)하에 단기간 바빌론을 지배했다. 아시리아의 이같은 발전의 배후에는 아시리아의 토지 귀족이 공급하는 말이 끄는 전차대와 자유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보병이 있었고 아슈르의 부유한 시민과 신관들의 지원이 있었다.

BC 3000년 이래 아시리아 상업의 전통이 BC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강렬한 군국주의와 결합하여 신교역로의 개척과 영토확대가 가능했다.

그러나 왕의 사후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BC 1115~1077 재위)가 지중해와 반 호까지 진출해 군사적·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시리아는 다시 오랜 침체기에 들어갔고 서방 여러 민족, 특히 아람인과 동방의 산악민족 룰루비의 침입과 압박에 시달렸으며 영토는 티그리스 강 유역의 좁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BC 1000년대

새로운 제국의 탄생

BC 1000년대초의 메소포타미아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반유목민 아람인의 계속되는 위협이었다.

아시리아는 아슈르 단 2세(BC 934~912 재위)하에서 아람인과 산악민족의 진압에 성공했고 다음 왕인 아다드 니라리 2세(BC 911~891 재위) 이후 정복사업을 재개했다. 이 왕은 전쟁 외에 농업개혁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술을 남겼다. 그의 손자이며 대정복왕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 아슈르나시르팔 2세(정확한 이름은 아슈르 나시르 아플리, BC 883~859 재위)이다.

그는 보병·전차대 외에 처음으로 기병대를 도입하는 등 전술상·군사기술상의 개혁을 행하고 북방과 동방으로 정복지를 확대하여 속주로 하고 북방 무역로를 확보함과 함께 서방으로도 직접 원정에 나서 시리아·페니키아 등의 여러 도시들을 복속시켰다.

이렇게 해서 아시리아는 소아시아의 철, 아마누스 산맥의 은, 레바논의 삼나무를 수중에 넣은 대제국이 되었다. 이 왕은 계속적인 원정, 창에 꿰어 죽이고 살갗을 벗기는 등 반란 주민에 대한 철저한 잔학행위, 주민을 남김없이 대량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 등으로 이 나라를 '아시리아의 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게는 대규모적인 공격을 가하거나 유린하지 않고 근원이 같은 문화와 종교를 가진 이 인접 선진지역과 상호교역·문화교류에 노력한다든지 칼후(님루드)를 재건하여 이곳을 수도로 하고 광대한 궁전을 조영하여 치세중에 이미 제국 문화의 중심지화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노력한 측면도 있었다. 다음 왕 샬마네세르 3세(BC 858~824 재위)는 영토를 더욱 확대했다. 이 시기부터 새로 제국에 편입되어 속주로 된 정복지에서 들어온 아시리아의 관리들이 보인 행정사무기능의 우수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샬마네세르의 사후 아시리아는 수십 년 간 쇠퇴기에 들어가고 북방영토의 상당부분과 시리아 전체를 잃었다.

세계제국시대

군사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 오른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BC 744~727 재위)는 속주와 복속국가에서 모집하여 훈련시킨 상비군을 아시리아 군대의 주력으로 삼는 군제상의 대개혁과 철기시대의 선두를 달리는 군비개선과 아슈르 등의 대도시의 면세특권의 폐지 등의 내정개혁을 행하고 대원정에 나섰다.

북방에서는 우라르투를 격퇴하고 서방에서는 다마스쿠스·시리아·실리시아·페니키아·유다를 공략하여 이집트 국경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북서쪽에서는 만나이인·킴메리인을 정벌하고, 동쪽에서는 아제르바이잔 지방까지 출격하여 메디아의 일부를 장악하고, 남쪽에서는 바빌로니아 왕을 겸하고 세계제국시대를 열었다.

다음 왕인 샬마네세르 5세(BC 726~722 재위)는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 왕은 암살당한 듯하다. 다음의 사르곤 2세(BC 721~705 재위)부터 센나케리브(BC 704~681 재위)·에사르하돈(BC 680~669 재위)·아슈르바니팔(BC 668~627 재위)까지의 4대는 사르곤 왕조라고도 불리며 90여 년에 걸쳐 세계제국이 유지되었다. 특히 에사르하돈의 치세에는 판도가 이란 서부에서 이집트 본토 전체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이집트, 그리고 같은 문화를 가진 선진지역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강화시킨 것은 이들 전통있는 지역의 반발과 단결을 야기해 제국의 생명선인 북방 및 북동부를 위태롭게 했고 더구나 강력한 군사조직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키아쿠살레스가 이끄는 메디아인, 나보폴라사르 치하의 칼데아인, 북방으로부터 온 스키타이인 등이 가하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해 BC 614년 아슈르, BC 612년 니네베가 함락되었다. 아시리아는 BC 609년 혼란의 와중에 멸망했다. 아시리아는 뒤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AD 115~117년의 짧은 기간 동안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세계제국의 문화

완전히 철기시대로 접어들고 하나의 국제화한 역사적 세계로 되었던 BC 1000년대의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아시리아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이후 6명의 왕이 통치한 약 140년 동안에 걸쳐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지중해에 이르러 이란·소아시아·아르메니아·이집트의 일부를 포함하는 세계제국을 실현했다.

이것을 뒷받침한 요인으로는 ①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하는 2대 간선통상로를 지배하고 정복지에서 공납물의 유입과 교역품에 대한 징세에 의해 거대한 이득을 보았던 것, ② 멀리 떨어진 정복지의 다수의 주민을 통째로 아시리아 본토로 이주시킨 후에는 제국 내 타지역의 주민을 정주시킨 대규모 강제이주책의 강행, ③ 징집·장비·전술훈련에서도 우수한 상비군의 유지, ④ 정복지역에서 발달한 행정조직, 특히 아시리아의 대왕들이 전략·전술과 조직상의 천부적 자질과 악명 높은 잔학성을 함께 가지고 대상비군과 통치기구를 지휘·감독했던 것 등이 있다.

아시리아 문화에는 종교·문학·법률·실제광학 등 일반적으로 바빌로니아 문화에서 영향받은 것이 많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역사의 후진성·주변성·역동성이 반영된 민족적 전통의 유지·발현의 측면도 있는데, ① 연도를 왕족·귀족·고관들 중에서 선발된 최고관(임무)에 따라 이름지어 기록하는 옛 에포님제가 세계제국시대까지 유지되었던 것, ② 아시리아 왕명표 중의 '천막에서 살았다'고 되어 있는 최초의 17명의 부분은 사르곤 이전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전하고 있는 것, ③ 중기 아시리아의 법서가 형량의 지나침을 보고 있는 것, ④ 아슈르나시르팔 2세,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센나케리브와 같이 아슈르 신에의 귀의에 근거한 국수주의 정책을 전개한 군주가 상당수 나왔던 것 등이 그것이다.

 

*다음백과에서 복사한 것입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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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요한 발전을 이룬 영역으로는 미술·수학·공학기술 분야 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 건축, 메소포타미아 신화, 메소포타미아 종교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던 오리엔트 세계를 처음 통일한 나라는 아시리아다. 아시리아 인은 셈 족의 한 갈래로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빌로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재빨리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우수한 철제 무기와 기마대로 사방을 정복해 나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700년경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방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오리엔트 전 지역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시리아 제국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기원전 612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곧 아시리아 인은 무력만을 믿고 정복지의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다가 그들의 심한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아시리아가 망한 후, 오리엔트 세계는 신바빌로니아 · 메디아 · 리디아 · 이집트의 4왕국으로 갈라졌다. 그 중에서도 셈 족인 칼데아 인이 세운 신바빌로니아가 가장 강성했다. 신바빌로니아는 수학 · 천문학 · 점성술 등이 크게 발달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아시리아 멸망 후의 오리엔트의 분열
아시리아 멸망 후의 오리엔트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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