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78) 협동조합 돕는 협동조합
자연스럽게 협동조합 정신에 물들다
협동조합의 역사와 현재는 경제적 평화가 거저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믿음과 사랑, 그리고 실천을 통해 세상 속에서 캐낼 수 있는 소중한 보화임을 보여줍니다.
협동조합들을 돕는 협동조합인 이탈리아 ‘레가 코프(Lega Coop, 이하 레가)’는 아직 그리스도 정신이 일천한 우리 사회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춰보면 레가의 활동은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만 합니다. 우선 이익만 바라보는 경제 풍토에서는 당기순이익에서 3%를 떼어내 공동의 미래를 위해 적립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 경제적 상황이 어려울 때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은 협동조합 들이 자발적으로 일자리를 나눠 힘들어하는 조합원들을 돕는다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어려움마저 나누고자 하는 절절한 형제애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입니다.
나눔과 사랑에 앞장서고 있는 레가는 지난 1886년에 설립돼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레가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소매업을 비롯해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 금융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약하는 1만5000개의 협동조합이 가입돼 있습니다. 레가 외에도 협동조합연합회(CCI), 협동조합총연합(AGCI), 이탈리아협동조합연합(UNCI) 등의 협동조합 중앙조직이 있는데, 이탈리아 협동조합 전체의 50%가 이러한 연합체에 속해 있습니다.
레가는 단위 협동조합이 조성한 ‘조합기금’을 협동조합 발전기금으로 활용해 매년 수십 개의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하고, 수천 명에게 ‘착한 일자리’를 찾아주고 있습니다. 조합원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경우 전직(轉職)에 필요한 교육훈련도 협동조합 네트워크 내부에서 이뤄집니다.
계층 사이는 물론 세대 사이에서 치열한 일자리 경쟁으로 노동의 질이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이로 인해 노동 현장에서의 자살률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가의 성과는 몇몇 통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소속 조합원 855만 명에, 연 매출액 5650억 유로(약 840조 원)로 웬만한 국가 수준을 상회합니다.
레가를 비롯한 이탈리아 협동조합들은 중요한 결정이나 전략적 방침도 조합원 총회에서 1인 1표로 결정합니다. 보유한 주식 수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주자본주의 하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규모가 커질수록 초창기의 첫 마음과 정신을 잃기 쉽습니다. 하지만 레가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협동조합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향하며 견고한 연대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탈리아 협동조합들이 민주성과 개방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협동조합들이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설을 설립해 운영하는 공동육아도 자연스런 일상의 문화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런 토양 속에서 자란 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정신에 젖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나눔과 사랑의 협동조합은 사람과 그 문화마저 그리스도화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2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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