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0) 다양한 협동조합들
노동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귀중한 밑거름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순간순간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또한 크나큰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역(苦役)과 피땀으로 다가오는 노동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유지, 보존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창조적인 모습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며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창조질서를 유지하는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한다고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노동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었으며, 노동의 여러 형태 안에서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노동은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의 가치가 훼손돼 노동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짐이 되는 현실은 결코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의 참 가치를 잘 드러내는 인간의 경제활동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협동조합(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사람이 노동을 통해 창조해내는 가치가 형제를 위한 봉사일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귀중한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협동조합 어린이집 ‘라치코냐’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 주 주도(州都) 볼로냐 남동쪽에 있는 인구 3만 명의 소도시 ‘산라자로 디 사베나(San Lazzaro di Savena)’에서 운영되는 어린이집 ‘라치꼬냐’(La Cicogna)는 협동조합의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라치꼬냐는 이탈리아 돌봄서비스 협동조합 카디아이(CADIAI) 등이 볼로냐 시와 민관 파트너십을 형성해 추진하는 ‘카라박(CARABAK) 프로젝트’로 세워졌습니다. 카라박 프로젝트는 카디아이뿐만 아니라, 급식노동자협동조합 ‘캄스트’, 건축노동자협동조합 ‘치페아’ 등 4곳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보육시설을 설립·운영하는 사업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치페아 소속 건축노동자들은 보육시설 공사를 맡고, 캄스트 소속 급식노동자와 카디아이 소속 유치원 교사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개인이 이룰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럿이 힘을 합쳐 협동조합을 만들듯이, 개별 협동조합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끼리 뭉쳐 어린이집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대부분 협동조합들은 농민이나 노동자, 수산인, 소비자 등 특정 계층과 직능별로 조직돼 각 집단 구성원의 공동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에 달리 카라박 프로젝트는 협동조합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조합원으로 참여시켜 보육이라는 사회적 목적 실현과 일자리 창출, 지역사회 공헌 활동 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라치코냐 등 11개의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확대해나갈 예정이라니 보육 문제가 사회적으로도 골칫거리가 되어있는 우리 사회가 눈여겨 볼만합니다.
조그만 어린이집이지만 어려서부터 이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소중한 체험이며 산교육이겠습니까.
[가톨릭신문, 2013년 2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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