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88) 사랑을 바탕으로 한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
가난한 노동자들이 함께 꾼 ‘꿈’
협동조합이란 말의 연원이 된 ‘로치데일 공정 개척자 조합(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의 역사에는 온갖 시련을 극복해온 인류의 지혜가 담겨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최초의 협동조합인 로치데일 조합을 구상했던 설립자들이 추구한 삶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개인의 소소한 이익을 내세우기보다 공동체의 발전과 미래를 먼저 생각하고 서로를 배려한 로치데일 조합원들의 선택은 지금도 협동조합운동의 밑거름으로 남아 시대를 뛰어넘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이 지구촌 최초의 산업단지가 조성된 역사를 간직한 영국 맨체스터에서 발아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품게 합니다. 맨체스터 인근 로치데일 시내 골목길 한 모퉁이 허름한 창고를 빌려 시작된 로치데일 조합 조합원들은 결코 영리만 바라보고 조합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초심을 살펴보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큰 공부가 될 것입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이 함께 뜻을 모아 만든 조합의 운영원칙을 보면 수백 년 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미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으로 잘 알려진 ▲ 1인 1표제 ▲ 정치 및 종교상의 중립 ▲ 조합에 의한 교육 ▲ 이자의 제한 ▲ 구매액에 따른 배당 ▲ 시가판매 등이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이 합의한 원칙들인데 이는 오늘날에도 협동조합들의 존립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치데일 조합의 정관이 상상을 뛰어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창기 설립자들은 정관에 조합원들을 위한 주택건설을 비롯해 공업생산, 농업, 교육, 나아가 자치정부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조합원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한 완전한 자주와 동맹을 통해, 영리 추구에만 매몰돼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한 사회체제를 서로간의 사랑과 상호부조를 기초로 조직된 협동조합의 제도로 바꾸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과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사라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자신들의 조합에 담아냈던 것입니다. 서른 명도 안 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함께 꾼 꿈이 오늘날 어떻게 자라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면 주님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협동조합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스테파노 자마니(Stefano Zamagni) 교수(경제학)는 협동조합을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빈부와 계급과 인종은 물론 사상과 이념 등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이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노동자들의 상상력은 설계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어 주님 보시기 아름다운 세상의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로치데일 조합원들의 인간 사랑을 향한 상상력을 담아내던 허름한 창고는 지금도 로치데일 골목길 그 자리에서 협동조합의 이정표로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한 사람의 꿈은 그저 꿈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됩니다.” <돔 헬더 카마라(Helder F. Camara) 대주교>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는 협동조합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겸손과 배려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4월 14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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