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7)
제2편 - 제1부 - 제1장 - 제1절 : 전례 지금까지 우리는 제1편으로 사도신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제2편에서는 성삼위 하느님께서 어떻게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는 어떻게 참여하는지 전례, 특히 일곱 성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가서 전례에 참석합니다. 매주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종종 세례식, 혼인식, 서품식에 참석하며 때에 맞춰 성무일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례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전례의 수혜자처럼 전례 안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르고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전례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전례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일”(요한 17,4)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건은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신비(죽음과 부활)입니다. 그 신비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례를 통해서 계속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신비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례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일(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례는 성삼위 하느님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전례 안에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전례 안에서 파스카 신비를 나타내시고 실현하시며 현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전례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켜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루어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례 거행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은총을 받습니다. 그럼 전례는 누가 거행할까요? 전례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 전체가 거행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특별한 방법으로 각자의 소명에 따라 세례로 받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례는 교회 전체가 거행하는 공동체적 예식입니다. 다만 특별히 전례에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아 성품성사로 축성된 주교, 사제, 부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직자와 함께 성령으로 하나 되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전례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직자 홀로 집전하고 단지 지켜보기 위해 전례에 참석한다면,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소홀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전례거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감사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우리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2013년 5월 12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8) 제2편 - 제1부 - 제1장 - 제2절 : 성사 우리의 전례생활은 주로 성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생명의 양식을 얻으며, 죄를 용서받고 영육 간에 치유를 받습니다. 또한 교회에 봉사하도록 불리고 부부 간에 일치를 이룹니다. 이처럼 성사는 우리의 삶을 영위하면서 신앙을 보살펴주며 성장시켜 줍니다. 그렇지만 성사는 백일잔치나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서로 기쁨을 나누기 위한 단순한 행사나 축하식일 수 없습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의 표징들로써, 이 표징들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베풀어지기 때문에, 성사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은총을 마련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우리의 양심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눈으로 뵐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성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세례를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고, 미사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사를 실질적으로 주관하시기 때문에, 성사가 교회의 의향에 따라 거행되면 사제의 개인적인 성덕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집니다. 그렇다고 성사가 우리의 자세와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사를 통한 은총은 모두에게 내리지만 성사가 맺는 결실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는 교회의 예식에 따라 정성껏 집전하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성사에 참석한 이들은 그리스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신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사는 신앙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말씀과 표징들로 신앙을 기르고 굳건하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사는 신앙의 성사들이라고 합니다. 교회에는 일곱 가지 성사 곧,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가 있습니다. 이제 세례성사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3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9) 제2편 - 제2부 - 제1장 - 제1절 : 세례성사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친교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로 들어가는 첫째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세례를 기억하고 세례성사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례(洗禮)는 ‘물에 담그다’, ‘물에 잠기게 하다’, ‘물로 씻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로 ‘씻음’은 몸의 더러움을 없애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죄를 깨끗이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에 ‘잠김’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힘을 상징하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2코린 5,17)으로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물은 세례성사의 표징으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로마 6,3-4), 모든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세례식 때, 사제는 영세자의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며(또는 물에 잠기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럼, 세례로 우리의 신앙은 완성될까요? 세례는 끝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세례를 위해 성숙된 신앙이 요구되거나 세례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든 어른이든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자녀로 성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비 신자나 대부모는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라는 질문에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 3장 21절을 보면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우리의 서약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효(孝)입니다. 그 효를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셨고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부활 성야에 세례 서약을 새롭게 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세례서약 갱신으로 마귀와 유혹을 끊어버리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우리의 신앙이 미숙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신앙을 굳건하게 이끌어줄 성령의 선물도 함께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의 은총을 받는 견진성사를 살펴보겠습니다. [2013년 5월 26일 삼위일체 대축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0) 제2편 - 제2부 - 제1장 - 제2절 : 견진성사 우리는 세례 때 하느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신앙생활을 다짐하지만 아직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에 미숙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매일 실천하기에 힘과 지혜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협조자, 곧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그 약속대로 우리는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과 그 은총을 받습니다. 견진성사는 세례 때 서약한 새로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완성하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견진성사로 그리스도와 더욱 굳게 결합하고, 성령의 선물을 풍요롭게 받으며, 교회와 더 완전하게 결합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본래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와 함께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고 영세자가 많아지면서 점차 세례성사와 분리되어 나중에 받게 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모든 본당의 세례성사를 집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교님께서는 따로 본당에 방문하셔서 미사 때 견진성사를 집전하십니다. 주교님께서 안수하신 다음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르며 “성령을 주는 인호를 받으십시오!”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사도 시대부터 안수와 기름 바름(도유)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전해주고 성령을 준다는 표징이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안수와 기름 바름으로 성령의 인호를 받습니다. 성령의 인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표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과 그분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은총을 청할까 고민하지만 ‘언제’ 성령께 의탁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지혜), 성경말씀을 들을 때(통찰),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분별할 때(의견), 하느님을 섬기고 덕행을 실천하고자 할 때(용기),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때(지식),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할 때(공경),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죄를 성찰할 때(경외), 그리고 주님의 은총이 필요한 모든 때에 우리는 성령을 청하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분명 성령께서는 놀라운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어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입문성사’인 성체성사를 살펴보겠습니다. [2013년 6월 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1) 제2편 - 제2부 - 제1장 - 제3절 : 성체성사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래서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핵심이며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시고 희생 제사를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 제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파스카 신비(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고자,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성사로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현재화’하고 ‘기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는데, 이 예식이 바로 미사(성찬례)입니다. 미사 때 사제의 축성으로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와 성혈 안에 실제로 현존하십니다. 따라서 빵(제병)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 하시며 당신의 몸을 우리가 먹을 양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어서 손에 포도주 잔을 드시고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하시며 당신의 피를 우리가 마실 음료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음식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는 영성체를 통해 영적 양식을 얻고 그리스도와 더욱 긴밀하게 결합됩니다. 영성체는 주님의 몸(성체)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감사와 찬미 속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합당하게 몸과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대죄를 지었다면 먼저 고해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고 공복재를 지켜 주님께 드릴 존경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영성체는 주님께 대한 가장 큰 흠숭이지만 미사 밖에서도 성체께 공경과 존경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성체 조배와 성시간은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존경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주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마땅히 성체를 공경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흠숭 안에서, 신앙으로 충만하여, 중대한 잘못과 세상의 죄를 속죄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드리는 묵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을 거부하지 맙시다. 우리의 흠숭이 중단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2013년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2) 제2편 - 제2부 - 제2장 - 제4절 : 고해성사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새 생명이 약해지거나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고쳐주고 회복시켜주길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치유의 성사, 곧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용서하시는 예수님’과 ‘참회하는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場)입니다. 그래서 화해의 성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해성사 보기를 어렵고 부담스러운 의무처럼 대합니다. 그리고 왜 굳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느냐며 고해성사가 큰 장벽이 되어 점점 교회와 멀어지기도 합니다. 누구든 고해성사 보기가 편한 사람은 없겠지만, 고해성사의 참 의미를 깨달아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크게 두 가지 핵심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회개하는 사람의 일, 곧 통회, 고백, 보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의 중개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즉 교회는 사제를 통해서 성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 주고, 보속의 방법을 정하고, 참회자와 함께 기도합니다. 먼저, 통회(참회)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마음으로 아파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통회는 고해성사에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통회를 보시고 그 대가로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 전에 ‘이미’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우리는 그 손길을 느끼고 주님께 대한 신뢰로서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고백은 고해성사의 핵심 부분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고해성사를 거행합니다(요한 20,23 참조). 고해성사 안에서 사제의 역할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결해 주는 중개자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믿음과 찬미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하셨지만,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마태 18,33 참조).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지만 죄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에 새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제가 주는 보속의 의미입니다. 고해 사제는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라고 사죄경을 외웁니다. 그리고 참회자는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온전히 회복하게 되고,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이웃)와의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양심의 평화와 영적 위안을 주는 은총의 큰 선물입니다. [2013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3) 제2편 - 제2부 - 제2장 - 제5절 : 병자성사 우리를 크게 괴롭혀 온 문제들 중에는 질병과 노쇠가 있습니다. 질병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체험합니다. 또한 홀로 병고와 죽음의 두려움을 맞서야 할 때,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낍니다. 이럴 때 우리는 병자성사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인답게 병고를 이겨 낼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치유의 은총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앓는 이들은 고쳐 주어라.”(마태 10,8)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마르 6,13 참조). 이와 같이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병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전통적으로 병자성사의 핵심은 사제의 도유(기름 바름)입니다. 사제는 환자에게 안수를 하고 기름을 바르면서 성사의 특별한 은총을 청합니다. 이어서 성체를 영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위로와 평화와 용기의 은총을 받습니다. 또한 병자성사는 공동체적인 예식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신자들이 모여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관심으로 환자는 고통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병자성사는 누가 받는 것일까요? 병자성사는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만이 받는 성사가 아닙니다. 병자성사는 중병에 있는 환자, 위험한 수술을 받으려는 환자, 노환으로 쇠진해진 신자들이 받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회복되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면 다시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예식을 더 이상 종부성사라 부르지 않고 ‘병자성사’라고 부릅니다. 가족 중에 질병이나 노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가 있다면, 의식이 있을 때 사제에게 청하여 병자성사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환자가 집에 있다면 본당 신부님에게, 병원에 있다면 원목 신부님에게, 두 분이 계시지 않을 경우 그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에게 병자성사를 청하면 됩니다. 가정에서 신부님을 모실 때는 미리 상위에 흰 보자기를 덮고 그 위에 십자가, 성수, 촛불을 준비합니다. 필요하면 환자의 영성체를 위해 생수를 함께 준비합니다. 누구나 병이나 노쇠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곁에, 그리고 항상 영원히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4) 제2편 - 제2부 - 제3장 - 제6절 : 성품성사 일곱 성사 중에서 다른 이들의 구원과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가 있습니다. 바로 성품성사와 혼인성사입니다. 성품성사는 하느님 백성과 복음화를 위해 봉사하도록 특별히 선별된 이들을 서품으로 축성하고 교회의 직무(사제직과 봉사직)를 수여하는 성사입니다. 성품(聖品)이라 부르는 이유는 거룩한 서품으로 교회의 품계(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에 참여하고, 주교의 안수와 축성 기도로 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수와 축성 기도는 성품성사의 핵심 예식입니다.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제사와 기도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은 한정적이었고 결정적인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예물로 바치시며 이루신 유일한 십자가 제사로써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제사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제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대사제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를 보편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도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미사를 봉헌하고(사제직), 말씀을 선포하며(예언자직), 교회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도록(왕직) 마련된 직무 사제직이 있습니다. 이 직무 사제직은 성품성사를 통해 수여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며, 신자들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품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품계(品階, ordo)는 특정한 정치 · 사회 계층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단어를 봉사하는데 필요한 직무와 권한을 구분 짓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세 품계는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입니다. 주교품은 ‘충만한 성품성사’로서, 특별히 선발된 신부에게 주교 축성으로 주교직이 수여됩니다. 주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교구 안에서 신자들을 성화시키고 가르치며 다스리는 임무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절로서 수행하게 됩니다. 사제품을 받은 신부들은 주교의 협력자로서, 주교의 임무를 도와 자신의 소임지(본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성찬례와 성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을 사목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부제품은 봉사의 품계로, 사제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하여 임명되는데, 부제들은 제대에서 주교와 사제를 보좌하고, 말씀 전례와 준성사를 거행합니다. 대전교구에는 세 분의 주교님과 많은 신부님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신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목자로서 성실히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5) 제2편 - 제2부 - 제3장 - 제7절 : 혼인성사 혼인성사는 친교에 봉사하는 두 번째 성사입니다. 친교(親交)는 일상에서 ‘친밀한 사귐’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친교’는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교는 라틴어로 ‘꼬뮤니오’(communio)입니다. 이 단어는 ‘꿈뮤니스’(cummunis)라는 형용사에서 온 것으로, ‘함께’(cum)와 ‘책임을 다하는’(munis), 두 단어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친교는 ‘책임을 함께 다하는 것’, ‘책임을 나누어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친교에 봉사하는 혼인성사는 책임을 함께 다하도록 서로 도와주는 성사입니다. 그렇다면 혼인성사는 ‘어떠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줄까요? 혼인성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사랑에 힘입어, 부부 간의 충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부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를 이루도록 돕습니다. 또한 부모의 사랑과 신앙으로 자녀들이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결혼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중요한 대사(大事)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창세 1,27 참조),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혼인의 소명은 우리의 본성에 새겨져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루는 혼인을 성사의 품위로 들어 높이셨습니다. 따라서 혼인성사로써 부부들의 혼인 생활은 성사 생활이 됩니다. 그러므로 혼인성사를 받은 부부는 그 성사의 유대로 죽기까지 신의를 지키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혼인성사는 다른 성사와 달리 부부 스스로 성사를 이룹니다. 혼인예식의 주례자는 사제이지만, 혼인성사의 집전자는 혼인 계약을 맺는 신랑과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교회 앞에서 다음과 같이 혼인 합의를 주고받습니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 혼인 합의는 혼인이 성립되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교회는 신자 남녀들이 혼인성사를 받기를 원합니다. 혼인 예정자는 적어도 혼인하기 1-2개월 전에 본당신부님과 의논하고 혼인성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먼저, 예비부부는 혼인교리를 받아야 합니다. 혼인교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혼인 생활과 혼인 예식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다른 종교 신자나 비신자와 혼인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합니다. 하지만 혼인을 해야 할 경우에는 누구나 교회의 관면(寬免)을 받아야 합니다. 관면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신앙교육을 시킬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혼인 전 본당신부님과 꼭 상담하고 관면을 받아 혼인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7월 7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6) 제2편 - 제2부 - 제4장 - 제1절 : 준성사 지금까지 우리는 일곱 성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일곱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표징으로 나타내고, 실제로 그 은총을 이루어 주는 거룩한 일(聖事)입니다. 대부분의 전례생활은 일곱 성사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성사들 이외의 전례가 있는데, 바로 준성사(準聖事)입니다. 성사가 아닌 준성사는 덜 중요하고 격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물론 준성사와 성사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셨지만, 준성사는 교회에 의해 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준성사는 성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그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양하고 복잡한 삶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일상에서 우리는 성사를 생활화하고 성사들 고유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자 생활에 필요한 장소, 유익한 물건, 신분, 직무(독서직, 시종직, 교리교사) 등을 거룩하게 하고자 준성사를 제정했습니다. 그래서 준성사는 우리 삶의 여러 환경을 거룩하게 만들고 성사들의 뛰어난 효과를 받도록 준비시킵니다. 준성사는 교회에 의해 제정되었기 때문에 시대, 필요, 문화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거나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차의 축복 대신 자동차나 항공기의 축복은 오늘날 우리를 위해 생긴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들은 결코 없애거나 새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준성사는 축복, 축성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는 것을 축복이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리교사들의 축복, 새 집의 축복, 상점의 축복, 교통수단의 축복, 성물의 축복 등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께 봉헌하고 거룩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축성이라고 합니다. 축성된 물건과 장소는 전례적인 용도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성당, 제대, 고해소, 감실, 독서대, 성유, 성작, 제의 등은 축성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봉헌되는 사람(수도자, 동정녀)도 축성되는데, 이로써 그들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축성은 분명 서품과 다릅니다. 서품은 성사로서 안수와 축성 기도로 ‘거룩한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驅魔) 역시 준성사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악마의 세력에서 보호하길 청합니다. 세례 때 간단한 형식의 구마를 행하지만, ‘장엄 구마’ 예식은 주교님의 허가를 받은 사제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준성사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신앙심을 북돋아 성사생활을 충실하게 하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묵주, 성패, 성화 등을 부적이나 행운의 상징처럼 여기는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대전주보 4면, 김두한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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