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26) 스승의 종결자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신 탁월한 스승
■ 사실상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야
10년 전쯤 뉴에이지니 신(흥)영성이니 하는 것들이 크게 유행했다. 지금도 그 갈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때는 기세가 드셌다. 이들은 이른바 신흥종교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신흥종교들이 대체로 그리스도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견지했다고 한다면, 이들은 유화적 입장을 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고, 그들의 상대주의적 신관의 귀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심각했다.
나는 신(흥)영성의 하나인 마음수련이나 기수련에 빠져 더 이상 교회를 나오지 않는 이들과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많다. 대체로 대화는 그들의 해괴한 논리를 따라 진행된다.
“나는 여전히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성당엔 나가지 않아도 ‘수련’하면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니까요.”
“결국 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도 부처님이나 공자님처럼 완전한 경지에 이른 분으로 인정해주고 있는걸요.”
“…???”
“예수님은 스승님이며 목표예요, 나도 열심히 수련해서 예수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래도, 성당은 다니셔야죠.”
“다닐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왜냐하면 신부님들의 강론이 너무 폐쇄적이기 때문이죠. 예수님 말고도 성자(聖者)의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 많은데 모두 부정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미사도 너무 형식적이예요. 그 시간에 수련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요.”
“사실상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야.” 어디서 많이 듣던 어투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에게 문제는 예수님의 위상이 ‘그리스도’에서 ‘스승’ 또는 ‘그루’로 교묘하게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요즘으로 치면 ‘멘토’가 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스승이시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직함은 어느 경우에도 생략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결정적 오류라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또 하나! 예수님이 여러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하나로 대충 대접받고 있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승으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을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 촌철살인의 스승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은 탁월한 스승(랍비, 히브리어 Rabbi)이었다. 예수님은 당대의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에 걸출한 스승이었다. 그야말로 스승의 종결자였다. 이는 그분의 말씀에서 발해진 힘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고, 감히 거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접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태 7,28-29)
이러한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는 “골수를 쪼개는 힘”(히브 4,12 참조)이 있었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능이 있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촌철살인적인 가르침 한 대목으로 시간여행을 가보자. 성경을 통틀어 가장 짧게, 가장 많은 것을, 가장 맛있게 얘기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요한 복음 1장 35-41절이다. 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는 첫 번째 상봉의 장면! 이 두 청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조용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선다. 인기척을 느낀 예수님이 뒤를 돌아 물으신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두 청년이 물음으로 답한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이 화답한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두 청년은 예수님을 따라가 딱 한나절 오후 4시까지 함께 머문다. 그리고 안드레아의 형 시몬 베드로에게 가서 말해 준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이게 전부다. 붙이지도 않았고 빼지도 않았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두 청년이 웬 낯선 분을 만나서 그가 ‘메시아’임을 알아봤다는 엄청난 얘기가 담겨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평생 걸려도 불가능한 일이 여기 이 몇 문장으로 표현되었듯이 ‘하루 한나절’에 전개된 사건으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묻고 답하는 말이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을 넘나드는 경지다. 먼저 예수님이 말문을 여신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이에 두 청년은 세례자 요한이 이러저러하게 말하더라고 하지 않는다.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뭐하는 분이십니까?”라고 묻지도 않는다.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참 여운이 있는 질문이다. 제자 될 자격이 있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와서 보라” 하신다. 기막힌 화답이다. 내가 사는 곳은 알아서 뭐 할려구?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이런 식으로 되묻지 않으셨다. 이미 저 두 청년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셨기 때문이다. 와서 보라!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내 안에 있는지! 내 마음에 들어와서 보라! 집에 가서 물 한 잔 줄 터이니 쉬엄쉬엄 들어와서 보라! 그리고 두 청년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를 만난다.
거의 무언(無言)에 가까운 이 만남, 그 안에 놀라운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
■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이 ‘먼저’ 부르시기 때문이다. 라삐들의 세계에서는 제자가 자신의 스승을 선택하여 그의 학교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은 대단히 비싸고 전인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부르심이었다. 이에 기꺼이 응한 이들만이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예수님을 떠났다. 끝까지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이 말씀은 우리를 부담감에서 해방시켜주고, 편하게 해 준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거나 어그러졌을 때, 예수님께 따질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당신이 불리한 계약을 맺어주셨다.
“너희가 부담스럽거든, 내가 너희를 뽑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이 말씀을 기억하면 우리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당신께서 먼저 뽑으셨으니, 책임지세요~.”
“그래, 그래, 그랬지~.”
예수님은 이렇게 멋지신 분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뽑으실 때 무엇을 보고 뽑았을까? 사도 바오로가 자랑거리를 늘어놓는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6-29)
고맙고 감동스러운 얘기다. 눈물 찡.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30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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