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믿나이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앙의 정수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성자께서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의 고백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고백들이 그보다 하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리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어느 하나가 외따로 떨어져서는 본래의 빛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듯,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고 정점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리들의 전체적인 연관성 안에서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강생과 전 생애, 죽음을 빼놓고서 어떻게 그분의 부활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파스카 신비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동일한 하나의 파스카 신비에 속합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신비는, 사도들과 그 뒤를 이어 교회가 세상에 전파해야 할 기쁜 소식의 핵심”(「가톨릭교회교리서」, 571항)입니다.
파스카라 함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심으로써,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더 이상 밑바닥이 없는 죽음의 심연에 하늘로 건너가는 생명의 문을 내셨습니다.
또한 파스카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 ‘건너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상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모든 일이 이제 천상적 현실이 됩니다. 이 천상적 현실을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의 삶 안에서 성령을 통해 늘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은 우리를 떠나시는 이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 당신이 내려오셨던 하늘, 곧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가심으로써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오십니다.
따라서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심을 포함합니다.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는 그 육신을 지니시고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생에서 취하신 육신을 훌훌 벗어버리고 혼으로만 부활하거나 승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미 육신 세계의 한 쪽이 하늘의 영광 속에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교는, 물질이나 육신 세계를 죄악시하는 이원론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내밀한 현존 속으로 들어가셨음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십니다. 스테파노도 보았던 이 같은 표상은(사도 7,56 참조) 예수님께서 이제 하느님과 같은 영광과 신성을 누리심을 나타냅니다.
거기서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로, 우리의 대사제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히브 9,24).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가 ‘우리를 위하심’이었다면, 이 우리를 위하심은 그분이 영광스럽게 되신 이후에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
이처럼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일한 연속성을 이룹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충격적이었던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예수님의 부활도 제자들에게는 계산 없이 맞닥뜨린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대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더러는 여전히 의심하였는데(마태 28,17 참조),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 16,14)고까지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부활 신앙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빈 무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꾸며낸 신화적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충격에 휩싸여있던 제자들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아마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그 무덤을 추모의 성역이나 거룩한 순례지로 만드는 것이 더 손쉬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영웅이 죽고 나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조작하고자 했다면 이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더 매력적이었을 테지요.
굳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침으로써 신심 깊은 유다인들에게조차 당치 않은 일이라고 외면당하기보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 많이 따르게 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친 것이라는 주장도 이미 원시교회가 알고 있으리만치 오래된 주장입니다(마태 28,13 참조).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에 당황해하고 헛소리로까지 여깁니다(루카 24,11 참조).
“주간 첫날 이른 아침”(요한 20,1),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고, 그래서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 빈 무덤을 발견하고서는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요한 20,2)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인들과 제자들, 예수님의 적대자들까지도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곧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 이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이 빈 무덤이 부활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빈 무덤, 이는 해석을 기다리는 ‘표징’이라고 합니다. 누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으로, 누구는 제자들이 꾸며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요.
누구의 해석이 옳은 것일까요? 이를 판가름하려면 또 하나의 사실이 필요합니다. 곧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입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고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그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발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래된 전승 가운데 하나를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7).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발현은 왜 그분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는지 말해줍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은 빈 무덤이 왜 부활의 증거가 되는지 말해줍니다. 동시에 빈 무덤은,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분이 떠도는 귀신이나 혼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유령과 같은 존재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분명하게 증언합니다(루카 24,39 참조).
아무튼 상황을 종합해 보면, 스승의 죽음으로 침통함(루카 24,17 참조)과 두려움(요한 20,19 참조)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이 무언가 엄청난 체험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 체험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들의 증언 사이에는 균열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제자들이 부활 신앙을 만들어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어마어마한 사건, 초역사적인 사건은 그렇게 일관성 있게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도 하지요.
제자들은 분명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았고 체험했으며, 이 체험을 기록하고 전해주었습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바로 이들의 직접적인 체험과 증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따라서 부활 신앙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삶 자체를 규정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모순투성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끝내는 당신 부활의 현실 속으로 옮겨주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부활의 현실이 이 세상을 압도하며 물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이 절망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충실성에 대한 확실한 증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을 내어주고 남을 섬기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현세와 내세의 삶을 위한 명백한 좌표입니다.
부활 신앙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부활하신 주님만을 근본으로 하여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 이를 가리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7월호, 김혁태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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