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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교리: 외국인 노동자의 이주와 이민사회형성 단계 (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6 조회수1,790 추천수0
[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외국인 노동자의 이주와 이민사회형성 단계 (1)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국가들은 이들에 의해 이민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국가들을 살펴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민사회를 형성해 가는데 일정한 단계를 거치고 있다. 뵈닝(Roger W. Bohning)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정에 따라 이민사회가 형성되어 가는데 거기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즉 처음에는 한두 사람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게 되고, 차츰 그 수가 증가하면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정책이 시행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입국에 정착하고 마침내 유입국에서 자신의 모국 가족과 재결합하고 이민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이주 노동자들을 통해 형성되는 이민사회 형성과정을 이주시작, 이주지속, 가족 재결합, 영구정착의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하였다. 이 네 가지 형태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제1단계

이주 노동이 시작되는 단계이다. 근로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나가는 단계인데, 외국인 노동자의 이입국에 특별한 체계나 제도를 갖추지 않은 단계이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의 유출과 유입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는 이주 노동이 시작되는 단계로 소수의 젊은이들, 특히 미혼 남성들이 개별적으로 고임금을 찾아 해외 취업을 감행한다. 이때 젊은이들은 개별적으로 단기간 취업을 하고 소득의 대부분을 모국으로 송금하며, 자신이 목표로 하는 기대 수준에 도달하면 모국으로 귀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의 기준과 근거는 모국사회이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이다. 1980년대 우리나라 정부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무엇보다 외국인들의 경기 관람과 관광의 증가에 달려 있었다. 이에 정부는 1983년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여 체류·관광·통과로 구분하던 사증을 단일화하고 외국인의 출입국 절차를 간소화하고 외국인의 국내체류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북방정책을 통해 공산권 국가인 소련(1990년), 중국(1992년)과 수교하였다. 정부의 출입국 관리의 간소화, 그리고 북방외교는 동남아시아와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88 서울 올림픽을 통하여 소개된 한국의 발전된 모습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각국 사람들에게 ‘코리안 드림’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젊은이들이 관광 비자를 통하여 개별적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취업에 나서게 되었다. 초기에 개별적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취업을 한 사람들 중에는 해외 정보에 밝은 고학력자가 많았으며, 이들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렇게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본국과 한국의 임금 격차 때문에, 또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돌아가려는 희망으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로 남는 사례가 급증하였다. 아울러 한국정부는 한국인들의 3D 업종기피로 인한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불법 이주 노동을 묵인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로 인해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가 급증하여 1992년에는 외국인 노동자 전체가 73,868명이었는데 그중 88.7%인 65,528명이 미등록 노동자들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한 88 서울 올림픽 직후부터 산업연수생제도가 일반화되기 직전인 1992년까지가 이주노동의 시작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위에서 보았듯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취업을 위해 입국하였고, 외국인 노동자의 이입을 위한 공식적인 체제나 제도가 마련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 사회에서 그저 개인으로 생활하며, 사회적,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


2. 제2단계

해외이주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이주지속단계이다. 해외이주를 통한 취업으로 경제적 수익을 산출한 사례가 송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주 노동자들의 성공사례가 유포됨에 따라 해외취업을 결정하지 못하던 기혼노동자까지 해외취업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남성들이며, 이입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제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체류기간을 장기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모국으로의 귀환은 감소하게 된다. 그러면서 상호부조 형식의 ‘사회적 연결망’이 결성된다.

1990년에 들어서서 우리 기업들의 해외 투자가 확산되었다. 한국정부는 3D업종 기피로 인한 제조업체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1년 ‘산업기술연수생’제도를 제정하였다. 이 제도에 따르면 해외 투자 기업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연수생으로 한국에 데려와 일정기간 연수업체에서 연수를 하고 연수 후 소정의 절차를 걸쳐 정식 근로자로 취업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해외 투자 기업에만 허용되었기에 당시 극심한 인력난을 겪던 중소기업은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없었다. 이에 중소기업협동중앙회가 1992년에 외국인 산업연수생의 연수기간연장과 연수대상업체의 범위 확대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4월에 정부는 연간 1만 명의 ‘산업기술연수생’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정부는 재외동포의 국내 출입국 및 체류상의 편의를 위해 1999년 「재외동포법」을 제정함으로써 해외동포들의 국내 유입이 용이하게 되었고 2004년 2월 「재외동포법」의 개정으로 200만 중국동포와 50만 구소련동포가 이 법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산업기술연수생’제도와 「재외동포법」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취업을 하던 것이 집단이주의 양상을 띠면서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동남아의 노동자들이 산업연수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출신국에서 브로커에게 막대한 송출비용을 부담하였으나, 산업연수생은 원칙적으로 노동자가 아니기에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착취와 멸시를 받고 있었다. 산업연수생들은 자신들의 임금으로 한국 입국을 위해 지불했던 막대한 비용을 상쇄할 수 없었고, 노동 현장에서의 멸시와 착취를 벗어나 조금이나마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 미등록 노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내의 미등록 노동자가 1994년 48,281명(전체 외국인 노동자의 58.94%)에서 2001년에는 255,206명(77.4%), 2004년에는 208,893명(46.1%)에 이르게 되었다.

제1단계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외국의 상황이나 취업정보에 밝은 고학력, 중산층 출신이 주를 이루었으나 산업연수생제도가 시행되면서 저학력, 빈곤층 출신의 유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제조업, 건축업, 농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산업연수생으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언어문제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인권과 노동권의 침해를 받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었고, 종교단체와 노동단체, 그리고 언론들이 이러한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하였다.

산업연수생제도가 일반화된 1993년부터 2004년 고용허가제가 실시되기 전까지를 외국인 노동자의 한국이주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이주지속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비록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였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공식화된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한국으로 이주 할 수 있게 되었고, 송출국인 중국,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파키스탄, 네팔 등에 한국에서의 취업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산업연수생제도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부족하나마 법적 지위를 누리는 신분을 갖출 수 있었다.

[월간빛, 2013년 8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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