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서 DOCTRINE

교리 자료실

제목 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42: 죄의 용서를 믿나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7 조회수2,352 추천수0
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42)


47. 죄의 용서를 믿나이다

1) 죄의 용서 ? 하느님의 선물


세상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분리되었고, 이웃들과도, 자기 자신과도 분열되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비구원(非救援)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과 화해하고 일치하는 구원의 공동체(하느님 나라,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는 조건은 한 가지뿐입니다. 죄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교회에 인도하시기 위해 죄의 용서를 선사하십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6-17).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2) 죄의 용서를 믿는 것의 어려움

어떤 군인이 실수로 어린 소년을 죽였습니다. 언제 적이 튀어 나올지 몰라 극도로 긴장을 하고 있는데,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서 상대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총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마을 소년이었습니다. 그 사고 후에 군인은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려 술만 마시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지만, 죄책감을 벗어 버리지 못한 채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우리가 저지른 죄는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힙니다. 죄의 용서를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3) 교회를 통한 죄의 용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그분의 음성으로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듣는다면 용서를 받아들이기 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라는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 교회가 당신의 용서를 계속해 나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 마음의 심리 상태(=죄책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심리 상태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는 우리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죄에 따른 벌까지 없애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신앙과 세례에 연결시키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세례는 우리 잘못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켜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로마 6,4) 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첫째가는 가장 주요한 성사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977항).

세례성사로 모든 죄가 용서받았을지라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후에도 계속 죄로 기울어지는 유혹을 받고 자주 그 유혹에 굴복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후에도 지속적으로 죄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권한을 교회에 맡겨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중대한 잘못이라고 해도 거룩한 교회가 용서해줄 수 없는 잘못은 없다. “아무리 사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그의 뉘우침이 진실하기만 하면 누구나 용서에 대해 확고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누구에게나 용서의 문이 항상 열려 있기를 원하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2항).

4) 용서받음에서 용서함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한 번 용서하기도 힘든 우리에게는 참으로 부담스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77번 용서를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용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음이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일도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피해를 입힌 이웃의 잘못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 이웃의 죄는, 내 죄가 그러하듯이,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로 용서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의 선물을 그 사람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존재”, “예수님의 부활”을 선뜻 믿지 못해서 이런 말들을 합니다. 물론 이런 교리 내용들이 우리 믿음의 골자이지만 어찌 보면 이론일 뿐입니다. 설사 이런 교리들을 이해하고 믿는다고 할 지라도 실생활에서 믿음이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매일매일의 생활 중에서 “죄의 용서를 믿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완성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2013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의정부주보 5-7면,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