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41) 교회를 믿으며
죄인들까지 아우르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 몸소 돌보리라
교황 프란치스코가 얼마 전 사제들을 향하여 내린 일갈은 내 가슴에도 강한 파장으로 남아 있다.
“목자에게서는 양 냄새가 나야 합니다.” “사제들은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해석은 분분하지만, 핵심 정신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교황의 의중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구와 상통한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에제 34,15-16).
하느님께서 목자로서 당신 양떼를 돌보시겠다는 말씀 안에는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당신의 뜻이 뚜렷하게 담겨 있다. 교회가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교회는 존재 의미를 잃고 있는 것이다.
■ 울타리 없는 교회
그런데 누가 교회의 양떼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져 미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료들은 그리스도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하고, 몇 마일 떨어진 곳의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성당으로 갔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주임신부에게 말했다.
“전쟁터에서 친구가 숨졌습니다. 그를 이곳에 묻고 싶습니다.” 신부는 서투른 영어로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이가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가 없습니다.”
병사들이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소.” 그 말에 병사들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병사들은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어리둥절하여 성당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신부가 나와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댁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소.”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울타리를 없애버리셨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항은 이 결단을 이렇게 요약한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이로써 이제 온 인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양떼라고 천명한 것이다.
■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으며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신앙고백이 끝났다. 다음은 하느님 세 위격의 ‘구원 활동’에 대한 고백이다.
사도신경의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라틴어 원어로는 ‘상탐 에클레시암 카톨리캄’(sanctam Ecclesiam catholicam)이라 한다. ‘상탐’은 ‘거룩한’, ‘신성한’이고, ‘에클레시암’은 ‘교회’를, ‘카톨리캄’은 ‘보편된’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은총에 의해 교회에 주어진 은혜이자 교회의 직무 수행을 통해 구현해야 하는 과업이기도 하다. 하나씩 의미를 짚어보자.
첫째, 교회는 하나다. 여기서 ‘교회’는 가톨릭 교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 장로교, 정교회 등 모두는 하나다. 하지만, 도처에서 그리스도인이 ‘여럿’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와 가톨릭 안에서의 불일치는 ‘다양성’과 ‘풍요’를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분열의 위험을 내포한다. 이와 관련해 교부 오리게네스의 호소에 귀기울이자. “죄가 있는 곳에는 다수가 있고, 이교가 있고, 이단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고 모든 믿는 이들이 한 몸, 한 마음을 이루는 일치가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17항). 바로 우리가 서로 화해하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유다.
둘째, 교회는 정말 거룩한가? 분명한 것은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설립자요 기초이신 성자 예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빛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처럼, 교회의 거룩함도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리스도에 힘입어 교회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고 그 구성원들을 ‘성도’(사도 9,13)라고 부른다. 역설이 되겠으나 스스로 거룩하고 세상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 이 사명 때문에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는 교회가 용광로 같은 거룩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들이 와서 정화 받고 의인의 대열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셋째, 교회는 보편적이다. ‘보편적’ 곧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지역, 모든 민족, 모든 이데올로기를 두루 아우르는 포용력이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스스로 ‘보편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모든 백성’에게 교회를 파견하셨다는 사실에 있다(마태 28,19 참조).
그런데 모든 것을 아우르려면 완전해야 한다. 수직으로 다 포함하려면 최고의 수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전체적이어야 한다. 모두를 포함하려면 양적으로 폭도 넓어야 한다. ‘완전성’과 ‘전체성’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보편적’이라는 말은 교회의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완전한 지향을 가지고 있나? 또 전체를 잘 아우르고 있는가? 성찰하면서 ‘보편’이라는 점근선에 가까워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넷째, 교회는 사도적이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이다. 먼저, 이는 교회가 ‘파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는 ‘파견받은 자’를 의미한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며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파견은 어떤 ‘사명 수행’을 위해 보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사도적’이라는 표현은 “사도로부터 이어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그 기초 위에서 살아간다(에페 2,20 참조). 교회는 ‘사도들의 증거와 가르침’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다.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고 들은 것, 그리고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을 전하였다.
거듭 확인하지만, 사도신경은 이들 네 가지 가운데 두 가지만 취하여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한다. 죄인들까지 두루 아우르는 교회를 강조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일환으로서, 교회는 절망하여 길을 묻는 이에게도 길잡이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이 구절은 내가 대학생 때부터 외웠던 구절이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신앙에 대해 질문해 올 때 “난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예외도 없다. 안 그러면 역차별이다. 이 사명 앞에서는 이데올로기도 지위고하도 빈부도 없다. 사제 앞에는 목마른 영혼만 있을 뿐이다. 사제에게는 모든 영혼을 차별 없이 돌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27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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