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44) 우리는 통공 덕에 산다
“나는 듣고 있는데 너는 들리지 않느냐?”
■ 묵주기도 1만단의 기적
지난 11월 2일 의왕 성 라자로 마을 후원회 연례행사에서 특강을 했다. 강의 직전, 라자로 마을 창설의 주역 고 이경재 신부에 대한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 여사의 짤막한 회고 증언 기회를 드렸으면 하는 주최 측의 제안에 기꺼이 수락했다. 최 여사는 초창기 성 라자로 마을을 위문공연으로 도왔던 인연, 김정일에 의한 납북 경위, 북한에서의 행적에 이어, 마리아라는 북한 여인을 극적으로 만나 영적 도움을 얻게 된 사연을 다소 흥분된 어조로 풀어놓았다. 이윽고 신상옥 감독을 만나 기적적으로 탈북하게 된 과정을 토로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 국제전화로 이경재 신부에게 연락하여 영세 의사를 밝히고 도움을 받게 된 일화를 상세히 기억해 내었다. 내가 이야기를 듣다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대목은 결론적으로 이경재 신부가 최은희 여사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최 여사! 사실은 그동안 우리 한센병 환우들이 최 여사를 위해 줄곧 기도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십시일반으로 기도를 모아 묵주기도 1만 단을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증언인가. 최 여사의 납북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었을 때, 한센병 환우들은 합심하여 성치 않은 손가락으로 묵주기도를 바쳤고,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탈북의 기적에 이어 세례의 특은을 보너스로 내려 주셨다고 하니! 한마디로, 통공의 기적이다.
■ 모든 성인의 통공
‘교회’에 대한 고백에 이어지는 것이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이는 신앙의 백미다.
라틴어로 ‘상토룸 코뮤니오넴’(sanctorum communionem)인데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즉, ‘상토룸’을 ‘거룩한 것들’(sancta)의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거룩한 이들’(sancti)의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번역 상 후자를 택했지만 첫 번째 의미로 알아들을 경우 ‘거룩한 것들의 나눔’을 뜻하며 신앙, 성사, 은사 등을 모든 신자가 공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사도신경에서처럼 ‘모든 성인의 통공’으로 번역될 경우, ‘모든 성인’은 성도들, 믿는 이들을 가리키며, ‘통공’은 서로 친교하고 공로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려면 따로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모든 성인’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모든 성인’이라 하면 고정관념이 있다. ‘성인’ 하면 성인품에 오른 이들을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인은 그리스도인 모두를 뜻한다. 성경에는 ‘뽑혀서 하느님 백성이 된 모든 사람’을 ‘거룩한 이들’이라고 얘기하는데, 이를 한자로 쓴 것이 ‘성인’이다.
성인은 이처럼 광범위하게 ‘거룩한 이들’을 뜻하므로, 개신교에서는 이 대목을 ‘성도들의 교통함’, 즉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고 주고받는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그러기에 ‘성인’보다는 ‘성도’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결국, 성도는 ‘교회’의 구성원을 말하며, ‘교회’는 전통적으로 지상 교회, 연옥 교회, 천국 교회로 구분된다. 여기서 지상 교회와 천국 교회는 금세 이해가 가는데, 연옥 교회는 논쟁거리가 된다.
즉, “연옥이 과연 있는가?”라는 물음을 놓고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 사이에 걸핏하면 말싸움이 일어난다. “천국만 있다”고 주장하는 이한테 “연옥이 있다”고 우기다가 싸움하지 말 일이다. 그냥 “네 말이 맞다”고 해 주자. 왜? 어차피 연옥은 천국에 딸린 방이기 때문이다. 연옥은 천국, 지옥 다음의 세 번째 방이 아니고 천국에 딸린 ‘곁방’이다. 그러니 천국만 있다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면 된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네가 천국의 구조를 알게 되면, 네 얘기나 내 얘기나 같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렇다면 연옥은 왜 필요한가? 하느님은 절대 선이시고, 절대 거룩이시고, 순도 100%, 순수 100%이시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존재 자체가 모든 진리의 100%이시다. 그런데 인간은 몇 %나 될까? 아무리 착하게 살고, 노력해 봐야 택도 없다.
또 천국에 합격은 해도 간당간당한 경우가 있다. 믿음으로 붙었지만, 아직 세상의 때가 벗겨지지 않은 것이다. 성품도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천국의 매너도 연습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 거칠게 살던 사람이 아무리 오늘 예수님 믿어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바뀌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던 성품에 관련된 보이지 않는 관성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그대로 따라 가는 것이 바로 ‘육신의 부활’에서 중요한 성찰 거리가 되는데,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곁방’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정화하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러니 연옥은 절망이 아니다. 천국에 이미 속한다. 단지, 시간과 단련이 필요할 뿐.
그런데 이렇게 곁방에 있는 이들이 하루빨리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의 공로를 나눠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연미사를 바치고, 기도해 주는 것이다.
■ 통공
‘통공’이란 단어의 원어는 ‘코뮤니오’(communio)다. 이는 ‘친교’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눔’이나 ‘교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먼저, ‘통공’을 ‘친교’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포도나무 가지와 잎새들이 줄기와 연결되어 한 생명으로 사는 것처럼, 여러 성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한 생명’으로 살고 있다. 한 생명체에는 수억의 세포들이 결합되어 한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지상, 연옥, 천국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은 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친교다.
다음으로, ‘통공’은 말 그대로 공(功)을 통(通)한다는 뜻을 지닌다. 즉, 누군가 다른 성도를 위해서 기도, 선행, 희생 등을 통해 대신 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지상 교회’의 성도들끼리 서로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통공을 행할 수 있고, ‘지상 교회’의 성도가 ‘연옥 교회’의 성도를 위해 공을 쌓음으로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잠벌을 면하게 할 수도 있다.
구약성경의 인물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하느님의 질문에 카인은 대답한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이러한 카인의 항변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 소리가 하늘까지 찔렀다”(창세 4,10 참조).
이는 “나는 듣고 있는데 너는 들리지 않느냐?”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의 가족을 향한 물음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그것까지 일일이 다 알아요.”
주님은 이러한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지도 모른다.
“나한테는 그가 지금 기침하는 소리도, 힘들어 한숨짓는 소리도, 괴로움에 고통 받는 소리도 다 들리는데 너는 왜 모른단 말이냐?”
주님의 이 물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것이 통공 신앙을 이루는 신학적 기초이기에.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11월 17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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