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2) 효율과 인간의 존엄성
‘효율성’이 인간 소외 현상 부추겨
어제오늘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무한 속도경쟁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효율’이 모든 것을 대체하고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와 효율은 동일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온갖 좋은 말로 포장된 ‘효율’이라는 물신(物神)과 자주 맞닥뜨리게 됩니다. 고효율, 에너지 효율, 열효율, 냉난방효율, 공부효율…. 효율이 높은 것만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인 양 받아들이게 만드는 현란한 광고와 그럴듯한 포장과 설명에 압도당합니다. 이러한 문화에 젖어 익숙해져버린 이들에게 낮은 효율은 나쁜 것, 나아가 ‘악’으로까지 인식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경제활동 영역에서 더욱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지닌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이 경제활동에서 겪는 아픔과 고통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근래에는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효율성 차원에서만 인간의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일상화되는 풍토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잉여인간’이라는 말은 나머지란 뜻의 ‘잉여’에 ‘인간’이 붙은 단어로 ‘남아도는 인간, 쓸모없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특히 열심히 공부해 ‘스펙(경력)’은 웬만큼 쌓았지만, 일할 데가 없어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인터넷을 뒤져보는 게 전부인 젊은이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명명한 ‘88만원 세대’(저임금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시기에 평균 월급 88만원의 덫에서 벗어나기 힘든 젊은이들)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잉여인간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붙인 자신을 비웃는 별칭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소외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잉여인간’은 순전히 경제적 관점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직장은 물론이고 어느 사회나 공동체에서건 잉여인간으로 취급받는 것은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실직(失職)은 고사하고 직장에 취직해 일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닌 큰 부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거룩함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경제윤리관은 ‘경제생활은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공동체의 연대감을 받쳐줄 수 있어야 한다’(미국 주교회의 사목교서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정의를’(1986) 28항)고 가르칩니다.
과거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잉여가 됐다면 오늘날에는 일할 의지와 무관하게 매년 수십만 명의 잉여인간이 세상에 나오고 있으니, 분명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짐짓 모른 체하고, 주류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우리 스스로 인간을 쓸모있는 부류와 쓸모없는 부류로 나누는 죽음의 문화에 젖어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에 즉각 응전할 수 있도록 늘 깨어있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2월 2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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