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24) 경제활동의 최종 목적은 ‘인간’
일자리 없이는 인간 존엄도 없습니다
“일자리가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경제학자나 노동운동가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 2013년 9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사르데냐를 사목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실업 등 일자리가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있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을 격려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나가는 동력을 제공하는 경제활동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존중되지 않는 경제 행위, 또 그러한 상태를 묵인하는 사회처럼 절망적이고 비그리스도적인 세상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행하는 어떠한 경제활동이 성장과 효율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그 성장과 효율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간추린 사회교리’ 331항)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신성한 의무로 여기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한순간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은 가난한 이들, 소외당하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 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182항)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을 더 옥죌 만한 얘기가 들리는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바로 의료분야를 비롯해 철도ㆍ전력ㆍ물 등의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겠다는 소식입니다. 경쟁체제를 도입해 경제를 선진화하겠다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돼 있지만 실상은 공공재(公共財)를 전적으로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를 다루는 분야를 공공부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재화가 어떠한 특정인은 소비하고, 어떤 사람은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재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철도 등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며,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전기를 쓰지 않을 수 없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공공부문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공분야를 일반적인 시장에서 거래하는 상품과 똑같이 취급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밖에 없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적인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구매능력 유무가 절대적 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정부가 발표한 투자 활성화 대책은 ▲ 의료기관 자회사를 통한 영리활동 허용 ▲ 외국인환자 병상비율 규제 완화 ▲ 법인 약국 허용 등 경기 부양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의료민영화 정책으로 방향을 잡는 일입니다. 정부의 구상대로 되면 의료산업의 효율은 높아지게 될지 모르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지금보다 몇 배나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의료서비스를 받아야 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 앓아야 하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내 파산의 60%가 과도한 의료비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효율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가난한 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이며, 이는 결코 하느님이 바라시는 세상의 모습은 아닙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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