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1) 가난을 바라보는 눈
가난한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한 세대 전으로만 우리 자신들의 기억을 되돌려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 주위에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사는 넝마주이에서부터 부랑인,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과 걸인 등….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다양한 모습의 가난한 이들도 엄연한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고 골목에서 구슬치기니 딱지치기를 하던 또래가 있었으며 할머니가 무거운 짐이라도 이고 집을 나설 때면 얼른 달려와 받아주던 동네 형이 있었습니다. 잡동사니가 그득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도 이웃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거들고 싶어 하던 동네 아저씨도 정겨운 모습입니다.
간혹 먹을거리가 떨어진 이들은 동네를 다니면서 동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찬밥이지만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게 우리 인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추운 겨울이더라도 누가 굶고 있네, 얼어 죽었네 하는 일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눔의 온기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인정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주위에서 ‘이웃’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먼 친척보다, 아니 사촌보다도 낫다던 이웃은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가 된 지 오래고, 때로는 사소한 다툼 때문에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일이 코앞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등 몇 푼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어울려 살아야 할 이웃을 모질게 팽개치는 무정한 세상이 만들어낸 살벌한 풍경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경제윤리관과 인간관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진 것만으로 사람을 구별하거나 냉대하는 일은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떠돌아다니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적게 가진 사람은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고, ‘잉여인간’으로 낙인찍혀 사회의 ‘짐’, 나아가 공공의 적으로까지 전락하고 마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진 이들이 느끼는 불편함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이들이 하나둘 우리 주위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이들도 어느새 그런 잘못된 사고에 젖어 이웃의 가난과 불편을 애써 외면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가난한 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장소나 공간, 곧 게토라고 할 수 있는 어둡고 그늘진 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이나 유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것일까요? 언젠가 우리의 이웃이었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스런 존재나 ‘물건’, 그것도 쓸모없는 ‘잉여물’로 보는 시각은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 안에서도 많은 상처를 남기고 눈물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IMF 구제금융 사태로 외환위기를 겪은 후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아픈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웃들을 소외시켜 내버린 원인제공자가 우리 자신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가난한 이웃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이 그만큼 좋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2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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