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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58: 영원한 삶, 무슨 근거로 믿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03 조회수1,934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58) 영원한 삶, 무슨 근거로 믿나

12사도의 순교, ‘영원 생명’의 값비싼 보증



■ 시간 묵상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앉은 책상 좌측 뒤쪽 책장 위에는 액자 사진 둘이 놓여있다. 하나는 ‘연민의 예수님’ 액자이고 다른 하나는 송해붕 요한 세례자의 생전 얼굴 사진 액자다. ‘연민의 예수님’을 모신 것은 나의 모든 연구 활동과 저술에 무한한 주님의 자비가 넘치도록 흘러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송해붕 요한 세례자의 액자를 세워둔 의중은 그를 일단 연구소 비공식 주보로 모시면서 그의 뜨거운 선교 열정을 본받기 위함이다. 그가 6·25때 연구소 터 인근에서 순교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기회에 밝힌바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참고로, 그가 평소 전교에 각별한 열정을 품고 불철주야 활약했음과, 순교 및 성인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음, 그리고 자신의 원의대로 순교하여 6·25 전후 시복시성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다는 사실을 언급해 둔다.

어쨌든, 오늘 불현듯 그의 얼굴이 커 보인다. 그 이유는 그가 바쳤다는 ‘시간 묵상’ 기도 때문이다. 송해붕 요한 세례자는 하루에도 자주 ‘시간 묵상’에 빠져들곤 했으며, 당신 제자들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르쳤다고 한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째깍 째깍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죽음을 상기하고 영원을 동경하라!”

바로 이것인데, 그 은혜는 의외로 크다. 저절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게 되고, 생의 목적이 뚜렷해지니 말이다. 이에 더하여 송해붕 요한 세례자에게 시간은 주님을 만나는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차제에, 시간에 관하여 사색에 잠겨 보자.

하루살이가 느끼는 1초의 길이와 백 년을 넘게 산다는 거북이가 느끼는 1초의 길이는 같은 것일까. 시간 연구가들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자 한 생애를 ‘충만하게!’ 누리고 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정녕 어떤 실재이며 영원은 무엇인가? 철학자 칸트의 통찰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기초한 현대 과학의 설명은 명쾌하게 일치한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안에만 존재하고 우주 어디에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이는 인간의 궁극적인 동경이 되고 있는 영원의 실체가 바로 현재라는 전율할 사실 앞에 우리를 세운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 놀라운 발견에 경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은 영원과 가장 닮았습니다. ‘오늘’은 영원의 불꽃입니다. ‘오늘’, 영원한 생명에 투신해야 합니다.”


■ 영원에의 동경

오늘에 영원이 깃들어 있지만, 이 영원은 제한된 영원이다. 지상에서의 영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원은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다.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 불멸이 / 모든 고통, 모든 눈물, / 모든 두려움과 울림을 휩쓸어 버리고, /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원의 천둥소리처럼 / 내 귀에 이 진리 외치는 것을 느끼네. / ‘너는 영원히 살 것이다!’”

바이런뿐만이 아니다. 「죄와 벌」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도스토예프스키는 또 하나의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그의 동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믿고 있다. 고통이란 치유될 것이며 보상을 받으리라고. 인간적 모순의 모든 수치스러운 부조리는 불쌍한 신기루처럼, 무능하고 무한히 편협한 인간의 유클리드적 지성이 지어낸 가소로운 허구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세계가 대단원의 장식을 고할 때, 영원한 조화의 순간이 오면, 너무나도 소중한 그 무엇이 생겨나서, 그것만으로도 모든 가슴과, 모든 원한의 위로와,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악의 보상과 그들이 흘린 모든 피의 보상을 위해서 충분할 것이라고.”

‘영원한 조화의 순간’. 이것이야 말로 필경 인간이 염원하는 궁극의 욕구, 모든 욕망의 종점일 터다.


■ 영원한 삶의 증인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믿음이 없는 이들의 물음에 진지하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죽은 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로 12사도의 순교를 꼽고 싶다. 그들은 예수님 부활과 승천의 목격 증인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순교는 호교론적으로 그 이후 세대의 증거보다 훨씬 설득력을 지닌다. 거짓 정보에 농락당할 위험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본디 본래 그들도 영락없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낱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연행되었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쳤다(마르 14,43-52 참조).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하였다(마태 26,69-75 참조). 그런데 이들은 모두 돌연 어느 한 순간 극적으로 전향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증거자로 나선 것이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12사도의 순교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진술을 토대로 정리해 보면 12사도는 다음과 같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교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에서 전교하다가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순교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순교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팔레스티나와 이집트,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요한은 파트모스섬에서 유배생활을 했고(묵시 1,9 참조) 순교에 버금가는 박해를 받았다.
필립보는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했다.
바르톨로메오는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참수를 당했다.
토마스는 고대 이란을 거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창에 맞아 순교했다.
마태오는 유대아를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교 중에 참수 당했다.
시몬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다.
가리옷 사람 유다 대신 12사도에 들어온 마티아는 콜키스에서 참수 당했다.

왜, 무엇을 위하여 그들은 장렬한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일까? 그 답은 간명하다. “영원한 생명은 있다!” 이 하나를 증거 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X자 십자가형을 당했던 안드레아가 고통스런 죽음 앞에서 바쳤다는 기도는 안드레아가 무엇 때문에 순교했는지를 감동적으로 전해 준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내가 뵈었고 내가 사랑했던 당신, 당신 안에 있는 나를 받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 아멘.”

죽음은 웅변이다. “이 주장에는 하나의 거짓도 조작도 없습니다”하고 외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웅변이다. 그 어느 누구도 거짓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영원한 진리를 위해서만 목숨을 내어놓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순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그 무엇보다 비싼 보증이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2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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