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의 보물] (15) 공의회 (상)
공의회, 사도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회의
지난 한 해 가톨릭 모든 신자가 힘을 모아 지낸 '신앙의 해'는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에 맞춰 개막을 선포했다. 지금은 각 본당에서 사제들이 우리말로 미사를 집전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미사 경문을 라틴말로 읽어 신자들은 미사 전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생활이 많이 바뀌고 쇄신됐다고 말한다. 공의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공의회가 교회 생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역사를 통해 알아보자.
공의회의 기원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면서 유다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교회에 들어오게 됐다. 문제는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베풀어야 하는지의 여부였다.
예수님이 활동하는 동안에는 복음이 주로 유다인들에게만 전해졌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계신 동안에는 없었던 문제가 새롭게 생겼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과 원로들이 함께했다.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가 자신들의 활동을 보고하고 마지막에 야고보 사도가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원로들 전체의 이름으로 안티오키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두 가지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 전체가 모였다는 것이고 문제에 대한 해결은 모든 사도들의 이름으로, 즉 만장일치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12사도를 뽑으셨다. 왜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인 7이나 10이 아니라 12일까. 12지파로 이뤄졌던 이스라엘을 새롭게 불러 모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나타내고 12사도가 중심을 이루는 교회가 옛 이스라엘을 승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지만, 기존 가르침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상황과 마주해서는 이스라엘 원로들의 전통을 따라 함께 답을 찾았다. 이러한 전통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게도 이어졌다.
함께 가는 길, 공의회
주교들은 복음 선포를 위해 세상으로 흩어졌다.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주교들이 공동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초세기의 교회의 삶에서부터 드러난다.
새로운 주교가 났을 때 주교 서품을 위해 반드시 이웃 교구의 주교들이 모였다. 이는 단순히 축하 차원이 아니다. 새 주교와 그 교구의 가르침이 이웃 교구에서 이뤄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과 다르지 않고 서로 통한다는 상호 인정의 상징이었다.
이는 큰 교구와 그 주변의 교구들이 묶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구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교회 내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는 비록 전체 교회의 주교들은 아닐지라도 지역의 주교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는데 이때는 만장일치 원칙이 적용됐다.
주교들은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항을 다수결로 결정을 할 경우 소수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틀린 의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주교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은 단순히 그 주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교구 대표의 의견이 틀렸다는 것은 교구 전체가 틀렸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주교 회의에 만장일치의 원칙을 적용했고, 주교들이 어떠한 사안을 한마음으로 결정할 때 교회를 이끄시는 성령께서 그 결정을 보증하신다고 여겼다. 이를 통해 전 교회에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분열을 최소화하면서 교회 전체가 한 배를 타고 간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렇게 주교들의 모임인 공의회는 초세기부터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의회는 주교의 참석 범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지역이나 나라의 주교들이 모였을 경우는 지역 공의회라 부르고 전 세계 주교들이 모였을 경우에는 보편 공의회라고 부른다. 라틴어로는 공의회를 콘칠리움(Concilium)이라고 하는데 이는 의견을 주고받기 위한 모임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라틴말 시노두스(Synodus)는 우리말로 '함께 가는 여정'을 뜻한다. 하나의 목적을 가진 길동무들의 모임을 의미하며, 이는 순례하는 교회의 아름다운 표상이기도 하다.
공의회는 지난 2000년 역사 안에서 많이 열렸다. 셀 수 없이 많은 지역 공의회는 차치하더라도 전 세계 주교님이 함께 모인 보편 공의회만도 21차례 열렸다. 이 공의회들을 통해서 신자들이 생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들이 결정됐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23일, 신정훈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정리=백영민 기자]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16) 공의회 (하)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교들 지혜 모으는 공의회
- 종교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트리엔트공의회.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교회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함께 모여 성령의 이끄심으로 지혜를 모았다.
첫 번째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에서 개최됐다. 공의회를 소집한 이는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였다. 당시에 문제가 됐던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신가" 하는 것이었다.
역사 속 공의회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지만 하느님과 같은 분은 아닌, 인간 중에 뛰어난 분 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쯤 되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아리우스 이단'이라고 하는데,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되지 않은 당시에 이 가르침을 지지하는 이들이 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고백하던 정통 신앙과 대립한 것이다. 제국 안정에 더 큰 관심을 가진 황제는 정통과 이단에 대한 구분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교회 가르침이 통일되기만을 바랐다.
공의회 시작 당시만 해도 수적으로 우세하고 황제와 가까웠던 아리우스의 주장이 관철될 것을 예상했지만, 성 아타나시우스 교부의 활약으로 '예수님이 성부와 한 본체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문을 제정하고 정통 교리로 확립했다. 첫 번째 보편 공의회는 비록 세속의 권력인 황제 명으로 소집됐지만, 공의회를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두 번째 공의회는 381년 당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다. 당시에 문제가 됐던 것은 "성령께서 누구이신가"였다. 이 공의회에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확정됐다.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을 고백하며, 삼위일체 신앙을 굳게 믿게 됐다.
세 번째 공의회는 431년 에페소에서 열렸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에페소는 성모 마리아께서 여생을 마친 곳이다. 이곳에서 주교들은 '성모는 천주의 모친'이라는 교회 가르침을 확정했다. 사실 당시 문제의 핵심은 성모의 신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원이였다. '그리스도가 사람에 불과한가, 아니면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가'라는 질문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므로 성모께서 나으신 분은 천주님'이라는 사실을 확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성모께 '천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드렸고, 오늘날까지 믿을교리로 지키고 있다.
네 번째 공의회는 451년 칼케돈에서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에 따라서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이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죄 이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교리가 확정됐다.
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어야 할 성부의 아들인 동시에 우리가 온 생애를 바쳐 따라야 할 인간의 모범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대 레오 교황은 공의회에 직접 참석할 수 없었음에도 편지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모든 교부들은 "레오의 입을 통해 사도 베드로가 말한다"고 입을 모았고, 교황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즉 공의회를 통해 사도들의 가르침이 변함없이 지속한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이상의 첫 네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이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확정, 반포됐다. 이후 533년과 680년 두 차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리고 787년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열렸는데, 이는 모두 첫 네 공의회의 가르침을 확인하는 장이었다. 이렇게 첫 일곱 공의회의 가르침은 동서방교회와 개신교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인정하고 지켜가고 있다.
1054년 동서방교회가 오해로 말미암아 갈라진 이후 공의회는 서방에서만 개최됐다. 중세의 공의회로는 5번에 걸쳐 로마의 라테라노성당에서 교회생활 전반을 다루기 위해 개최된 라테라노공의회와 동서방교회의 화해를 모색했으나 최종적인 결실을 얻지 못했던 리옹공의회와 피렌체공의회, 대립 교황 등장 이후 갈라진 교회를 수습하고 교회 재정비를 위해 소집된 콘스탄츠공의회와 바젤공의회,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수습하기 위해 소집됐던 트리엔트공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공의회, 성령의 이끄심으로
교황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프랑스 아비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로마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세 명이 동시에 정통 교황임을 주장해 교회가 셋으로 갈라졌다. 이 문제는 콘스탄츠공의회를 통해 해결된다. 세 교황이 동시에 사퇴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다. 이로 인해 공의회 권위가 교황 권위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공의회 우위설'이 등장해 한동안 지속됐다.
후대에는 교황 절대주의도 등장했다. 교황은 홀로 하느님에게서 권한을 받아 행사하고 주교들은 교황의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교회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높다고 하지도 않고 교황이 공의회보다 높다고 하지도 않는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주교단 전체와 함께하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최고 권한을 행사한다고 가르친다.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두 함께 모여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교회의 갈 길을 정했던 교회 최고 결정 기구다.
여기서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이 잘 드러난다. 각각의 주교들이 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결정했기 때문에 그 결정은 전 세계에서 구속력을 지닌다.
또한 사도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오는 주교들의 계승은 교회 가르침이 시대를 뛰어넘어 일관된다는 것을 보증한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에게 전해진 복음 말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해지도록 하는 가톨릭교회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신정훈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정리=백영민 기자]
※ 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 방송되며, 지난 회는 누리방(http://web.pbc.co.kr/tv)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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