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의 보물] (17) 제2차 바티칸공의회 (상)
교회, 세상을 향한 창문을 열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던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사진은 성 베드로대성전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단. [CNS]
교회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이를 위해 1869~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공의회는 불안한 정세 속에서 교회에 관해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교황직에 대해서만 다룬 채 중단됐다. 그로부터 약 1세기 후, 중단됐던 공의회 의제인 교회를 계속 다루기 위해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배경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이는 착한 교황이란 별명을 지닌 요한 23세 교황이다. 1958년 비오 12세 교황 서거 후 후임자를 뽑는 콘클라베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유력한 두 교황 후보 사이에서 결정이 쉽게 나지 않자 추기경들은 제3의 후보였던 당시 78세의 고령인 베네치아대교구장 조반니 론칼리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기보다 과도기의 교황으로 잠시 교회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교황은 짧은 시간 동안 교회 내 많은 것을 바꿨다. 박봉으로 살아가던 교황청 직원들의 월급을 두 배로 올렸고, 밤에는 평복을 하고 시내에 나가 일반 신자들의 생각을 알아보기도 했다. 첫 성탄에는 청소부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일 때문에 가족과 성탄을 지낼 수 없는 이들과 성탄 미사를 봉헌했다.
착한 교황 요한 23세의 가장 큰 업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이다. 교황 즉위 100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59년 1월 25일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추기경단과 기자들 앞에서 공의회 소집을 선포했다. 이단을 통한 교회의 위기가 없는데도 왜 공의회를 소집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교황은 교회가 답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창문을 열고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이렇게 소집된 공의회는 3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62년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2000여 명의 전 세계 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장엄하게 시작했다.
공의회의 표어는 'aggiornamento' 였다. 금일화 또는 현대화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용어는 원래 교회 용어라기보다는 상점에서 쓰는 말이었다. 봄이 되면 여름옷을 진열하고 여름이 되면 가을옷을 준비하는 상점의 모습처럼 교회 가르침도 그 내용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에 있어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사실 가톨릭교회는 18세기 말부터 급격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발달, 그에 따른 세계 변화를 수용하고 유연하게 대처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해 경계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자세는 이성을 내세우는 근대 학문이나 이를 반영한 새로운 신학 내지 민주주의 같은 새로운 정치제도를 교회가 수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며 고립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교황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에 신선한 바람, 즉 바람으로 표현되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는 교회의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경과
공의회가 시작했을 때 준비위원회는 10개의 공의회 초안을 준비했다. 이 초안들이 공의회 교부인 지역 주교들에게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공의회는 곧 끝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공의회장에 모인 주교들은 공의회가 주교들의 회의라는 것을 자각했고, 준비됐던 10개의 초안은 모두 기각했다. 이후 공의회 문헌을 작성하는 새로운 신학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위원회에는 교황청 관리뿐만 아니라 지역 주교들이 대거 참석했고, 1950년대 진보적 신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제재를 받았던 칼 라너, 이브 콩가르, 앙리 드 뤼박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이 새로이 참여했다.
1963년 공의회가 다음 회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서거했다. 공의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회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던 당시 밀라노대교구장이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선출됐고 공의회는 재개될 수 있었다. 공의회는 이로부터 3년 후인 1965년 12월 8일 16개의 문헌을 내놓으면서 폐회했다.
공의회의 또 다른 큰 특징은 교회일치다. 1959년 요한 23세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이번 공의회는 일치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54년 동서교회의 분열과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따른 서방 교회의 분열을 거치면서 보편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전체 세계를 아우르는 이름을 지녔지만 실제 모습은 그러지 못했다. 동방교회와 서방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개신교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은 1960년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을 위한 사무국을 설치하고 교황청 성서대학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아우구스티누스 베아 추기경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추기경은 탁월한 경험과 교회일치를 위한 열정으로 개신교, 정교회와 접촉을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교회협의회와 러시아정교회 신학자들을 공의회 공식 참관인으로 초청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의안에 대한 투표권은 없었지만, 공의회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공의회 문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는 교회일치 운동의 바탕인 '일치교령'을 반포했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 기간 중 교황 바오로 6세와 동방교회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의 만남을 계기로 1054년 있었던 동서교회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고 일치를 위한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 [평화신문, 2014년 4월 20일, 신정훈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정리=백영민 기자] [가톨릭 신앙의 보물] (18)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하)
성령, 교회를 세상 속으로 이끌다
공의회 문헌은 그 중요성과 등급에 따라서 '헌장'과 '교령'과 '선언'으로 분류된다. 교회ㆍ사목ㆍ계시ㆍ전례 등 네 개의 헌장과 주교 직무ㆍ사제 직무와 생활ㆍ사제양성ㆍ수도자 생활ㆍ평신도 사도직ㆍ동방교회ㆍ일치ㆍ선교ㆍ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 교령, 그리고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ㆍ종교의 자유ㆍ가톨릭교육에 관한 3개의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 16개의 문헌 중 중요한 영향을 끼친 문헌에 대해 짧게 살펴보자.
교회 담을 허물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제1차,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중심 주제는 교회다. 그 중 큰 특징은 교회에 대한 이해 변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교회는 자신을 세속과 마귀와 육신이라는 원수와 투쟁하던 존재로 이해했다. 세속과 투쟁하며 '구원의 방주' 안에 머물면서 하늘나라를 향해 가야 한다고 이해했던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빛을 전달해야 하는 하느님의 신비의 도구'로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세상 안에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성사적 역할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복음 선포의 장소로 이해하게 됐고,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이나 불교ㆍ힌두교ㆍ이슬람교와 같은 이웃 교회의 신봉자들,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까지도 잠정적 대화의 상대자로 이해하고 포용하게 됐다.
그동안 가톨릭교회의 배타적 모습은 모든 인류와 화해를 이뤄야 하는 교회의 보편적 소명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세상에 대한 개방적 자세로 바뀌었다. 교회 역할은 결코 교회 내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교회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와 세상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자각이 탁월하게 표현되는 것은 바로 「사목헌장」이다. 제목에서부터 「사목헌장」은 이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현대의 세계 안에 있는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교회는 세상에 무관하게 자신만을 위해 기도할 때가 아니라, 시대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징표를 알아봐야 한다. 세상의 구체적 현장 안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자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목헌장」은 정치ㆍ경제ㆍ문화ㆍ혼인ㆍ국제 사회라는 현대의 시급한 다섯 가지 주제를 상세히 다뤘다.
교회생활 안에서의 변화도 교회의 새로운 이해가 가져온 큰 변화이다.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 안에서는 교계제도가 강조되며 성직자의 역할이 매우 중시됐다. 성체성사를 중시하면서 생겨났던 성직자들의 특별한 역할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지나며 과장돼 신자들을 수동적인 교회 일꾼으로 전락시켰다. 물론 「교회헌장」은 교회의 구성원을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로 구분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교 신자 전체의 동등함을 앞세운다.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고 하느님 자녀가 되는 품위에서는 교황이나 평범한 시골 어르신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공의회는 이를 통해 무엇보다도 세상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성직자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고유한 소명이 있다. 평신도는 정치나 경제나 사회 문화와 예술 등 각 분야에서, 특히 가정과 직장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면서 자신이 처한 자리와 주변을 복음으로 성화할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공의회는 가르친다.
공의회 정신, 충실히 따라야
그동안 개신교는 성경을 강조하는 반면 천주교는 성사를 중시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을 모르는 천주교 신자는 많지 않다. 아니 천주교 신자가 성경을 모른다는 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수많은 성경 공부가 이뤄지는 까닭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계시헌장」의 반포이다. 「계시헌장」은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교회 내에서 성경공부에 불을 붙인 원동력이 됐다.
이웃종교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천주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문헌은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600만 유대인 학살에 "교회는 과연 책임이 없는가"에서 출발한 이 질문은 유다인들에게 충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근거로 그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불교나 힌두교, 이슬람과 각 민족 전통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 요소를 정당하게 평가하며, 그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종교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존중하고 그것으로부터 마땅히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구원의 원천인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몸과 마음을 다해 증언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 복음의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현대 세계에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표현을 바꾸었을 따름이다.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은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가 매스미디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가르쳐주며 오늘날 신자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 매체나 사회 매체를 활용해 복음을 전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살면서 공의회의 교부들을 이끄셨던 성령의 움직임을 마주하고 그를 충실히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 [평화신문, 2014년 4월 27일, 신정훈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정리=백영민 기자]
※ 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 방송되며, 지난 회는 누리방(http://web.pbc.co.kr/tv)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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