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6) 8가지 참 행복 -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행복
영이 깨끗한 사람의 ‘행복’… ‘하느님을 본다’는 것
■ 유혹을 물리치려면
2차 세계 대전 때,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병사들이 잠시의 휴식시간에 그리움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마다 전쟁이 끝나 귀향하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대상을 얘기했다. 애인, 부모, 처자식 등. 그러던 중 한 병사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난 가장 그리운 것이 유혹일세!”
유혹은 사람을 홀린다. 그러기에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서 면화를 사고파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탐욕스런 상인들은 남부에서 산 면화를 경계지역 너머인 북부로 몰래 들여와 큰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이런 상인 중 한 명이 미시시피강 증기선 선장에게 접근해 북부까지 면화를 운반해 주면 100달러를 주겠다며 유혹했다. 선장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상인은 또다시 유혹했다.
“그렇다면 500달러를 드리겠소.”
“안 됩니다.” 선장은 단호히 외쳤다.
“그러지 말고, 1000달러에 합시다.” 상인은 값을 더 올렸다.
“안 됩니다.” 선장은 더 단호하게 외쳤다.
“정 그렇다면, 3000달러를 드리겠소.” 상인은 끈질기게 선장을 꼬드겼다.
그러자 선장이 총을 꺼내 면화상인을 겨누며 소리쳤다.
“이 배에서 당장 내리시오! 당신이 말한 가격이 내가 매기고 있는 액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단 말이오.”
유혹을 물리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관철하기 위해 ‘권총’을 동원해야 했다는 얘기가 해학적이다. 그만큼 깨끗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다.
■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여섯 번째 행복의 주인공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여기서 ‘깨끗한’은 그리스어 ‘카타로스’(katharos)의 번역으로 흠집, 잡티, 오염이 없는 ‘순수함’을 뜻한다. 또한 오롯함, 거룩함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한 ‘마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뉴마티’(pneumati) 곧 ‘영’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본디 히브리어로 ‘깨끗한’을 뜻하는 단어는 ‘타헤르’(taher)로, 이는 ‘정결하다’, ‘깨끗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에서 타헤르(taher)는 신체, 도덕상의 그리고 종교적인 정결과 관련 있다. 구약시대에 정결의식은 한마디로 ‘외형적인’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의식이었다. 행위로 죄가 드러났을 때에만 죄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부정 탔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 먹으면 부정 탄다’는 말이 있다. 또 ‘피 흘리는 것에 가까이 가지 마라’, ‘시체를 절대 만지면 안 된다’, ‘병자들 또는 이방인들과 함부로 악수하지 마라’ 등이 있다(레위 11~15장 참조). 이렇듯 유다인들은 항상 겉으로만 정결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올 때,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씻는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이 외적인 정결의 의미를 내적으로 전환시키신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그렇다면 ‘영이 깨끗하다’는 말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첫째, 말 그대로 영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뜻한다. 바꿔 말하면 영이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곧 티도 없고, 욕심도 없고, 탐욕도 없고, 증오도 없고, 미움도 없는 등의 ‘순결한 것’ 말이다.
둘째, 영적으로 ‘온전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중적이지 않은 마음, 위선적이지 않은 마음이다. 설사 영으로 깨끗하다 하더라도 마음이 나뉘면 안 된다. 하느님께 마음을 드렸다가도 세상에 나와서는 금방 재물에 마음을 준다면 이는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 구약의 정결예식을 완성한 십자가 제사
예수님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늘 한계에 부딪히는 우리 인간에게 ‘영적 깨끗함’에 이르는 지름길을 내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예식을 능가하는 십자가 제사로 내적·영적 정결을 완성하셨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성혈로 우리는 온전히 깨끗하게 되었다. 이 정결에 동참하는 길은 이제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믿음으로 마음(=영)을 정화시키는 십자가 제사는 오늘 우리 교회에서 무엇에 해당할까? 바로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다. 성체성사 때 기념되는 예수님 몸의 봉헌과 피 흘리심이 바로 우리의 죄를 무력화시키는 예식이며, 고해성사 때 이루어지는 죄 사함의 선언이 바로 우리의 죄를 청산해주는 예식인 것이다.
■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영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에 있다고 했다. 이는 곧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말이다. 영이 맑으면 눈이 맑아져 잘 보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본다는 말인가? 일단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첫째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영이 깨끗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기도 체험을 깊이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몸은 ‘성령의 궁전’(1코린 6,19 참조)이란 말이 있거니와, 우리 영을 청결하게 정리를 했을 때 하느님께서 내주하기를 좋아하신다. 반면에 탐욕스럽고 영이 탁한 사람 안에는 악령이 머물기를 좋아한다.
다음으로, 영이 맑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현현하는 하느님의 자태를 보는 눈이 열린다. 그러면 꽃 한 송이 속에, 계절의 변화 가운데, 인간관계 안에 서려 있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철학적으로 말하여 우주 안에 삼투되어 있는 진선미를 발견하는 눈이 뜨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의 전모를 볼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았다’고 말하지만 실상 이는 모세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등’만 살짝 본 것이다(탈출 33,20-23 참조). 그러기에 우리 각자의 하느님 체험은 극미한 맛보기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우리는 기절할 만큼 황홀해진다. 하지만 이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미지의 하느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7월 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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