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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78: 8가지 참 행복 -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21 조회수2,509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8) 8가지 참 행복 -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궁극적 평화는 예수님 부활을 통해 완성!



■ 방법적인 평화와 존재론적인 평화

15년 전쯤, 뉴에이지와 신흥영성 연구에 골몰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이 왜 이론적으로 허점이 많은 사이비 영성에 빠져드는지 궁금했다. 그 실체를 파악할 요량으로 거금을 들여가며 그 중 대표적인 입문과정들을 이수해 봤다. 공통점이 하나 확인되었다. 어떤 이름으로 간판을 걸었건, 모두가 이른바 ‘평화 프로그램’을 구비하고 있었다. 몸풀기 운동을 통하여 심신의 이완을 꾀한다든지, 호흡을 가다듬어 알파 뇌파 상태에 이르게 한다든지, 상상을 유도하여 몽환의 상태에 빠지게 한다든지… 등등. 대부분 전통 수련기법이나 심리학의 기법을 원용한 것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신청자들이 대체로 불안의 끝자락에서 평화를 희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전만 해도 평화 욕구는 전형적인 종교 욕구로 간주되었다. 곧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국 종교에서 그 답을 찾는다는 공식이 불변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제 평화를 찾는 사람들이 굳이 기성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보다 값싸고 효율적인 프로그램들이 얼마든지 있게 된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뉴에이지와 신흥영성들은 종교 욕구를 겨냥하여 상업적인 목적에서 생겨난 영적 대체물이라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실제적으로 이들은 교묘한 상술로 종교입문자들만 가로챈 것이 아니라, 기성종교인들을 빼가는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지금도 저들 단체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유혹이 되고 있다. 카이스트에 다닌다는 아들이 ‘마음수련’에 빠져 신앙을 버렸는데 어찌해야 옳겠냐는 어머니의 탄식 어린 물음을 들은 것이 엊그제 일이기도 하다. 과연 저들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평화’를 축소·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평화를 심신의 조작을 통하여 방법론적으로 또는 기계론적으로 이룩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평화가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평화는 본디 존재론적 내지 관계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참평화는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풍요롭다.

어떻게 그러한가. 이제 그 깊이에 잠겨보자.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의 일곱 번째 주인공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말의 성경적 표현인 그리스어 ‘에이레노포이오이’(eirenopoioi)라는 단어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와 ‘만들다’, ‘이루다’라는 뜻을 가진 ‘포이에오’(poieo)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이 말을 영어로 하면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평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의 번역일 뿐이다. ‘샬롬’(shalom)은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환경적인 안전, 태평성대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구약에서 샬롬은 여러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곧 개인 차원에서의 평화(창세 43,27 참조), 관계적인 평화(창세 26,29 참조), 환경적 평화(창세 15,15 참조)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성경은 궁극적으로 이 평화가 야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이 도성을 위하여 내가 몸소 마련한 온갖 좋은 것과 온갖 평화를 보면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떨게 될 것이다”(예레 33,9). 여기서 ‘내가 몸소 마련한’이라는 표현 속에 평화가 하느님에게서부터 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일찍이 판관 기드온은 하느님을 ‘야훼 샬롬’ 곧 ‘주님은 평화’라고 불렀다(판관 6,24 참조).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이제 평화를 누리는 길을 다각도로 제시하신다.

먼저, 온유와 겸손을 평화의 길로 제시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여기서 ‘안식’으로 번역된 말이 그리스어 ‘에이레네’다. 이는 히브리어로 ‘샬롬’에 해당한다. 평화는 온유한 사람의 몫이다.

또한, 예수님은 높은 차원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낮은 차원의 평화를 과감히 포기해야 함을 가르치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평화’ 대신 ‘칼’을 주러 왔다는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역설이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여러 차례 평화를 강조하셨던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법을 쓰신 것이다. 곧 ‘평화’보다 더 소중한 가치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신앙에 방해되는 인간관계를 ‘칼’로 가차 없이 끊어야 함을 역설하시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초월적 차원의 평화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통해 누리는 이러한 차원의 평화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환경적인 평화가 깨진 곳에서도 가능하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문제가 없을 때, 전쟁이 없을 때, 박해가 없을 때,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 평화롭다. 그런데 하느님은 문제가 있고, 전쟁이 있고, 박해가 있고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가운데에도 평화를 주실 수가 있다.

의인, 곧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이러한 궁극적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 부활하신 후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실 때 예수님의 인사말은 바로 이 평화의 선언이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이 평화는 모든 것이 완성된 평화다. 구원을 받을까 못 받을까, 죽을까 살까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미완의 사안들이 다 해결되고 그리고 모든 용서도 완성되고 나서 마침내 천상에서 누리는 평화다. 바로 이 평화를 부활의 증인들은 살아서도 누리는 것이다.


■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축복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다.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궁극적으로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이 회복과 함께 아빠 하느님의 함께하심 곧 임마누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돌보심도 회복된다.

일단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스스로 거부하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수용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을 비하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소중함을 수긍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됨은 자녀의 피보호의 권리와 상속권을 누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배려 하에 온 천하가 자신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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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7월 20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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